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읽기-영화보기

외딴방(신경숙)


신경숙의 외딴방을 빌려서 '글 쓰기'란 행위를 정의한다면.
'자기고백'
'과거와의 화해'
'과거의 상처 치유하기'
'과거를 정리하고 새롭게 살아가기' 같은 말들로 정리할 수 있다.

글을 쓴다는게 상처의 치유과정인 것은 분명하다.
쓰면서 과거의 경험들을 객관화하고, 그걸 토대로 과거를 정리해서 과거속에 단단하게 매장한다.
과거가 현실속으로 무분별하게 분출하여, 현재를 지배하지 못하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글 쓰기는 일종의 궂거리 장례의식이다.
죽은 자의 한을 풀어 그를 편안히 봉인하고, 산 자는 죽은 자로 부터 풀려나온다.
죽은 자와 산자의 이별여행 같은 것이, 외딴방이다.

특별히 재미있었던 것은 신경숙의 섬세한 마음 씀씀이다.
오빠, 외사촌, 공장친구들에 대한 애뜻함이 생생하게 살아있다.
신경숙이 여성 작가여서 그럴까?
개인적으로는, 동시대 경험이라는 바탕 때문에 신경숙의 감수성에 쉽게 빨려든다.
아마도 지금의 20-30대들에게는 외딴방이  불편하겠다.
외딴방의 배경이 낮선 이국의 풍경으로, 남루한 동아시아의 어디쯤으로  읽힐 것이다.
구시대의 고루한 내용에 집착한다고 외면하겠다.

그럼에도 이 소설의 형식은 파격적이다.
소재나 내용의 고루함과 대조적으로 전통적 소설형식의 전형성을 탈피했다.
형식의 혁신이라는 점에서, 이 소설은 새로운 글쓰기의 전범처럼 보인다.
산업화시대의 노동이라는 구시대 소재에 새로운 형식의 옷을 입혔다.
그게 외딴방이 새롭게 보이는 이유다.
신경숙이 외딴방에서 어떤 성취를 거두었다면, 그건, 개인적으로는 자신의 과거와의 평화로운 화해이고, 문학적으로는 파시즘적 산업화시대를 새로운 형식으로 담아냈다는 점일 것이다.

신경숙이 시도한 새로운 형식이 결국, 소재나 내용의 구태성을 말끔하게 씻어서 새로운 결을 만들어 냈다.
만일 이런 새로운 형식이 아니었더라면, 외딴방은 80년대의 뻔한 노동소설의 하나에 머물지 않았을까?
그런점에서 외딴방은 당대를 정리하는 새로운 형식을 만들었다.
역시 한시대의 정리는 새로운 형식을 요구하고, 그건 외딴방과 같은 변경에서만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