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무)의식 들여다 보기

어머니 5

사용자 삽입 이미지

글쓰기로 거울보기


결혼생활의 실패와 성공

내 결혼생활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이럴거 같다.
'98%의 만족과 2%의 결핍'

학교에서 해직되고 학원을 전전하다가 결혼해야 겠다고 생각했다.
현직에 있을때 내 주위에 많은 여자들이 있었다.
아무리 적게 잡아도 열손가락으로 꼽으면, 몇몇은 섭섭해할 것 같다.
막상 해직되고 학원을 전전하는 신세가 되자, 저절로 상황이 정리되었다.
2명 정도만 여전히 나에 대한 호감을 포기하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만남의 심도도 깊었고, 정신적 교감도 많이 나눈, 그리고 세속적 기준으로도 훨 조건이 좋은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학원에 있으면서 3시간 가까이 열차를 타고 다니는 연애를했다.
그녀의 집 대문  앞에서 헤어지기 싫어서 미적대다가, 열차를 놓치고 택시로 열차를 따라잡곤 했던 연애를 했다.
그때는 정말로 열심히 정열적으로 그녀를 사랑했다.

그러다가 결혼에 골인했다.
결혼생활은 98% 만족스러웠다.
그녀 때문에 편안하게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할 수 있었다.
대학원에 합격하고 학원을 때려치우고, 서울에 입성하면서 서울아 내가 왔다,라고 속으로 외쳤다.
서울 생활은 만만치 않았다.
내가 그렇게 미워하던 아버지의 도움으로 당시의 기준으로 적지않은 돈을 투자하고 겨우겨우 그녀의 사업장을 마련했지만, 서울이란 비싼 동네가 변변한 살림집까지는 허용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그 사업장 뒤편에 바닥이 합판으로 된 방을 꾸며서 살았다.
그곳에서 거의 2년 가까이 살았다.
첫아이을 그곳에서 잠깐 동안 키운거 같다.
학교에 갖다가 저녁에 돌아오면 그녀의 일을 도왔다.
그녀의 일이 끝나면 남의 집에 맡겨놨던 아이를 찾아왔다.
그애를 무등을 태워서 시내구경을 하고, 야식을 먹곤했다.
그애가 유난히 네온사인 불빛에 환호성을 지르며 좋아하던걸 기억한다.
늦은 나이에 공부와 결혼생활을 병행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낮 시간은 전적으로 공부에 매달렸고, 저녁 시간은 그녀의 일을 도왔고, 밤시간은 아이를 돌보는 생활이었다.
아이를 씻기고, 밤중에 깨어나면 우유먹이는 등의 소소한 일들을 도맡아 처리했다.
나를 위해서 일하는 그녀를 위해서 그게 마땅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돈이 모이면서 따로 살림집을 마련했다.
박사과정을 논스톱으로 합격하는 행운도 뒤따랐다.
촌놈의 대단한 성공이었다.
당시에는 석사과정에서 박사과정을 논스톱으로 가는 예가 희박했다.
모두 최소한 한두번의 실패를 거쳐서 갔다.
박사과정에 들어가자 대접이 달라졌다.
데면데면 대하던 주류들이 자기들의 동료고 적수로 대접하기 시작했단게 피부로 느켜졌다.
대학원 첫학기부터 대학 시간강사 자리를 제안 받았다.
한참 잘 나가고 있었다.
서울 가까운 천안 어디 음대와 경상대에서 교양과목 수업을 처음으로 했다.
음대 강의가 특별히 재미있었다.
눈빛을 반짝이면서 일거수 일투족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교감에는 분명한 성적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내가 깜짝놀란 최초의 반응은 강의를 위해서 양복상의을 벗자 그녀들이 탄성을 질렀다는거다.
누구 보다도 예민한 20대 초반의 음대학생들에게 내가 탄성의 대상으로 받아들여진다는건 나에겐 나에 대한 새로운 발견과 같았다.

98% 만족스런 결혼생활에 금이 가기 시작한건 이때부터인거 같다.
그녀가 두번째 아이를 임신했다.
같이 박사과정에 다니는 후배부부와 저녁을 먹었다.
후배는 아이가 둘이었다.
그런데 세번째 아이를 임신했다고 저녁자리에서 말했다.
후배에게 대책도 없이 아이만 내지르면 어쩌느냐고 면박을 주었다.
집에 돌아와서 그녀가 '그런소리 그만 작작하세요'라고 말했다.
자기도 아이를 가진거 같단다.
첫째 아이를 키울 당시의 혹독한 경험 때문에 나는 아이를 원치 않았다.
그녀가 절대 아이때문에 고생시키지 않겠다고 설득해서 일주일을 버티다가 그녀에게 동의했다.
나중에 이 아이에 대한 나의 편애 때문에 큰아이가 상처를 많이 받았다.
지금도 그점에 대해서는 큰아이에게 늘 미안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
언젠가 큰아이에게 내 잘못을 사과할 기회가 있을거라고 생각한다.

