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민과 스티븐킹의 부사론
어딘가에서, 김영민은 '부사적 글 쓰기'를 하고 싶다고 고백한다.
그 결과물이 '동무론'인데, 이 책에서 그는 귀신처럼 부사를 부린다.
그것에 영향을 받아서 김영민을 흉내 낼려고 글쓰기에 부사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김영민이 부사적 글 쓰기를 권하는 이유는 형용사가 가진 노골적 꾸밈을 피하고 싶은데 있다.
전체 문장을 지그시 꾸며 주는 부사의 장점을 살리면 형용사의 천박성을 피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명사의 단단한 결정성을 약화 시킨다.
예를 들자면 이런식이다.
1. "총총한 밤하늘 아래 은은한 달 빛이 비추고 있었다."
2. "은은하게, 총총한 밤하늘 아래 달 빛이 비추고 있었다."
2번 문장에서 은은하게는 전체 문장을 감싼다.
총총함-밤하늘-달빛-비춤 모두가 은은하다.
그에 비해서 1번 문장은 달빛만이 유별하게 은은하다.
부사는 이런 식으로 전체를 아우르는 속성이 있다.
그런 한편으로 명사의 딱딱한 결정성을 약화시킨다.
명사의 문제는 단단한 고정성에 있다.
예를 들어 '바람이 분다'는 문장은 주어인 명사 : 바람이라는 주체를 가정한다.
주체로서 '바람'이 자기 맘에서 동하는 의지에 따라 어딘가로 이동한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명사의 이런 딱딱한 고정성은 인식의 오류를 발생시키는 최악의 적이다.
이럴 경우 적절한 부사의 사용은 명사의 고정성을 풀어 놓는다.
예를 들어 "흔들리면서, 바람이 분다"라고 말해보자.
바람의 명사성 : 견결한 고정성으로서 주체성이 훨씬 약화된다.
김영민이 '부사적 글 쓰기'를 주장하는 이유는 전체문장을 흐릿하게 만들기 위해서다.
그렇게 함으로서 의미를 풍부하게 하고, 글에 대한 독자들의 개입여지를 폭 넓게 해 준다.
부사의 적절한 사용을 적극 권하는 김영민에 비해 부사를 지독히 혐오하는 사람이 있다.
"유혹하는 글 쓰기'의 'Stephen King'이다.
그는 부사가 쓸데없는 부연이라고 생각한다.
명사와 동사만으로 충분한 정보를 전달할 수 있다.
자꾸 부사를 쓰면 글이 유치하게 감정이 넘치게 된다.
이게 스티븐킹의 부사론이다.
귀가 얇아서 그런지 그의 지적이 머리에 쏙 들어온다.
물론, 김영민이 '부사적 글 쓰기'를 말할때 감정의 과잉으로 넘쳐나는 글을 쓰라는 주문은 아니다.
적절하게 부사를 활용하라는 거다.
그의 글에서 부사들은 대개의 경우 문장의 첫머리를 차지한다.
사물을 비추는 조명처럼, 그의 부사는 문장 또는 문단의 명도 : 밝기와 어둠 같은 것들을 정해준다.
김영민이 '나는 부사적 글 쓰기를 하고 싶다'라고 말할 때, 그건 영화에서 피사체에 대한 조명장치 처럼 부사를 사용하고 싶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누가 옳을까?
부사를 저주하는 스티븐 킹과 부사를 숭배하는 김영민 중에서.
글의 스타일 : 문체 때문에 이런 차이가 생길것이다.
김영민은 은유와 함축으로 가득한 글을 쓴다.
세상을 일도 양단으로 나눌 수 없다는 것을 그는 너무도 잘 안다.
그게 '부사적 글 쓰기'을 권하는 이유다.
스티븐 킹은 추리소설 작가다.
그에게 언어란 수학처럼 명료한 상황전개를 전달하는 수단이다.
그런 자리에 부사가 끼어들면 전후 서술이 흐릿해진다.
그게 호들갑스럽게 부사를 혐오하는 이유일 거다.
그러니 누가 옳은지 판단할 일이 아니다.
그나저나 이 책을 읽으면서 부사를 남발하는 내 모습이 보였다.
살짝, 그게 들킨것 같아 쪽이 팔렸다.
