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스트릭트 9'의 느낌을 이미지로 표현 한다면.
(르네 마그리트. Collective Invention - 집단적 발명 )
cf) 마그리트는 인어 이미지를 거꾸로 뒤집어 놓는다. 그걸로 집단의 상식적 지식이라는게, 일종의 임의적인 사고방식이라고 말한다. 관습적 지식이란 고정된 실체가 아니고, 당대의 역사적인 산물일 뿐이라고 도발한다. 그런 의도라면, 지금은 효과적인 예술형식이 무엇일까 ? 드림웤스의 애니메이션일까? 아니면 피터 잭슨의 '디스트릭트 9' 같은 엉뚱한 SF일까?
' 디스트릭트 9'은 일상의 상식적 관습에 의문을 제기하는 영화다.
세속적 인간의 신체에 그려진 상식적 관념을 물구나무 세운다.
친숙한 동화속 이미지.
아름다운 상반신 여자, 매끈한 하반신 물고기 인어가 아니라.
매끈한 하반신 여자와 징그러운 상반신 물고기 인어를 사랑할 수 있냐고 묻는다.
이질적 타자를 당신은 참아 낼 수 있어?
그냥 존재 그 자체가 불쾌한데도?
무조건 싫은데도?
이유없이 메스꺼운데?
그게 없으면 내가 행복해질 것 같은데도?
근대적 이성이 만들어 낸 동일시에 기반한 문명을 인간은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인간은 문명의 타자와 소통할 수 있을까?
사랑이 구원일 수 있을까?
사랑이 소통의 실마리일 수 있을까?
외계인 프론은 문명의 제일 변방인 아프리카.
근대적 문명이 소외시킨 문명의 제일 바깥.
그곳에서 조차 이질적 타자로 인식된다.
영화의 배경인 요하네스버그 제9구역은 그런 상징적 공간이고.
외계인 프론은 거기서도 격리되어, 더 멀고 더 외진 바깥으로 보내져야만 한다.
인간의 문명과 이질적 타자인 외계인 간의 아득한 거리가 까마득하다.
그 거리는 극복 될 수 있을까?
엔딩 씬에서, 인간이었다가.
외계인 프론이 되어버린 사내가 사랑하는 아내에게 꽃을 보낸다.
강제 이주된 격리지역의 쓰레기더미에서 쓰레기 쇳조각으로 만든 꽂을.
여자는 남자의 마음을 알지만 그걸 온전하게 받을 수는 없다.
여전히 그 거리는 아득하다.
외계인이 되어버린 남자와 그를 사랑했었던 여자의 거리.
모호하게 봉합되지 않은채로 남겨진 그 거리가 이영화의 다름이다.
할리우드 SF 영화의 전형성으로 부터 자유로운 거리다.
그 자유는 그린다.
인간의 신체에 새겨진 근대적 이성이 만들어 낸 동일시의 폭력습성이라는 문신을.
너 게이 참아낼 수 있어?
너 레즈비언 예쁘다고 생각해?
너 꼬질 꼬질한 동남아 이민자와 사랑에 빠질 수 있어?
너 학교 이탈자 칭찬할 수 있어?
너의 그 잘난 합리적 이성이 이질적 타자에 대한 가장 큰 폭력인것을 알기나 하니?
한도 끝도 없는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나는 그런 질문들에 어느것 하나 자신이 없다.
당신은 어떤가?
아직도 첩첩한 근대라니!
한숨이 나온다
답답한데 황병승의 입을 빌리자.
"나는 혼돈의 음악을 연주하는 대담한 공주를 두었나니 고리타분한 백성들이여, 기절하라! 단 몇 초 만이라도".
이제 좀 후련하다.
답답하다면 당신도 혼돈의 음악을 듣고 단 몇초간이라도 기절해보라.
당신의 그 단단한 현실적 규범이라는 거북이 등짝 같은 무거운 껍질을 벗어 봐라.
그리고 몇 초간이라도 기절해 봐라.
ㅋㅋㅋ.
선동에 따른 책임은 각자의 몫이다.
( 주인공 얼빵한 비커스가 얼빵한 외계인을 새로운 격리지역으로 이주시키기 위해 구라를 풀고 있다. 외계인들의 형식적 동의 절차를 구하지만, 사실은 폭력적으로, 그런점에서 이야기는 우리의 현실을 쏙 빼 닮았다. 일상에 깊이 뿌리내린 차별 / 분리/ 격리의 이야기다. 물론 그런 분리와 격리는 근대적 이성이라는 망치를 든 정신병리학-위생학- 범죄학 등등이고. 이성의 망치로 때려부순 자리에는 도시공학적 과학이 공간을 구축한다. 근대의 메트릭스가 쫘악 깔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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