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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소영 비판


윤소영의 '지역 노동자 평의회'의 중심은 공장노동자다.
그의 이론에서는 공장 노동자에 대한 지나친 특권화가 있다.
마르크스가 살던 시절 공장 노동자는 생산형식에서 최고로 선진화된 계급이었다.
아직 봉건적 생산형식이 지배적이었던 당시에 공장 노동자는 사회의 최고 엘리트 집단이었다.
이들은 실제로 자본과 동등하게 생산을 통제할 수 있는 힘이 있었다.
이들을 새로운 사회건설의 주역으로 마르크스가 설정한 것은 그런 배경을 가지고 있다.
19세기말 20세기초 전세계적 혁명열망은 이들 공장노동자라는 엘리트에 의해서 격발되었다.
대중을 이끄는 전위세력으로서 전위당이란 공산당은 일종의 계몽적 지식인집단이라고 보아야한다.
그런점에서 마르크스도 또 다른 근대적 계몽주의자라는 것은 분명하다.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공장노동은 자본에 의해서 파편화되고 주변화되었다.
생산의 주요한 통제력이 정보나 언어로 이행하면서 공장노동자의 선진성은 더 이상 담보할 수 없다.

네그리가 그런 변화를 예민하게 수용하는 것에 비해서 윤소영은 그런 현실변화에 둔감한 면이 있다.
이런식의 비판이 가능하다면, 윤소영의 이론에서 공장노동자를 특권화 시키는 '지역 노동자 평의회'를 수정할 필요가 있을것 같다.
지역 노동자 평의회의 주도성을 공장노동자가 아닌 정보 또는 언어 노동자의 주도성으로 바꿔야 한다.

이런 비판에 대해서 윤소영은 마르크스의 잉여가치론을 가지고 맞선다.
공장노동 외부의 노동이란 기본적으로 가치생산 노동이 아니라고 반박한다.
정보와 언어로 이루어지는 노동이란 가치를 생산하는 주요한 노동형태가 아니라고 본다.
공장 노동을 관리하는 관리 노동이다.
아니면 공장노동으로 생산된 가치를 가로채는 이데올로기 노동이라고 본다.
그런 면에서 공장 외부의 노동이란 가치를 생산하지 못하는 불구의 노동이다.
이런 불구의 노동은 기생적이기 때문에 결국 소멸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윤소영은 철저하게 마르크스의 기본입장을 견지한다.
그걸로 네그리나 포스트구조주의적 입장들을 무찌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