생활에 윤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이 즈음 어디에선가 그녀와 사소한 시비의 와중에 심하게 다투었다.
싸움이 격렬해지면서 그녀가 내가 수용할 수 없는 임계점을 넘고 있었다.
갑자기 공포가 덮쳤다.
더이상 싸운다면 그녀가 다칠거라는 무서움이 느껴졌다.
카오스 상태의 그녀를 겨우겨우 진정시켰다.
이때 이후로 더이상 싸울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녀의 헌신적인 애정에 늘 감사하다는 마음으로 그전에도 나는 늘 그녀를 잘 보살피는 일에 열심이었고,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심리적 당위감 비슷한게 있었다.
이게 행복한 결혼생활에서 2% 불만의 결핍요소였다.
늘 그녀의 욕망을 돌보는 일이 1차적 고려대상이었다.
내 욕망을 돌보는건 늘 부차적인 일이었다.
뒤돌아보면 이 싸움 이후로 그런 성향은 더 강화되었다.
부차적으로 뒤돌려진 내 욕망은 내 안에서 무성하게 자라기 시작했다.
당시 나는 좀더 용기있게 행동했어야 했다.
인생을 보는 좀더 현명한 지혜가 필요했다.
그녀와의 싸움을 더 격렬하게해서 내 요구와 그녀의 요구들을 협상했어야 했다.
그게 불가능하다면 그때 상황을 정리했어야했다.
나는 그런 용기도 없었고, 인생에 대한 현명한 지혜도 없었다.
비겁하게 지속적으로 그녀의 욕망을 돌보는일에 더욱 열중했다.
내안에 2%는 점점 커져갔다.
생활도 점점더 윤기가 흘렀다.
여기저기 시간강사를 계속하면서 박사과정도 마침내 마쳤다.
때마침 모교에서 내 전공으로 전임채용공고가 나왔다.
수십명이 달라 붙었다.
재미있게도 같은 선생 밑에서 공부한 나와 그 누군가가 동시에 지원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나는 그가 포기해주기를 바랐다.
그는 내가 포기해주기를 바랐다.
서로 그럴만한 정당한 사유를 수십개씩 댈 수 있었다.
결국 그가 임용되었다.
살아오면서 경험했던 이런저런 패배감이 동시에 겹치면서 대학원 공부에 대한 더 이상의 욕망을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었다.

미뤄두었던 복직을 하자고 결심했다.
그 선생님 밑에 계속 남아 있으면 다른 기회가 오겠지만 그게 구차한행위라고 느켜졌다.
존경심도 없었고, 더이상 배울것도 없어 보였다.
그냥 비즈니스적 스승과 제자 관계만 앙상하게 남아 있었다.

이제 겨우 30대 초반을 갓 넘긴 나에게, 시골학교 생활은 천국이나 마찬가지 였다.
천천히 돌아가는 시골생활도 좋았고, 경쟁이 없는 친밀한 인간관계도 정말로 좋았다.
그녀와 떨어져서 독립적으로 생활하는 것도 좋았다.
단지 신경쓰이는 일은 아이들 시선에 맞추는 능력을 갖추는 일이었다.
복직하고 나서 이일에 몇년간 열심히 매달렸다.
생활은 더욱더 윤택해져 갔고, 권력도 점점 더 쌓여갔고, 아이들도 건강하게 무럭무럭 자랐다.
그녀의 생활을 돌보는 일도 더이상하지 않게 되었다.

그래도 그녀와의 관계에서 포기했던 2%의 결핍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이게 내가 살고 싶은 삶인가에 대한 막연한 의문은 커져만 갔다.
그것에 비례해서 술먹고 흥청거리는 삶도 커져만 갔다.
날마다 술먹고 어영부영 보내는 삶이 일상이 되었다.
생활은 자꾸만 썩어갔다.

어느날 다르게 살아보자고 결심했다.
느닷없이 새로운 길이 표식처럼 왔다.
이 표식을 따라가라,라는 직관적 느낌 같은게 왔다.
그 표식을 따라가자니, 그동안 쌓아왔던 모든 기득권을 포기해야했다.
수도 없이 갈까 말까 망설였다.
인생의 막장에 부딪힌거 같은 카오스에 맞닥트렸다.
표식을 따라가면 죽음이요, 표식을 안 따라가면 지리멸렬한 그 삶을 계속해야한다는 딜레마에 빠졌다.
수도 없이 갈등하고 번민했다.
그런 갈등을 회피하기 위해서 더욱더 술을 마셨다.
담배의 양도 늘었다.
술과 담배로 갈등의 감각을 무디게하기에 급급했다.

지금은 죽음 저편의 다른 세상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는 느낌을 가지고 있다.

각설하고 내 결혼생활의 실패는 어디서 왔을까?

