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쪽팔림'이라는 우리말을 영어로 번역하는 건 불가능하다.
어느 영문학 교수는 영어 문맥에 '쪽팔림'이라는 우리말 단어를 영어로 번역하지 않고 그냥 사용한다.
물론 그 강의를 듣는 사람들은 한국 사람들이다.
그녀는 영어로 번역하면 맛이 죽어버리는 우리말은 그대로 사용해야 한다고 믿는다.
살아 오면서 만난 드문 우리말에 대한 정체성을 가진 영문학자 였다.
이런 경우에 진짜로 쪽팔리는데, 대신에 스타일을 얻는다.
가령 나는 위에서 그녀가 '드문 우리말에 대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라고 서술했다.
그녀는 쪽팔림 또는 부끄러움이라는 통과의례를 거쳐서 자기만의 스타일을 얻었다.
그렇다면 쪽팔림은 스타일에 대한 댓가라고 해야 하나?
새로운 스타일이란 언제나 현실이라는 구심력 자장의 동심원에서 빗겨 나가는 접선이다.
구심력을 현실을 지배하는 주류적 전통이라고 해석한다면, 접선은 그것에 접하면서 빗겨 나가는 특이점이다.
그러니 이게 쪽팔리지 않고는 배길 도리가 없다.
모든 스타일은 그래서 쪽팔림을 댓가로 치뤄야 한다.
쪽팔림을 넘어서면 그것에 대한 대중적 승인-인정과 이어서 모방이 따른다.
이런 모방은 스타일이 새로운 양식으로 자리잡아 현실을 규제하는 힘을 얻었음을 의미한다.
전통으로서 새로운 양식의 출현이라고 해야 하나?
양식에 대한 추종, 자기만의 고유한 스타일이 없는 모방은 일종의 키치인데, 이런 얄팍한 키치적 모방을 수 없이 반복하는걸 가능하게 만든게 현대의 정보기술 사회다.
그래서 나는 얄팍하고 키치적이다.
cf) 김영민의 '공부론' 중에서 '스타일과 양식'을 번역해서 쓴 글이다.
어느 영문학 교수는 영어 문맥에 '쪽팔림'이라는 우리말 단어를 영어로 번역하지 않고 그냥 사용한다.
물론 그 강의를 듣는 사람들은 한국 사람들이다.
그녀는 영어로 번역하면 맛이 죽어버리는 우리말은 그대로 사용해야 한다고 믿는다.
살아 오면서 만난 드문 우리말에 대한 정체성을 가진 영문학자 였다.
이런 경우에 진짜로 쪽팔리는데, 대신에 스타일을 얻는다.
가령 나는 위에서 그녀가 '드문 우리말에 대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라고 서술했다.
그녀는 쪽팔림 또는 부끄러움이라는 통과의례를 거쳐서 자기만의 스타일을 얻었다.
그렇다면 쪽팔림은 스타일에 대한 댓가라고 해야 하나?
새로운 스타일이란 언제나 현실이라는 구심력 자장의 동심원에서 빗겨 나가는 접선이다.
구심력을 현실을 지배하는 주류적 전통이라고 해석한다면, 접선은 그것에 접하면서 빗겨 나가는 특이점이다.
그러니 이게 쪽팔리지 않고는 배길 도리가 없다.
모든 스타일은 그래서 쪽팔림을 댓가로 치뤄야 한다.
쪽팔림을 넘어서면 그것에 대한 대중적 승인-인정과 이어서 모방이 따른다.
이런 모방은 스타일이 새로운 양식으로 자리잡아 현실을 규제하는 힘을 얻었음을 의미한다.
전통으로서 새로운 양식의 출현이라고 해야 하나?
양식에 대한 추종, 자기만의 고유한 스타일이 없는 모방은 일종의 키치인데, 이런 얄팍한 키치적 모방을 수 없이 반복하는걸 가능하게 만든게 현대의 정보기술 사회다.
그래서 나는 얄팍하고 키치적이다.
cf) 김영민의 '공부론' 중에서 '스타일과 양식'을 번역해서 쓴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