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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사위 놀이


세상은 주사위 놀이를 하는 신들의 탁자다.
 

세계의 어린이 제우스

니체는 '우연'이 세계를 지배하는 것으로 파악한다.
'필연의 법칙'이 세상을 지배한다면 그것은 끝 없는 구속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니체는 목적론적 세계관을 거부한다.
세계를 목적론적으로 파악하면 세계의 도덕화를 초래한다.
종교적 또는 형이상학적으로 제시된 목적이라는 척도로 일상을 제단해야 한다.
목적에 합치하면 선이된다.
목적에 위배되면 악이 된다.

대부분의 형이상학은 세계를 필연의 법칙으로 파악한다.
유한한 사물의 존재는 영원한 진리 앞에서 부정의한 것으로 추락한다.
그러므로 필연의 세계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불의의 합이라고 말하게 된다. 
이런식의 부정적 세계관은 세계를 파괴하는 결과를 낳는다.
니체가 필연의 법칙을 부정한 것은 근대이성이 가져온 자기파괴적 모순을 직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니체는 누구 보다 근대의 과학적 지식에 정통했다고 한다.


<구글에서 검색한 엔트로피 이미지. 이미지가 설명하는 바와 같이, 시간은 전체 체계를 평평하게 동질화한다. 남는 것은 체계 내에 모든 유기적인 것들의 죽음이다>

예를 들어 근대이성이 낳은 과학적 성과중의 하나인 엔트로피 법칙을 상상해 보자.
엔트로피 법칙에서는 세계를 닫힌 체계로 본다.
닫힌 체계 내에서 에너지의 총량은 고정된 값으로 주어져 있다.
닫힌 체계에서 생명이나 물체란 에너지의 응축한 결집적 현상이다.
이 응축된 에너지는 지속적으로 고르게 분포하는 방향으로 이동한다.
에너지의 총량은 절대변하지 않으며. 에너지는 천체 체계 내로 균질하게 분포하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엔트로피 법칙에 따르면 체계는 결국 생명의 죽음으로 가득찬다.

근대적 지식에 기초한 이런식의 필연성을 니체는 거부하라고 말한다.

필연성을 거부함으로서 인간은 세계 속에서 자유롭게 놀 수 있다.

 

우연이라는 귀족

니체는 세계가 우연적인 것이다고 말함으로서 세계를 자유롭게 해방시켰다. 
그는 우연을 가장 고귀한 축복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세상이 우연적 파편이라면 그것은 슬픔과 우울함이라고 말했던 앞서 니체의 말과 배치된다.
필연을 어떤식으로든 다시 설명해야 한다.
니체는 필연이 생성속에서 만들어 진다고 말한다.
필연이 생성을 낳는것이 아니고, 창조적 생성 속에서만 필연의 법칙이 존재한다고 본다. 
결국 니체는 우연을 끔찍한 어떤 파편으로 추락하는 걸 방지하고 있다.

끝없는 생성속에서 필연의 법칙이 발생한다.
그렇다면, 세상은 법칙에 구속 받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새로운 생성을 시도하는 창조행위를 포기해서도 안된다.
이것이 니체가 말하는 영원회귀 개념이다.

예를 들어 주사위 놀이에서 지금던진 주사위의 숫자가 3이다.
상대의 주사위 숫자는 5 다.
내 주사위 숫자 3 은 패배의 수다.
영원회귀적 태도에서는 이것에 갇히지 않는다.
다시 주사위를 던진다.
나는 6 이 나왔다.
상대는 2 가 나왔다.
합하면 나는 9 이고, 상대는 7 이다.
이렇게 되면 패배의 숫자였던 3 이, 승리의 숫자로 재 탄생한다.

이런식으로 세상은 우연이 결정하는 주사위 놀이라는 거다.

이런 관점을 취하면, 어떤 경우든 절망이란 없다.
끝임없이 다시 시도할 뿐이다.
새로운 시도속에서 과거를 현재속에 재 탄생시킨다.
'다시 한번 더'가 니체가 권유하는 삶의 태도다.

주사위 놀이 처럼 세상은 우연이다.
그러나 끝임없는 새로운 시도속에서 필연적으로 무언가가 생성된다.
결국 니체는 삶을 우연이라는 개념에 가두지 않는다.
우연이지만 새로운 시도속에서 필연적인 어떤 결과가 새롭게 탄생한다.

달라이 라마 : 'Never Give Up'
장자 : '도는 걸어가야 생긴다' 

영원한 돌아옴


<사진첩표지. '몽유도원 : 도시에서 놀이하는 영원회귀의 순간들'이라는 제목이 너무 멋지다>


영원이 돌아온다는 것은, 새로운 시도가 동일성의 반복이 아니라 차이의 연속적 발생이라고 이해할 때 긍정적인 것이 된다. 
새로운 시도가 뻔한 것이라고 한다면 비웃음거리로  전락할 것이다.
그러므로 새로운 시도는 차이를 만들어 내고, 그것에 대한 즐겁고 긍정적인 확고한 신념을 가져야 한다.
좌절하지 않고 새롭게 시도하는 용기야 말로 세계를 창조하는 힘이다.
어떤 경우든 삶을 사랑하고, 긍정하고, 항상 새롭게 시도하라는 거다 

주사위 놀이를 통해 엿볼 수 있는 영원회귀의 비밀들


<I'm not there는 밥딜런에 관한 영화다.
영화가 처음 부터 끝까지 몽환적이다.
밥 딜런의 삶을 무려 7명의 배우들을 통해서 표현한다. 
그 7명이 다 밥딜런이라고 말하기도하고, 아니라고 말하는 것 처럼 보인다.
어떤건 미국 서부 개척사 같기도 하고, 아니것 같기도 하다. 
니체의 영원회귀를 실천한다면 이런 영화의 내용과 같기도 할 것 같다.
밥 딜런이 시인, 가수, 화가, 총잡이 등으로 나온다.
다 보고나면 뭐가 뭔지 모른다.
니체의 말 중에 그런게 있다.
도덕이나 종교 등으로 억압한 신체를 해방시키면, 온갖 잡다한 정서들이 들끊는 상태가 출현한다고.
그게 아마 이런 영화일 것 같다. >



니체의 영원회귀를 크게 두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첫째는 자연과학이고 우주론적인 것이다.
니체는 세계를 힘이나 에너지의 바다처럼 생각한다.
비록 세계가 유한해서 그 양이 제한되어 있다고 해도 그것은 끊임없이 출렁이고 변전한다.
영원히 고정 불변하는 것은 없으며, 생성과 소멸의 운동만이 영원히 반복된다.
이것이 영원회귀의 세계상이다.

둘째는 도덕적거나 이성적인 것으로서 세계의 관점이 아닌 인간의 관점에서 영원회귀는 하나의 선택을 요구한다.
세계 속에 존재하는 하나의 사물로서 우리 역시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운동속에 있지만, 그럼에도 우리 자신이 구체적으로 그것을 선택함으로서 건강한 변신을 이룰 수 있다.
왜냐하면 영원회귀에 대한 인간의  선택은 세계안에 잠재적인 형태로만 존재하던 것을 현실화 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모든 사물과 더불어 거대한 우주교향곡을 공연하는 연주자다.

cf) 이 글은 고병권이 쓴 책 '니체의 위험한 책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기대고 있다.

cf)'I am not there' : I am everyone and I am no one(나는 모두와 같기도 하고, 아무하고도 같지 않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