아이꾸 또 그랬네! ㅎㅎ *^.^*
어딘가에서, 김영민은 '부사적 글 쓰기'를 하고 싶다고 고백한다.
그 결과물이 '동무론'인데, 이 책에서 그는 귀신처럼 부사를 부린다.
그것에 영향을 받아서 김영민을 흉내 낼려고 글쓰기에 부사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김영민이 부사적 글 쓰기를 권하는 이유는 형용사가 가진 노골적 꾸밈을 피하고 싶은데 있다.
전체 문장을 지그시 꾸며 주는 부사의 장점을 살리면 형용사의 천박성을 피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명사의 단단한 결정성을 약화 시킨다.
예를 들자면 이런식이다.
1. "총총한 밤하늘 아래 은은한 달 빛이 비추고 있었다."
2. "은은하게, 총총한 밤하늘 아래 달 빛이 비추고 있었다."
2번 문장에서 은은하게는 전체 문장을 감싼다.
총총함-밤하늘-달빛-비춤 모두가 은은하다.
그에 비해서 1번 문장은 달빛만이 유별하게 은은하다.
부사는 이런 식으로 전체를 아우르는 속성이 있다.
그런 한편으로 명사의 딱딱한 결정성을 약화시킨다.
명사의 문제는 단단한 고정성에 있다.
예를 들어 '바람이 분다'는 문장은 주어인 명사 : 바람이라는 주체를 가정한다.
주체로서 '바람'이 자기 맘에서 동하는 의지에 따라 어딘가로 이동한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명사의 이런 딱딱한 고정성은 인식의 오류를 발생시키는 최악의 적이다.
이럴 경우 적절한 부사의 사용은 명사의 고정성을 풀어 놓는다.
예를 들어 "흔들리면서, 바람이 분다"라고 말해보자.
바람의 명사성 : 견결한 고정성으로서 주체성이 훨씬 약화된다.
김영민이 '부사적 글 쓰기'를 주장하는 이유는 전체문장을 흐릿하게 만들기 위해서다.
그렇게 함으로서 의미를 풍부하게 하고, 글에 대한 독자들의 개입여지를 폭 넓게 해 준다.
부사의 적절한 사용을 적극 권하는 김영민에 비해 부사를 지독히 혐오하는 사람이 있다.
"유혹하는 글 쓰기'의 'Stephen King'이다.
그는 부사가 쓸데없는 부연이라고 생각한다.
명사와 동사만으로 충분한 정보를 전달할 수 있다.
자꾸 부사를 쓰면 글이 유치하게 감정이 넘치게 된다.
이게 스티븐킹의 부사론이다.
귀가 얇아서 그런지 그의 지적이 머리에 쏙 들어온다.
물론, 김영민이 '부사적 글 쓰기'를 말할때 감정의 과잉으로 넘쳐나는 글을 쓰라는 주문은 아니다.
적절하게 부사를 활용하라는 거다.
그의 글에서 부사들은 대개의 경우 문장의 첫머리를 차지한다.
사물을 비추는 조명처럼, 그의 부사는 문장 또는 문단의 명도 : 밝기와 어둠 같은 것들을 정해준다.
김영민이 '나는 부사적 글 쓰기를 하고 싶다'라고 말할 때, 그건 영화에서 피사체에 대한 조명장치 처럼 부사를 사용하고 싶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누가 옳을까?
부사를 저주하는 스티븐 킹과 부사를 숭배하는 김영민 중에서.
글의 스타일 : 문체 때문에 이런 차이가 생길것이다.
김영민은 은유와 함축으로 가득한 글을 쓴다.
세상을 일도 양단으로 나눌 수 없다는 것을 그는 너무도 잘 안다.
그게 '부사적 글 쓰기'을 권하는 이유다.
스티븐 킹은 추리소설 작가다.
그에게 언어란 수학처럼 명료한 상황전개를 전달하는 수단이다.
그런 자리에 부사가 끼어들면 전후 서술이 흐릿해진다.
그게 호들갑스럽게 부사를 혐오하는 이유일 거다.
그러니 누가 옳은지 판단할 일이 아니다.
그나저나 이 책을 읽으면서 부사를 남발하는 내 모습이 보였다.
살짝, 그게 들킨것 같아 쪽이 팔렸다.
아이꾸 또 그랬네! ㅎㅎ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