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과 도로 : 차이의 흐름과 차이의 섬멸
'길은 강산의 가장 여린 부분을 따라 만들어진다'
김훈의 책 어딘가에서 읽었던 말이다.
사진에서 처럼 길은 산과 강이 만나는 사이를 따라서 흘러간다.
길은 높아서 험악한 산들과, 깊이 파여서 위협적인 강들의 사이에 있으니, 강산의 가장 여린 부분이다.
길은 가장 여린 자연을 따라서 세상을 연결하는 부드러운 곡선이다.
길이 부드럽고 여린 곡선인 것은, 그것이 이쪽과 저쪽의 차이들을 따라 흐르기 때문이다.
흐름이 이리저리 우뚝 솟은, 때로는 깊이 파인 차이들을 연결하자면, 부드럽게 휘어질 수 밖에 없다.
수많은 차이들을 긍정하면서 그것들을 연결하는 길은 차이들을 굴복시키지 않는다.
그냥 차이들과 한몸이 되고, 차이들을 품고, 차이들을 연결해 한 몸이 된다.
길은 자연의 차이들과 같이 놀기를 즐긴다.
길이 노는 흐름은 차이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경계를 허문다.
경계를 허물어 자유롭게 세상을 소통시킨다.
그래서 길 이쪽과 저쪽에는 겹겹히 포개어진 주름이 있고, 그 주름들 속에는 풍성한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도로는 자신을 관철시키는 직선으로서의 힘이다.
스스로의 힘으로 차이들을 섬멸해서 연결하는 폭력이다.
자신을 주장하면서 타자를 억압하는 도로는 그러므로 차이를 갖지 않는다.
도로는 차이들의 주름 사이를 부정하기 때문에, 차이들 사이의 주름을 제거한다.
차이들 사이의 주름을 매끄럽게 편다.
매끄럽게 공간을 펼치는 도로는 그러므로 모든 공간을 균질화 시킨다.
도로에서 모든 공간은 동질적이다.
도로에서 땅끝 해남-목포 80km와, 수원-서울 80km는 동일한 공간이다.
도로는 모든 공간을 매끄럽게 펼쳐 동질화하기 때문에 도로 위 어느 공간에서나 서사는 동일하다.
내가 길을 걸으면 길을 걸을 때마다 걷는 길마다, 차이들 사이의 주름 속 다른 이야기를 듣거나 만들지만, 내가 도로를 걸으면, 모든 도로는 동일한 이갸기만을 들려주고 만든다.
도로는 모든 공간을 동일하게 균질화시키는 힘이다.
cf) 얼마전 내가 사는 집과 학교 사이에 고속도로만큼 잘 닦인 왕복 4차선 국도가 새롭게 뚫렸다.
전에는 편도 일차선 국도를 따라 출퇴근하였다.
편도 일차선 옛길은 마을들 사이를 이리저리 따라서 흘러가는 구불구불한 동선의 궤적을 그린다.
나는 그 구부러진 동선의 여기저기에 숨겨진 주름들속 눈꼼만끔 작은 시장에도 들르고, 계절따라 꽃피고 지고, 연녹색에서 짙푸른 녹색이되고, 빨갛게 단풍이 드는 풍경을 즐겼다.
그렇게 변하는 시골학교 운동장에서 땀흘리며 뒹굴기도 했다.
그러다가 뻥뚫린 새도로가 생기자 모든게 변했다.
내 동선속에 있던 자잘한 이야기들이 사라져 버렸다.
새로운 시원한 길을 따라서 그것들은 내 몸에서 사라졌고, 나는 더이상 그것들을 느낄 수 없다.
도로의 속도가 내 생활을 매끄러운 도시적 생활로 만드는 힘을 만들어 냈다.
고미숙은 '근대는 모든 공간을 균질화시킨다'고 말한다.
나는 이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내가 다니던 길이 옛날의 구불구불한 국도에서, 직선으로 쭉 뻗은 넓은 도로로 바뀌면서 비로소 그녀의 주장을 이해할 수 있었다.
cf) 김훈의 모든 서사는 길의 논리를 따라가다가 항상 도로의 폭력적 미학에 굴복한다.
인간의 존재 자체가 역설이고, 아이러니이고, 다층적 복합체임을 드러 내면서, 그는 그런 혼돈의 어딘가에서 존재의 둔중하고 엄숙한 숭고미를 찿아낼려고 애쓴다.
왜 그는 길의 미학을 끝까지 밀어 붙이지 않고, 결국 도로의 미학에 굴복하는가?
김훈은 언제 쯤 과거의 열등감을 털고 좀더 가벼워 질 수 있을까?
이런 시비를 거는건 김훈식의 서사가 가진 위험성을 폭로하고 싶다는 열망과, 김훈을 비판적으로 독해할 수 있다는 허영심의 짬뽕에 기인한다.
허영심의 노출이건 말건, 김훈은 이문열 만큼이나 비판적 독해가 필요하다.
김훈은 현실권력을 정당화하는 논리를 이문열 보다 더 교묘하게 구사한다.
김훈의 서사는 길의 논리를 따라가다, 도로의 폭력에 굴복하는 결말을 항상 배치한다.
현실이라는 이름으로 그걸 아름답게 미화한다.
그런 김훈의 책장을 덮으면 깊은 숭고미의 감동이 울린다.
하지만, 결국 무릎이 꺽이는 허무감이 내부에 깊게 자리잡게 한다.
그런면에서 김훈은 가장 최종심급의 패배주의고, 보수주의자다.
김훈을 비판적으로 독해하지 않는한 세계는 항상 닫혀있다.
그걸 김훈도 알고, 우리도 안다.
우리는 김훈을 어떻게 돌파할까?
심각하고 둔중한, 이런식의 어법이 김훈스타일 이다.
그냥 김훈과 다른 상상을 하자!
그게 김훈을 살리는 길이고, 우리를 살리는 길이다.
김훈을 가지고 놀자. 그게 진정 김훈을 존중하는 방법이고, 김훈을 벗어나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