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사적 인간 관계론 : 독립적이되 빗물처럼 스며 들어라
김영민이 말하는 부사론의 진수는 인간관계론이다.
형용사는 아첨꾼 처럼 작동한다.
앞에서 명사를 허황하게 꾸며대는 거짓말 쟁이 역할을 한다.
그런점에 형용사는 진실하지 못하다.
형용사가 진실하지 못한 거짓 아첨꾼이라는 건 이데올로기적 언어에 적나라하다.
'정의 사회 구현' '위대한 동지' '영명한 지도자' '자애로운 수령' 등에 붙은 형용사들을 보라.
이념이 넘치는 시대에 비굴한 형용사들은 숨이 가쁘게 쓰였다.
이런 형용사들은 거꾸로 그렇지 못한 현실을 반증하는 허구의 언어들이다.
가짜 현실의 텅빈 허무함을 채워서 속이는게 형용사다.
명사는 너무 폭력적이다.
존재하지도 않으면서, 세상을 제단하고 가르고 점령한다.
진리, 선함, 아름다움 --- 이런게 구체적 실체로서 어디에 존재하나?
그럼에도 이런 명사들은 실재 존재하는 것처럼 쓰인다.
그리고 현실에 폭력적으로 개입한다.
구체적 실체로서 존재한다고 오해 받는 가장 흔한 명사는 '사랑'이다.
사람들은 '사랑'이라는 구체적 실체를 마음속에 나름으로 만들어 놓고 그것에 비추어 울고-불고-죽이고-살리면서 난리를 친다.
불교의 유심론을 흉내내자면, 모든게 그저 마음의 문제일 뿐이다.
그러니 사랑을 잃었다고 또는 얻었다고 울고 불일이 아니다.
'사랑한다'라는 말 대신에 차라리 '함께 밥을 먹고 싶다' '함께 영화를 보고 싶다' 등과 같이 말하는게 정확하다.
마찬가지로 '사랑하지 않는다'라는 말도 너무 모호하다.
대신에 '같이 말하고 싶지 않다' '같이 걷고 싶지 않다' 등이 선명한 표현이다.
'사랑한다 - 사랑하지 않는다' 같은 말들은 현실을 폭력적으로 왜곡시킨다.
그런 이유는 '사랑'이라는 명사의 추상적 성격에서 나온다.
대신에 '밥을 먹음-영화를 봄-대화를 나눔-같이 걸음' 등은 구체적이다.
그러므로 명사를 꼭 사용해야 한다면 진리-사랑 등과 같은 추상명사는 피해야한다.
추상명사의 폭력을 정리하는게 올바른 언어의 부림이다.
그래야 말이 단정해 진다.
물론 그게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그럼에도 그렇게 노력해야 한다.
그런 관점에서 영화제목 'Love Actually'를 번역하면 '사랑은 구체적 행동이다'라고 해야한다.
이런 표현이 불만이라면 '사랑은 마음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부연해야 한다.
이것도 불만이라면 '마음속의 사랑은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말이 엉뚱한 곳으로 너무 많이 갔다.
김영민이 말하는 부사는 슬그머니 소리내지 않고 상대와 관계하는 품사다.
'살며시, 구름이 바람에 미끌리면서 햇빛이 밝게 빛난다'
이런 표현에서 '살며시'는 다음 문장 전체에 관계한다.
그러면서도 '구름-미끌림-햇빛-밝음-빛남'이라는 낯말 하나하나에도 소리없이 스며든다.
김영민은 세상의 것들과 관계를 맺을 때 이런 부사적 관계를 명심하라고 말한다.
명사처럼 폭력적으로 상대를 위압하지 말아야 한다.
아첨꾼 마냥 배알도 없이 형용사 처럼 자기 존재를 거세하면 안된다.
부사처럼, 서로 독립적이면서도 은근하게 상대와 관계를 맺으라는 말이다.
독립적이되, 서로를 밀고 끌어가는 부사 같은 관계가 나도 좋다.
cf) 영화 'love actually'는 마음으로는 현실의 두께를 뚫을 수 없다는 말인데, 이걸 한바뀌 물구나무 세워서, 현실의 구체적 행동만이 진실이고, 마음은 단지 변명을 위한 나르시즘적 자기방어기제라고 해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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