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 : 1%
99%의 양과 1%의 양을 비교한다.
99%가 99%가 많은 양이고 생각한다.
1%가 1%가 많은 양이라고 생각할 가능성이 있다.
숭산스님이라는 분이 있다.
한국불교를 서구세계에 최초로 소개한 사람이다.
숭산이전까지 서구세계의 불교는 티벳불교가 주류 였고, 일본과 중국 불교가 약간 소개된정도 였다고 한다.
숭산은 한국의 독특한 '선'불교 전통을 서구세계에 소개했다.
일제시대에는 독립운동을 했고, 해방정국의 혼미한 정치상황에 실망하여 불교에 귀의하였다고 한다.
김용옥의 이런저런 책에도 자주 언급되는 인물이다.
숭산이 포교를 위해서 미국에서 활동하던 시절 폴 뮌젠이라는 파란 눈의 하버드 대학원생이 찾아온다.
머리를 깍아 달라고 숭산에게 요구한다.
폴 뮌젠은 예일대와 하버드에서 공부한 미국주류사회 최고 엘리트코스를 살아온 사람이다.
숭산이 뮌젠에게 머리깍은걸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냐고 묻는다.
99% 자신 있다고 말한다.
그냥 가라 한다.
폴 뮌젠이 버틴다.
왜 안 깍아 줍니까?
니 마음속에 1%가 점점 커져 언젠가는 99% 보다 더 커질수 있다.
그러니 가거라!
자기 같은 미국사회 최고엘리트를 거지 발싸개 정도로 우습게 취급하는 숭산에게 개쪽을 당하고 그냥 돌아간다.
우여곡절을 거쳐서 숭산은 뮌젠의 머리를 깍아준다.
이 사람이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현각이라는 스님이다.
그의 책 "만행 1 : 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를 오래전에 읽었다.
거기에 실려있는 숭산과 현각의 일화다.
숭산은 1%의 힘을 간파하는 지혜를 가진 스님으로 보인다.
니체로 대표되는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런 1%의 우연적 힘들에 대한 사유의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평균적 사고방식으로 포착되는 주류적 힘들 - 견고한 구조를 허무는 것은 사소한 우연적 계기들이라고 생각한다.
니체의 아포리즘 중에 이런말이 있다.
'견고한 필연의 인관관계로 짜놓은 그물망은 항상 우연이라는 갈퀴에 찢겨 나간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우연성이 보다 근본적인 힘이라는걸 알 수 있다.
내 존재 자체가 우연의 결과이고, 내가 언젠가 그 자리에서 누군가를 만난것도 우연이다.
강신주가 쓴 '철학 삶을 만나다'는 아예 모든 철학을 우연성을 기준으로 분류한다.
우연성을 긍정하냐, 아니냐로 모든 철학적 사유들을 분류하고 우연성을 긍정하는 철학에서만 우리의 삶을 올바르게 안내하는 사유를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세계란 본질적으로 우리의 통제 밖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우연적 계기들과 우리는 필연적으로 만날 수 밖에 없다.
이런 우연적 계기들을 긍정하고 그것에서 무언가 새로운 생성을 읽어내고 만들어내는게 세상을 낙관적으로 긍정하는 태도다.
세계에 대한 필연으로서 인과관계적 해석이란 결국 주류적 사고방식으로 세계를 해석한다는 말과 동의어다.
이런 사고방식은 주류적힘의 작동 방식에 동의한다는 거다.
결국 주류적 힘의 작동 방식에 동의한다는 것은 변화를 허용하지 않겠다는 완고한 보수적 정치성의 다른 표현에 불과하다.
한국 사회의 보수성의 뿌리가 나는 이런 주류지향성에 있다고 생각한다.
차이나는 사소한 우연적 계기들을 허용하지 않는 성향이, 상식적으로 분류하는 보수 진보 양진영의 뿌리 깊은 사고방식이다.
