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오이 유우 : 봉준호가 만든 영화 '흔들리는 도쿄'의 메인 캐릭터>
흔들리는 도쿄는 도쿄라는 도시가 사람들을 밀실에 고립하도록 만든다는 내용이다.
영화의 인물들이 모두 밀실에 자기를 가둔다.
엔딩 장면에 도쿄가 지진으로 흔들린다.
아오이를 사랑하는 남자가 아오이에게 집에서 나오라고 외치면서 위태롭게 영화가 끝 난다.
밀실에 자기를 가둔 도쿄의 사람들은 치밀하게 생활을 습관화한다.
모든걸 오차 없이 정밀하게 정리한다.
도쿄라는 공간 또는 도시의 정리 결벽증이 사람들을 그렇게 길들인 결과다.
공간에 배치된 사람이란 공간의 규칙을 습관화한다.
결국 인간이란 물질적 배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인간의 정체성이란 물질적 배치로 부터 생긴 신체에 길들인 습관에 불과하다.
그걸 깨는건 또 다른 물질적 배치로 옮겨가는 수 밖에 없다.
그게 마지막 장면에 도쿄라는 공간이 지진으로 뿌리채 흔들리는 거다.
물질적 배경과 인간을 서사적으로 연결하는데 봉준호는 어떤 천재적 감수성이 있다.
봉준호가 한강을 보면서 영화 괴물을 착상했다는 인터뷰를 보았다.
한강이라는 공간은 서울이라는 공간의 모든 모순이 집결하는 공간이다.
이 공간의 습속은 괴물로서 표현될 수 밖에 없다.
그런점에서 봉준호는 충실한 유물론자 들뢰즈다.
블로깅을 하면서 쓰기는 읽기를 완성한다는 경험을 하였다.
읽기만으로는 쓰기가 주는 풍성함을 도저히 채울 수 없다.
쓰기를 통해서 읽기를 보충한다.
쓰기를 통해서 읽기중에 미쳐 몰랐던 것들을 알게 된다.
쓰기를 통해서 읽은 내용을 체화한다.
체화體化란 몸에 새긴다는 거다.
김영민을 통해서 새삼스럽게 확인했다.
몸으로 읽힌것이 최종적으로 읽힌 것이다.
김영민은 체화를 신뢰라는 말로 번역한다.
세속을 호의와 호감으로는 통과할 수 없다.
호의와 호감은 그 내용이 텅빈 아무것도 아니다.
호의와 호감이란 다른 말로 번역하면 마음이다.
마음으로는 세속의 두께나 분진을 통과할 수 없다는 말이다.
마음이란 논리적 진리라고 번역할 수 도 있다.
말로 이루어진 형이상학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
말로는 아무리 정교하고, 정밀하더라도 세속을 눈꼼 만큼도 설명할 수 없다.
그것이 아무리 정밀한 과학적 지식이라 하더라도 설명되지 않는 잉여는 차고 넘친다.
공부를 하면서, 김영민은 이런 딜레마에 부딪힌것 같다.
결국 그가 찾아낸 해답은 세속의 일상을 극진하게 공경하라는 거다.
세속의 일상을 극진하게 대접하면 진리가 물러간다.
니체의 영원회귀란 개념도 체화의 다른 말일테다.
피에르 보르듀의 아비투스(습관 : habitus)란 개념도 체화의 다른 말이다.
力說역설이 逆說역설이 되는 세속을 말로는 통과할 수 없다는 거다.
몇 일동안 끙끙거리며 읽었던 김영민의 '동무론'이 환하게 읽히는 느낌이 든다.
최소한 그가 하려는 말을 이해할 수 있는 끈을 붙잡은것 같다.
기쁘다.
그러나 내 몸이 과연 바뀔 수 있을까?
50년을 묵은 완악한 습성이 바뀔 수 있을까?
그걸 생각하면 마음이 무겁다.
쓰기를 열심히하는 수 밖에 없다.
그걸 통해서 신체를 바꿀 수 있는 길이 어디선가 찾아질거다.
공부도 눈으로 읽기가 아니라 소리로 읽어야 한다(고미숙 호모쿵푸스).
그리고 연필을 들고 종이에 써야한다.
마음의 정신은 몸(신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니체의 말도 이해가 간다.
cf) http://blog.naver.com/haine80?Redirect=Log&logNo=110019288443
<공부의 달인, 호모쿵푸스, 그린비, 고미숙>
cf) 이렇게 주석을 다는 이유는 문화적 사대성에 근거해서 누군가를 설득하기 위해서다.
피에르 보르듀는 한국 사회학계에도 많이 소개된 프랑스 사회학자다.
우리나라에 소개된 그의 사회학은 단순하게 정리해서 '문화자본론'이라는 개념으로 잘 알려져 있다.
문화적 생활 습관이 계급을 재생산하는 주요한 힘이라는 거다.
단순하게 말해서 중산층 지식인 가정의 아이들은 더 많이 사회적 지배문화에 노출될 기회가 있다.
이것이 아이에게 미래의 중산층 지식인으로서 생활습관을 조형하는데 절대적 영향력을 가진다.
아래에 있는 그의 대략적 이론은 그가 생활습관(habitus. 아비투스)이라는 것을 얼마나 정치하게 이론화하고 있는지 보여준다.
설명에서 빠진 자본가 계급은 사회의 주요한 계급이 아니라는 것이 그의 입장이다.
이런 관점은 알뛰세나 그람시의 경우도 비슷하다.
그람시의 시민사회 진지는 중산층의 보수적 성향을 말한다.
알뛰세가 문화적 이데올로기가 체제를 재생산하는 힘이라고 할때, 문화적 이데올로기는 중산층 지식인들에 의해서 유포되고, 정련되고, 재생산된다.
프랑스 사회를 배경으로하는 브로듀의 이론을 한국사회에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설명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프랑스의 지배문화는 자율성, 창의성, 유연성 같은 것으로 축약할 수 있다.
한국의 지배적 문화는 프랑스의 자율성, 창의성, 유연성 같은 가치나 습속들과는 거리가 멀다.
보르듀의 이론을 한국사회에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구태여 보르듀의 이론을 한국사회에 적용한다면 그의 분석틀을 뒤집어서 적용하는게 오히려 정확할 것 같다.
그 만큼 한국사회의 지배적 습속이나 가치가 프랑스 같은 사회에 비교한다면 구태하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