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학교를 옮기고 입시교육의 첨병노릇을 한다.
강제 야자-보충과 불화하느라 98년 인문계고를 떠난 이래로 16년을 시골과 실업계학교로만 돌았다.
이제는 쫌 다르게 인문계학교에 적응할 것 같아서 시내에 있는 일반계고로 옮겼다.
보충수업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그대로다.
입시교육을 빌미로 밀어 붙이는 힘을 감당해낼 재간이 없다.
야자는 옛날에 비해서 그래도 강제가 아니라 자율학습의 형태를 그런대로 지키고 있다.
우리반 같은 경우 30여명의 학생중에서 다른 활동을 원하는 경우 대부분 하교를 허락해 준다.
남는 15명 정도의 아이들을 데리고 말 그대로 진짜 자율학습을 시킬려고 노력한다.
아래는 그런 노력의 일부분이다.
중간고사 끝나고 첫날입니다.
고등학교 입학하던 당시의 어설픈 다짐들도 이제 많이 달아져서 너덜너덜 헤진게 역력합니다. 날씨도 풀리고, 해보니 잘 되는것 같지도 않고, 남들도 나하고 별반 차이가 없는 것 같고, 긴장이 풀리는 건 너무도 자명해 보입니다.
버릇이란게 너무 너무 질겨서, 사람을 금방 과거로 되돌리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느날 하루아침에 사람이 새롭게 된다는게 말이 안되지만,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은 그럼에도 새롭게 무언가를 바꾸어 보는 일이어야 합니다. 초등학교 중학교 9년간의 버릇을 하루아침에 털어 낼 수는 없겠지만, 지금은 그런 시도를 해야 합니다.
차분하게 하루 일과를 준비하는 버릇, 수업활동과 관련된 일들을 그때 그때 정리하는 버릇, 유인물 잘 챙겨서 파일철 만들어서 보관하는 버릇 등 매듭을 지어놓아야 할 버릇들이 한두가지 아니겠지요. 이걸 다 잘하라고 요구하지는 않겠습니다. 인간이 기계가 아닌 이상 허점이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도 최소한 학교생활에서 익혀 놓아야 할 버릇들이 있는데, 그건 자기 자신을 존중하고 또한 그 만큼 타인도 존중하는 버릇입니다. 이런 존중의 버릇은 자신의 일상을 잘 챙기는 것으로 부터 생깁니다. 그래서 하는 잔소린데 허튼 수작 부리지 말고 다시 삼월초의 다짐을 새기십시오.
지금은 헤벌레해졌지만, 삼월초의 여러분들은 바짝 긴장한 서슬이 있었습니다. 그런 서슬을 일년 내내 유지할 수는 없겠지만, 지금처럼 완전히 널부려져서는 곤란합니다. 이제 새로운 시작이라고 생각하고 다시 정돈된 일상을 회복하려고 노력합시다.
항상 하나의 끝은 새로운 시작의 출발점입니다. 중간고사라는 하나의 끝 매듭을 지었으니 다시 새로운 시작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런 다그침이 너무 뻔한 어른들의 꼰대짓으로 보이나요? 그럼 '4x7 = 27' 이라는 틈을 대답으로 약속합니다.
그러니 일단은 다시 긴장하고 차분하고 성실하게 일상을 채워주시기 바랍니다. 헤벌레한 모습에는 예외 없이 마음도 몸도 고통스럽게 응징하겠습니다. 피시방에 처박혀 자신을 낭비하는 모습이 아닌, 무언가 생산적 일들을 할 자신이 있으면, 선생님의 간섭을 제끼고 나가십시오. 그렇지 않다면 학교에 남아서 친구들과 또는 선생님들과 쓸데없는 농담이라도 하는게 훨씬 의미가 있습니다. 꼭 교과와 관련된 공부만 하라고 다그치지는 않겠습니다. 책도 좋고, 만화도 좋고, 음악 듣는 것도 좋고, 때때로 운동장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는 운동도 좋습니다. 중간고사라는 한 매듭을 지었으니 또 다른 매듭으로 다시 나아 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