그러다 보니, 진보가 풍부한 상상력으로 현실의 다양한 차이나는 힘들을 포착하는 능력이 부족하다.
80년대적 세계에 대한 해석틀을 21세기에도 가지고 있으니 변화의 다양한 탈주선들을 포착하는 능력을 상실하고 있다.
진보가 아니라 또 다른 보수에 불과하다.
민중들은 이걸 잘 알고 있다.
그런 진보가 진짜 진보가 아니라는 걸 직관적으로 파악한다.
20세기의 주류적 진화론은 방향성을 인정한다.
인간이 최고로 진화한 종이고, 다른 종들은 인간의 진화방향에 따라 위계적으로 가지런하게 정리된다.
그걸 수목형 진화론이라고 하는데 잘 정돈된 나무 모양으로 진화가 진행되었다는 사고 방식이다.
물론 나무모양의 제일 밑에는 미생물이 있고, 이게 점점 분화 되어서 가지가 무성하게 뻗어나가고, 그 맨 꼭대기에 인간이 있다는 진화모델이다.
이런 진화론은 사회진화론으로 변용되어, 20세기의 기괴한 대규모폭력 행위들을 정당화시킨 사회과학이론이 되었다.
최근의 생물학적 성과들은 이런 진화론을 거부한다.
진화의 방향성이 없다는 거다.
우연적 계기들이 진화의 근본적인 힘이라고 생각한다.
방향성도 없고, 목적성도 없다는 거다.
인간이 최고로 진화한 종이라는 말은 성립하지 않는다는 거다.
이걸 리좀형 진화론이라고 부른다.
이런 모델에서는 진화가 바이러스와 같은 것들이 종들의 유전자를 종횡무진으로 섞는 과정에서 생성된다고 본다.
바이러스의 유전자 교환활동으로 새로운 종들이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없어진다고 본다.
바이러스의 우연적 활동의 결과가 진화의 힘이라는거다.
들뢰즈는 프랑스 6,8혁명이 그냥 젊은이들의 장난에서 시작되었다고 본다.
사소한 우연들이 필연적이라면 그것을 긍정하는 태도를 기르는 수 밖에 없다.
보다 적극적으로는 이런 우연을 능동적으로 산출하는게 올바른 삶의 방법이라고 보여진다.
우연성을 긍정하고, 적극적으로 우연의 놀이에 뛰어드는게 세계와 대면하는 방법이어야 한다.
이런 우연의 놀이를 긍정하는건 자신의 순수한 욕망을 긍정한다는 거다(순수한 욕망에 대한 정의가 어렵다. 현시기에서 욕망은 주로 자본에 의해서 형성된다고 할 수 있다. 자본에 의해서 오염되지 않은 욕망이 비교적 순수한 욕망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우연을 긍정하고, 그 결과들을 긍정하고, 그 결과가 만족스럽건 불만족스럽건 새로운 시도를 긍정하는 태도가 인간이 세계와 대면해야 하는 방식이어야 한다는 거다.
긍정의 긍정이 세계를 창조하는 힘이라는거다.
1%의 우연이 가져오는 사소한 차이들을 삶의 표식으로 간주하는 생활방식을 살아본다면 어떨까?
cf) '어머니 5'를 쓰고 다시 읽어 보니, 여러가지 오독의 여지가 많아서 이 글을 썼다. 그런다고 내가 쓴글에 대한 오독이 없어지지는 않을거다. 어차피 주어진 텍스트를 읽는건 그 사람 마음이다. 그래도 내 입장에서는 내 의도를 정확하게 전달하려는 최선을 다하고 싶다. 어머니라는 주제를 쓰면서 나에 대해 새로운 많은것을 알았다. 나를 성찰하는 풍부한 계기가 되었다. 나를 들여다 보는 성찰이 이제 피곤하다.
며칠 전부터 전위성이라는 개념이 눈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무)의식 들여다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