프로이드식으로 설명하자면 어린시절 어머니에게서 받은 상처로 부터 왔다.
어머니가 보인 극단적 행동이 어머니를 돌봐야한다는 사고와 행동방식을 만들어 냈다.
그게 일상에서 내 욕망을 돌보기보다 남의 욕망을 먼저 고려하는 세심하고 사려깊은 태도를 낳았다.
그게 여자들을 대하는 습성으로도 굳어졌다.
나와 그녀의 관계에서 항상 그녀의 욕망을 돌보기에 급급했다.
내 욕망은 억압시켜 마음 한구석에 묻어 두었다.
이 2%는 언제나 폭탄인데, 안전핀이 채워져 있었다.
가끔 술을 먹고 이 안전핀을 빼 보곤 했다.
잠깐 동안의 해방감이 온다.
다시 이 폭탄에 안전핀을 채운다.
2%의 결핍 폭탄은 점점 더 커진다.
그러다가 그녀에게서 어머니와 유사한 행동을 발견한다.
나는 겁에 질려 더욱 철저하게 내 욕망을 억압하기로 결심한다.
사태를 더욱 악화시켜 버린거다.
어머니와 맺어왔던 20여년의 관계 방식을, 그녀와 똑 같이 20여년 가까이 반복하고 있었다.
지금 뒤돌아 보니 그녀의 외모도 어머니를 닮은점이 많았다.
나는 10대 초반의 어머니를 대하던 방식에서 또다른 어머니에게로 그냥 간 거다.
10대 초반에서 성장이 멈춰버린거다.

cf) 내가 발견한 표식은 '데미안'에 나오는 '에바'같은 남성성과 여성성의 양면성이 공존하는 그 무엇이다. 최근에 깨달은 건데, 지혜란 결국 감수성이다. 생생하게 살아있는 세계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이 궁극적인 지혜의 근거다. 내가 수십년동안 학교에서 배웠던 지식들이 결국 쓰레기라는걸 요즈음은 더 많이 확인한다. 내가 에바라는 표식을 발견한건 내 예민한 감수성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최종적으로 프로이드 모델에 따라 나를 설명하자면 나는 파멸해야 한다. 그러나 나는 그 파멸의 어는 지점에서 새로운 성장의 계기를 발견했고, 세상을 더욱 깊고 폭 넓게 해석하는 새로운 인식체계를 획득한 것 처럼 느켜진다. 어머니가 나에게 상처를 준것은 확실하지만, 동시에 세상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도 함께 주었다. 내가 일상에서 실패할 근거도 주었고, 그걸 극복할 수단도 동시에 준거다.
프로이드 모델이 한계를 가지는 것은 아버지-어머니-자식이라는 삼각관계가 모든걸 설명한다는 지나친 구조에 대한 집착이다. 그 외부와 내부에 수 많은 사소한 변인도 그 구조의 설명력을 아무 쓸모없게 만들수 있다. 프로이드가 발견한건 그러므로 작은 사소한 지식이다.
학교교육에서 다루는 소위 말해서 사회적으로 공인된 지식이 이렇게 단편적이란건 의심의 여지가 없다. 우리가 의심의 여지가 없는 가장 객관적인 지식이라고 받아들이는 과학적 지식 조차도, 그 지식의 가장 밑바탕인 공리가(ex.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180도이다)가 현실속에서 전혀 존재하지 않는 허구적 상상력이라는 것이 지금은 확립된 정론이다. 그래서 진짜 선진국인 덴마크나 핀란드 같은 북구유럽 국가들은 우리처럼 학교지식을 일방적으로 가르치지 않는다.
지식의 단편성을 이해하는 그들은 평가를 최소화하거나 아예 없애 버리는 모델을 만들려고 애쓴다. 궁금하면 아무 포털싸이트에라도 '핀란드교육' '네덜란드교육'이라고 한번 쳐 봐라. 직접 확인할 수 있다.
학교교육의 지식을 무조건 머리속에 많이 저장한다고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없다는것은 분명하다. 그것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전부가 될 수는 없다. 특히 어린시절 자연과 교감하고 사람들과 관계맺고 예술과 접촉하게 하는건 단편적인 학교지식을 쌓는것 보다 훨씬 본질적으로 중요하다. 이걸 무시하고 그냥 학력에 몰두하게하는 건 미래를 압살하는 가장 빠른 길이다. 그래서 요즈음은 지금과 같은 입시위주의 교육에 대한 의문이 더욱 커진다.
결국 꼰대로 돌아왔네요! ㅎㅎㅎ.

cf) 한국 대학의 스승과 제자관계가 거의99% 비즈니스관계로 묶인 봉건적 비정상 관계라는 것에 대한 문제는 박노자에 의해서 잘 지적되어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실험적 대학이 나온다면 진짜대학이 되지 않을까 싶다. 능력이 된다면 그런 실험을 한번 해보고 싶은 욕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