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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먹기 또는 놀기

발 - 나르시즘

 

 

자전거 여행을 끝내고, 제일 고생한 검게 그을린 내 신체-'발'을 포스팅하고 싶었다.

게을러서 차일 피일 미루다가, 햇빛에 그을린 피부가 점점 희미해져 더 이상 미룰 수가 없게 되었다.

이런 욕망은, 아직 죽지 않았다고, 생생하게 살아있다고, 수컷의 냄새를 폴폴 풍기고 싶은 마초적 나르시즘의 소산일 것이다.

찬찬히 살펴보면, 이건 블로그가 타자와의 소통 매체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탐닉의 매체라는 증거에 다름 아니다.

근대가 발명한 정보기술적 소통매체가 실제로는 자기애로 함몰하는 나르시즘의 거울로 작동한다,는 주장은 썸뜩한 면이 있는 진실이다.

여럿이 모여, 대화를 따 돌리고, 자기만의 핸드폰에 빠져있는 풍경을 떠올려 보라.

현대사회가 나르시즘의 거울 사회라는 주장에 무어라고 변명할 수 있을까?

근대를 연 타자를 향한  대항해시대가, 결국은 자기만의 골방에 처박힌 나르시즘이라는 항구에 닺을 내린  그림은 쓸쓸하다.

발전을 더 넓은 관계를 향한 확장이라고 전제한다면, 이건 역사의 발전이 아니라 역사의 퇴행이라고 말해야 한다.

타자로 부터의 전면적 퇴각이라, 타자를 배제한 나만의 공간으로의 침몰-함몰 이다.

블로그라는 나만의 방에 처박힌 나는, 그런 퇴행적 역사의 반명물일까?

세상은 항상 모순과 아니러니로 가득한, 언제나 신천지다!

 

< cf : 이 글에서 사용한 나르시즘 개념은 온전히 김영민에게서 왔다.

그는 현대사회의 나르시즘적 성격을 사뭇 비극적인 묵시록으로 기술한다.

그러면서도 그것에서 벗어날 통로를 항상 그렇듯이 희미하게 제시한다.

그 길의 가능성은 정보기술사회의 복제 기술이 만들어 내는 동화의 힘을 비켜나 인문적 이화(異化)를 실천할 수 있는 능력에 묻는다.

정보기술사회의 대표격인 핸드폰이라는 매체가 만들어 내는 동일한 사유방식과 감각방식을 벗어나 다른 사유와 감각을 실천할 수 있는 인문적 능력에 대한 질문이다.

아마도 그런 가능성은 체계의 욕망을 거스를 만한, 체계의 명령을 비판적으로 읽어 낼 능력에 대한 질문일 것이다.

근자에 핸드폰을 사용하면서 각종 메신저의 현란한 정보전달기능에 매혹당하곤 한다.

그런데 자세히 메신저를 들여다 보면, 상품화된 각종 욕망의 교환으로 코드화된 천편일률적인 정보가 태반이다.

무엇보다도 큰 문제는 메신저를 통해서는 진정으로 서로 다른 의견들을 비판적으로 주고 받는 생산적인 소통의 개연성 보다는 동일한 서사를 무한 반복하는 동화의 개연성이 훨씬 잘 먹힌다는 점이다.

당연히, 메신저에 노출된 당사자들은 복수임에도, 모두가 하나의 동일한 메신저 내용으로 평평하게 다듬어진 프레임에 매몰되어-빠져들어 그 밖을 까맣게 잊어 버린다.

메신저라는 매체가 만들어 내는 동일화된 부풀려진 존재감과, 그것이 만들어 내는 나르시즘에 빠진 전형적인 부작용이 여실하다.

정보기술 매체의 소통능력을 효율적 의사소통의 수단으로 사용하자는 주장은 그런 측면에서 일정한 비판과 한계를 전제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런 비판과 한계에 대한 인식이 없는 정보기술매체의 의사소통능력에 대한 무한신뢰는 인문성에 대한 무한패배로 가는 무한대로다.

현대정보기술사회의 바다에 빠져 익사하고 싶지 않다면, 무엇보다도 시급한 일은, 내가 사용하는 매체가 도대체 어디서 왔고, 무엇을 전달하고, 어떻게 세상을 감각하게 하는지 물어 보아야 한다.

정보전달 매체에 빠르고 편리하게 흐르는 정보는 낚시 밥이고, 거기에 코를 꿰이는 건 우리의 존재방식 전체이기 때문이다.

세상에 공짜로 얻어지는 선물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