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연휴기간에 두편의 영화를 봤다.
먼저 본 영화가 라디오데이즈고, 뒤에 본 영화가 원스어폰어타임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라디오데이즈는 신선하고, 재기넘치고, 영감을 준다.
원스어폰어타임은 그냥 무지하게 웃긴다.
돈 아깝지 않게 실컷 웃겨주고, 나쁜 친일파 새끼들 다 응징하는 카타르시스도 덤으로 준다.
독립운동
둘다 근대를 다룬다.
하나는 1930년대고, 다른 하나는 1945년 해방직전이다.
둘다 제국의 시대를 다루니 독립운동을 피해갈 수 없다.
라디나 원스 둘다 독립운동을 엄숙하게 다루지 않고 가볍게 희화화한다.
라디는 독립운동을 전체 이야기의 한축으로만 사용한다.
원스는 독립운동을 이야기의 전체 축으로 삼는다.
라디는 독립운동을 아무런 애국적 지향성 없이 철저하게 서사를 위해서만 사용한다.
그런점에서 라디가 독립운동을 희화화하는 시선은 아주 껄렁하다.
유승범의 껄렁함과 잘 맞아 떨어진다.
원스도 라디처럼 독립운동을 희화화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원스는 독립운동을 찬양하는 애국주의적 태도를 견지한다.
이광수 모윤숙 노덕술 같은 친일행위자들을 처단하는 스토리는 그렇지 못한 현실에 대한 가상적 한풀이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한다.
그런점에서 원스는 애국주의를 전면에 내세움에도 불구하고, 현실을 왜곡하는 역설을 만들어 낸다.
라디는 애국주의적 정서에 아무런 관심도 없고, 민중들의 속절 없는 신파에 대한 열광을 다루면서도 그 어딘가에 진짜 혁명의 숨결이 살아숨쉰다고 주장한다.
라디는 지식인들의 엄숙하고 진지한 독립운동을 비웃으며 민중들의 유치한 일상을 전면에 내세운다.
신파에 열광하는 민중은 제국적 지배와 아무런 관련 없이 일상을 꾸려간다.
그런 무식한 민중들이 사랑의 불꽃과 함께 혁명의 불꽃을 터트릴 수 도 있다고 영화는 살짝 관객의 귀에대고 몰래 속삭인다.
원스는 독립운동을 보다 직접적으로 말한다.
그게 선이고 우리가 당연히 해야할 일이라고, 그러나 그게 마술처럼 재미나는 오락으로 그려진다.
그런점에서 원스는 오히려 위선적인 한편으로 철저히 애국주의와 상업주의를 다 챙긴다.
근대
촌구석에 살다 보니 극장갈 기회가 드물다.
가끔 도회에 가더라도 마초 아저씨들과 술먹고 당구치기 바쁘다.
어쩌다 극장에 가면 이것 저것 모든게 새롭다.
라디오데이즈를 보러 갔을때도 그랬다.
멀티플렉스 극장이란게 원래 그렇기는 하지만, 백화점 물건처럼 다양한 물건을 전시해 놓고 마음가는대로 고르세요,라고 영화를 잔뜩 진열해 놓고 있었다.
휘황함에 눈이멀어 아무거나 지금 볼 수 있는 영화달라고 했다.
그게 라디오데이즈다.
이게 재미있어서 며칠후에 원스어폰타임을 망설임 없이 선택했다.
근데 극장에 들어가면서 보니 '모던보이'라는 근대를 다루는 또 한편의 영화가 개봉대기 상태였다.
왜 이렇게 느닷없이 근대가 화두가 되었을까?
고미숙은 근대가 1910년대 어디쯤에서 갑자기 출현했다고 말한다.
그녀가 묘사한 한국의 근대라는 풍경은 '한과 민족'이라는 정서다.
봉건적 조선으로 부터 갑작스럽게 단절하면서 출현한 이 정서는 좌파도 우파도 공유한 사유기반이다.
이게 한반도를 100년 이상을 지배하고 있는 지적-정서적 밑바탕이다.
푸코식으로 말해서 봉건적 조선 500년 이라는 지층과 확연히 구분되는 근대의 에피스테메라는 거다.
사실상 남한내 정파간의 차이도, 남북의 정권간의 차이도 '민족과 한'이라는 프리즘으로 보면 동일하다.
이런 근대적 정서의 뿌리는 제국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독립된 해방국가를 만드는 거다.
엄숙하고 무거운 시대적 소명으로 주어진 과제다.
그걸 어떻게 만들것인가가 모든 정파적 차이다.
이럼 엄숙함을 라디는 도시락폭탄이라는 우스꽝스런 풍경으로 라디오극의 신파와 섞었다.
원스는 거대한 다이아몬드 '동방의 빛'이라는 해방된 독립국가의 상징을 마술놀이라는 오락과 섞었다.
그런점에서 두 영화가 서로 다른 시선 - 라디는 근대적 문제의식 자체를 외면하고, 원스는 근대적 문제의식을 적극 상업적으로 이용한다 - 을 가지고 있음에도 동일하다.
하나는 외면을 통해서 시야에서 사라지고, 하나는 놀이나 상업적 이용의 대상으로 취급되면서 근대적 문제의식의 엄숙성이 휘발한다.
원스에서는 '한과 민족'이라는 화두가 상업적 코미디 소재가 되면서 그것이 가지는 엄숙성이 날아가고, 라디에서는 '한과 민족'이라는 화두 자체를 아예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 부재함으로 외면해 버린다.
라디가 프랑스적 포스트모더니즘이라면, 원스는 할리우드적 포스트모더니즘이다.
그런점에서 이 두영화는 서로 다르면서 닮았다.
영화가 시대의 변화를 추인하는건지, 아니면 예고하는건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확실히 어떤 사건의 징후인것은 분명해 보인다.
근대적 문제설정이라는 견고한 판이 쩍 갈라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모던 보이까지 열리면 이미 어떤 사건이 발생했을것 같고, 대중들에게 그런 감수성이 퍼져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그건 그렇고, 재미만 추구한다면 원스어폰어타임에 한표.
재미와 새로운 감수성을 자극받고 싶다면, 그리고 오래 기억될 영화를 원한다면 라디오데이즈에 한표를 주고싶다.
결국 나한테는 라디오데이즈가 훨씬 좋았다는 말이다
cf) 근대에 대한 시비걸기가 이제 텍스트자료에서 영화로까지 번진모양이다. 민족담론이 위협 받으면 열 받을 사람들 많을텐데 심심한 위로를 전한다. 너무 비아냥 거리나!
고백컨데 나도 한때는 그 문제의식 언저리에서 서성거리기도하고, 그 경계 넘어를 기웃거리기도 하고 그랬다. 기호 3번.
왜 기호 3번 사람들은 그렇게 잘 생겼냐! 그게 내가 기호 3번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다.
웃는 사람은 나를 아는 사람이고, 귀신 씻나락 까먹는 텍스트로 읽히는 사람은 나를 모르는 사람이다.
내가 블로그를하는 이유는 익명성을 전제로 재미있게 놀아보자는거다. 그러니 비밀코드로 읽히는 사람은 그냥 이놈이 심심해서 놀고 있구나,라고 미친놈 취급하면 그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