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없는 자들의 고통에 의미를 부여하면서 지식인은 태어난다.
사회적 역사적 정치적 지평속에서 자신의 고통을 해석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에게 언어라는 굿거리를 부여하면서 지식인은 태어난다.
그러므로 지식인은 일종의 무당이다.
해마다 말없이 죽어 나가는 사백여명에 달하는 한국의 청소년들에게 누구도 제대로 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우리 모두가 현실에 눈감고 있거나 아니면 현실을 제대로 느끼는 감수성 자체를 상실해 버린 불감증 환자들이다.
그러므로 세월호는 이미 날마다 일어나고 있있고, 그것에 제대로 반응하지 못하는 한국사회는 이미 불구의 상태였다.
그런 점에서 이번에도 제대로 굿거리를 하지 못한다면, 아마도 유연한 일상적 파시즘이 차분하게 현실에 정착된 상황에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거의 버릇이 되다시피한 신물나는, 파시즘에 대한 경고 햇수가 거의 10여년이 되어간다.
세월호의 비극과 그에 대한 애도가 다른 세상으로 가는 입구가 된다면, 비극적 고통에 대한 애도와 그것을 넘어서 역사적 정치적 사회적 의미를 건축하는 수 많은 새로운 지식인들이 탄생했음을 의미할 것이다.
고통에 대한 애도는 고통을 이해하고 그것을 넘어서는 조건이기 때문이다.
옆에 앉았던 어떤 아저씨의 뚝뚝 떨어지는 눈물에서 그런 예감을 본다.
그저, 나만의 헛된 망상이 아니기를 간절히 바란다.
30도가 넘는 푹푹찌는 날씨에도 불구하고 수만명의 사람들이 모였다.
청년좌파라는 단체가 주변 빌딩 꼭대기 층에서 메모지 크기 격문을 뿌리고 있다.
바람이 마치 수 많은 꽃잎을 흩날리는 것 같은 효과를 만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