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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경치

노회찬 1

근대적 정당정치를 이론적으로 정리해 제시하고자 했던 베버, 식으로 말해서, 정치는 신념윤리와 책임윤리의 상보적 결합이다.

신념윤리는 정치적 권력을 통하여 실현하고자 하는 가치나 믿음을 말한다.

책임윤리는 신념으로서 가치나 믿음을 현실에서 구현하고자 노력한 결과에 대한 책임을 수용한다는 의미이다.

 

1998년 아직 진보정당이란게 한국땅에 씨앗조차도 없을때, 노회찬은 진보정당의 필요성을 호소하면서 전국을 주유하고 있었다.

그때 처음 그의 존재를 알았다.

진보적이라고 생각했던 김대중으로 대표할 수 있는 대중 정친인들과는 또 다른 어법이 있음을 그때 알았다.

그러니, 개인적으로, 그를 통해서 일종의 진보정치의 세례를 받은 셈이다.

그는 이땅에 진보정치의 씨앗을 뿌렸다.

그리고, 거기서 새로운 싹이 움터서 막 자라기 시작하면, 태풍이 불어서 씻겨가는 억장 무너지는 상황을 수도 없이 돌파해냈다.

실패한 그 자리에서 다시 일어 서기를 반복하였다.

그렇게 투철한 신념윤리를 가진 그가 이번에는 스스로 거꾸러졌다.

투철한 신념에도 불구하고, 신념윤리가 책임윤리와 충돌하자, 스스로의 목숨으로 책임을 수용했다.

정치적 신념이, 관행이라는 습속에 묻혀 있어서 분별하지 못했던 작은 실수때문에 치명적인 훼손을 당할 상황에 처했다.

그에게 정치적 신념 윤리가 상처 받는 것은, 평생에 걸친 순정한 삶이 그저 그런 시정 잡배나 다름없는 흔한 정치인으로 전락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신념가치가 훼손당한다고 생각하자, 일말의 변명도 없이 그것에 대해 온전하게 책임지는 자세를 선택하였다.

마지막 순간 까지 신념윤리와 책임윤리를 완벽하게 끌어 앉았다.

신념윤리와 책임윤리를 일치시키고자 했던 그의 행동양식이, 아직 오지 않은 근대성을 갖춘 한국 정당 정치인의 전형이어야 한다.

그것은 남은자들의 몫이다.

정말 잘하자!

 

cf1) 왜 베버는 근대적 정치에서 신념윤리와 책임윤리를 나누어 볼려고 했을까? 근대의 일상생활을 규제하는 법리적 상식으로는 인간 행위의 의도와 결과는 인과관계다. 그러므로 의도에 속하는 주체에게 결과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있는 법리가 가능해진다. 그러나 최고의 상부구조인 정치영역의 복잡계는 이런 근대적인 법리적 인과 논리가 성립하지 않는 모순이 발생한다. 좋은 의도가 좋은 결과를 보증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신념윤리에 속하는 의도와, 책임윤리에 속하는 결과를 분리할 필요가 발생한다. 그래야, 신념이 올바르다고 하더라도, 그런 신념을 현실에서 구현하기 위한 분투가 나쁜 현실을 결과한다면, 그것에 대응하는 책임을 요구함으로서, 근대의 다당제적 정당 정치의 경쟁 논리가 정당화 된다. 그럼에도 신념윤리와 책임윤리는 서로 상보적이다. 책임윤리로 신념윤리가 정당화 되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노회찬은 한국 사회의 봉건적 정치 현실에서, 희소한 근대적 합리성을 가졌던 정치인의 전형이었다고 볼 수 있다. 

 

cf2) 물론 노회찬의 삶을 베버식의 정치 개념에 담기에는 부족함이 너무 많다. 그럼에도 이런 시도를 하는 것은, 이런식의 사람들의 퍼즐 조각들이 그에 대한 보다 풍부한 설명을 제공해 줄 수 있을거라고 보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근대적 합리성, 밀고 나가면 근대성의 심화가 한국 사회가 감당할 시대적 과제라고 생각한다. 나에게는 노회찬과 같은 인물이 그런 역할에 가깝다. 그런면에서 개인적으로 노회찬의 죽음은 어떤 말로도 잘 위로가 되지 않는다. 그만한 대체제가 없는 현실에서 그의 상실은, 정의당이 또 다른 커다란 도전에 직면했다는 암시 같다. 남은자들이 어떻게든 그 짐을 나누어 져야 하겠지만, 얼마간은 억울함이나 암울함 같은 우울감으로부터 자유롭기가 쉽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