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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내리는 밤(이병초)



눈 내리는 밤


제때 죽지 못한
슬픔처럼 숫제 알몸띵이로 펑펑펑 함박눈 쏟아진다 외등 낀 탱자나무 울타리 위로, 짝발 짚고 선 지게 위로, 우우웅컹! 문창을 때려 쌓는 개 짖는 소리 위로 펑펑펑펑 함박눈 쏟아진다 미치게 살고 싶었던 꿈자리들이 펑펑펑펑 쏟아진다 놋요강 놋대야 새로 들이고 자식 보고 싶은 밤, 산도 들도 지붕도 길바닥도 평등하게 눈 덮일 눈부신 아침을 펑펑펑펑 출산하는 밤, 질긴 명줄이 다녀가는지 간혹 정짓문이 삐걱거린다.(p.42)

이병초 시인의 어법으로 말하면, 징허게 고향을 파먹고 산다.
고향이 없었다면 그의 삶, 다른말로 시는 세상에 없다.
그의 고향은 정겹고, 눈물나고, 때로는 슬프고 아름답다.

그런데 웃기는건 그게 나에게는 결국 애로틱하게 읽힌다는 거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 더니, 꼭 그 모양이다.
그래서 그런지 이 시는 황진이의 연정가로 들린다.

동지달 기나 긴 밤을 한 허리를 베어 내어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룬 님 오신 남 밤이어든 굽이굽이 펴리라



아무도 이병초 시인이 말하는 눈내리는 고향의 밤으로 돌아가지 못할것이다.

고향에는 더 이상 눈이 내리지 않고, 밤은 더더욱 오지 않는다.
그게 안타까워서 그는 영원히 다시 보지 못할 고향을 반복적으로 호출하는 걸까?

그런 모두의 가슴에 밤사이 소리없이 내리던 눈은 안온하고 편안하다. 


그런날, 간혹 정짓문이 삐걱거리는 것은 모두가 고향을 떠났다는 쓸쓸함이다.

아니면, 다시는 고향으로 돌아 갈 수 없음에 대한 울음소리다.
애초에 상실할 고향조차 없는, 허우대만 멀쩡한 기계인간들의 비감이다.

그래서 이제 누구도 더 이상 고향 같은 곳에는 갈 수 없다.
그냥 그런데가 있었다고 이병초 시인처럼 끼적일 수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애뜻하게, 우리는 고향을 가상의 기호로서만 소비할 수 있다.

그나저나 눈이나 펑펑펑펑 내렸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