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자전거 라이딩과 영화 '박쥐'
제주시에서 서귀포로 가로지르는 길을 선택했다.
예전에 두어번 해변가를 따르는 일주 도로를 타본 적이 있다.
이번에는 한라산을 가로질러 가보자고 생각했다.
이름이 5.16도로였다.
박정희가 군화발로 정권을 잡고, 곧바로 전국에서 건달들 잡아다가 낸 도로란다.
한라산 정상을 가장 가까이서 끼고 도는 도로였다.
아침에 출발할 때는 날씨가 쾌청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하늘이 흐려지더니, 이내 빗방울이 듣기 시작했다.
1100 고지라는 성판악을 앞에 두고 라이딩을 포기했다.
빗방울이 굵어 지면서 더이상의 진행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다.
할 수 없이 발길을 돌려 서둘러 서귀포로 되돌아왔다.
모텔잡고 샤워하고 밥을 먹었다.
가까운 극장에 갔다.
'박쥐'가 제일 촘촘하게 극장에 걸려 있다.
박찬욱이라는 감독의 명성이 아마 그렇게 만들었을거다.
서둘러 돈을 내고 자리를 잡았다.
2시간이 넘는 런닝타임이다.
송강호는 천주교 사제이고, 동시에 뱀파이어다.
피 같은 돈 내고 영화 보는 내내 관객들은 그에게 흡혈 당하는 불쾌감을 감수해야 한다.
천주교 사제 송강호는 현실의 모든 코드를 파괴한다.
사제로서 종교라는 윤리의 코드를 파괴한다.
세속의 인간으로서 친구의 아내라는 코드마저도 넘어간다.
김옥빈은 분열되어 있다.
존재 자체가 그렇다.
버려진 아이였다가, 남편의 어머니에게 길러졌다.
자라서는 어머니 아들의 아내가 되었다.
어머니가 되지 못하는 김옥빈은 현실에서 분열하는걸 피할 길이 없다.
김옥빈은 송강호의 애인이면서 남편의 아내이고, 어머니의 딸이어야한다.
김옥빈에게 일관성 있고, 통합적인 정체성을 확보하는 길은 없다.
이런 다중적 분열은 김옥빈이라는 캐릭터의 원인이고 동시에 결과다.
들뢰즈식으로 말해서 김옥빈 이라는 존재의 의미가 성립하는 계열이다.
어머니는 아들과 그 아들의 아내를 동시에 같이 길렀다.
어머니는 또 다른 버려진 아이, 아들의 친구 송강호도 같이 길렀다.
세상의 여자들은 자식과 남편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현실에 개입한다.
그래서 어머니는 현실의 냉정한 객관적 관찰자이다.
영화속에서 어머니는 그런 역할을 징그럽게도 수행한다.
수행이 아니라 고행을 실천한다.
발생하는 모든 사건을 지켜보아야 한다.
직접적으로 현실에 개입하는 통로는 없다.
며느리이자 딸이고 아들인 김옥빈과 송강호가 또다른 진짜 아들을 죽이는 장면을 그냥 관찰해야만 한다.
어머니라는 존재를 획득한게 안정된 정체성 확립의 행복이라면, 관찰자라는 비극은 그 댓가다.
현실에 남자를 통해서 개입하는걸 선택한 삶의 댓가다.
그게 가부장제 하에서 여자들의 수동적인 선택의 결과인지, 아니면 능동적으로 그런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런 논쟁은 기껏해야 현실의 잉여를 손톱 만큼도 바꾸지 못한다.
어머니가 아닌 김옥빈은 적극적으로 분열한다.
분열하는 만큼 김옥빈은 풍성하다.
어머니인 김해숙은 현실을 쓸어 담는 오지랖 넓은 대지다.
그게 김옥빈과 어머니가 엇나가는 갈림길이다.
현실체제의 수호자로서 남자 송강호는 어머니에게는 어쩌면 하나님이다.
송강호가 사제인건 그래서 올바른 설정이다.
어머니에게 송강호는 아들이고, 현실을 구원해 줄 하나님이다.
하나님인 그는 자발적으로 육신을 던져 바이러스 실험의 마루타가 된다.
우연으로 살아남는 대신, 그는 진짜 하나님이 아닌 흡혈귀가 된다.
성스러운 성자로서 몸을 던진 댓가가 흡혈귀다.
박찬욱이 기도교적 구원의 메세지를 전복한건 도발적이다.
송강호는 흡혈귀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조금씩 옹호하기 시작한다.
사제로서 자신의 정체성과 어떻게든 조화를 시키려고 애쓰지만, 흡혈귀로서 자신의 욕망에 충실할려고 애쓴다
이런 분열의 사이에 몸으로 끼인 김옥빈은 송강호를 압도한다.
흔들리는 송강호를 단호하게 부추긴다.
'네게 당신은 사제가 아니라 단지 노총각일 뿐이다'
애초에 지키고 대변해야 할 현실이 없으므로 김옥빈은 분망하게 흡혈귀로 분열한다.
흡혈귀로서 김옥빈은 주저함이 없다.
'여우가 닭 잡아 먹는게 뭐가 잘못이야 ? !'
자신의 존재를 긍정하고 즐긴다.
박찬욱 영화는 현실을 전복한다는 말은 옳다.
단지 반만 그렇다.
'박쥐'도 그런점에서 전형성이 있다.
그러나 그는 어디로 가야할지 모른다.
현실을 전복해 놓고 빗물이 쏟아지는 현실과 대면한다.
쏟아지는 빗물이 눈 앞을 가린다.
뒤로 돌아가는 편안하고 익숙한 잘 아는 길이 있다.
박찬욱에게 그것은 기독교적 구원의 메세지다.
그는 전복했던 기독교적 구원의 메세지를 다시 뒤집는다.
버렸던 카드를 다시 집어 든다.
"삶은 저주이고, 죽음만이 삶을 구원하는 유일한 길이다."
"삶의 고통은 사후 세계를 축복하기 위한 시험이다"
기독교적 세계관이 박찬욱 영화를 설명하는 핵심 키워드다.
현실을 전복한 송강호와 김옥빈의 고통을 죽음으로 구원한다.
칸이 박찬욱을 사랑한다면 아마도 박찬욱의 이런 심오한 기독교적 세계관에 대한 친숙성 때문일거다.
너무 너무 서구적인 박찬욱, 그러면서도 심오한 박찬욱 그게 칸이 반복해서 그를 호출하는 이유일거다.
영화를 보고 밥을 먹으며 자꾸 그런 생각이 들었다.
'누가 먼저인지 모르지만 둘은 서로 몸을 섞었다'
나는 성판악 정상 가까이에서 비를 핑계로 서둘러 산을 내려왔다.
제주시-서귀포 구간 반쯤을 횡단하다가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극장에 앉아 '박쥐'를 보았다.
cf) 박찬욱이 대가라는건 그의 영화 곳곳에 숨겨 놓은 유머다.
사제, 뱀파이어, 친구 아내와의 사랑, 죽음을 통한 구원 같은 무거운 주제를 다루면서도 그의 유머는 쉼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