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프타운 해변의 풍경. 이런 해변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다)
2003년도 겨울에 가족들 전부 끌고 남아프리카공화국에 갔다.
당시만해도 아프리카에 대한 일반인들의 상식이 전무한 시절이다.
여행은 무조건 선진국으로가서 그들이 얼마나 잘 사는지 구경하고 오는것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우연히 알게된 누군가가 아프리카 여행을 권했다.
진짜 자연을 만날 수 있고, 진짜 사람을 만날 수 있다,고 추천했다.
그말만 믿고, 서점에 들러 허접한 아프리카 여행관련 서적 달랑 두권사고(아직도 변변한게 없다), 아프리카 현지 한국인 게스트하우스 전화번호 인터넷을 통해서 따고, 여행사 수소문해서 싼 비행기표 구하고, 번갯불에 꽁 볶아먹듯 서둘러 출발했다.
아이들도, ex배우자도 어리 벙벙한 상태였다.
이번에도 항공사로 캐세이퍼시픽이 걸렸다.
국내는 아프리카를 취항하는 항공사가 없었고, 아시아에서 남아공에 취항하는 노선은 홍콩의 캐세이가 거의 유일하다시피 했다.
비행경로는 인천-첵랍콥-요하네스버그(현지인들은 '조버그'라고 발음한다)-케이프타운 이다.
최소한 48시간 가까이 비행기안에서 여기저기 공항 대합실에서 시간을 보내야 했다.
1. 부정부패
아무리 세밀하게 준비해도 여행에서는 예기치 못한 우연적 사건들에 부딪힌다.
처음 발생한건 조버그 국제공항이었다.
입국심사대에서 나에게 시비를 걸었다.
내 여권만 보류시키고 나머지 가족들은 다 통과시켰다.
어이가 없었다.
어쩌나보자고 버텼다.
같은 비행기 타고온 모든 승객들이 다 빠져나가고 나만 남았다.
돈을 요구하는 눈치가 역력했다.
동양인이 귀하니 현지 물정에 어둠고 만만한 밥이라고 생각했음에 틀림없었다.
심호흡하고 왜 내 여권만 보류하냐고 항의했다.
사실은 약간 쫄아있었다.
여권을 가지고 사무실 안쪽으로 들어갔다 나오더니 금방 태도가 돌변해서, 친절하게 웃으면서 입국허가 도장을 꽉 찍어서 건네주었다.
공항 터미널로 나와서 짐 찾으러 가서, 케이프타운 비행기표를 보여주면서, 어디로 가야하느냐고 물으니, 공항 관계자가 시간이 늦었다고 손수 직원들을 재촉해서 내 짐을 따로 빼내서, 자기가 질질 끌고 냅다 뛰어갔다.
속으로 참 친절한 직원이라고 생각했다.
나도 아이들도 배우자도 함께 그를 따라 조버그 국제공항을 빠져나와 국내선 공항으로 뛰어갔다.
겨우 탑승 시간에 맞춰서 국내선 공항에 도착하니, 이 친절한 공항 직원이 너무너무 친절하게 생글생글 웃으면서 'give me something'이라고 말했다.
도저히 거절할 수 없었다.
영국에서 쓰다만 파운드화가 있어서 '20파운드 지폐' 한장을 건넸다.
나중에 확인해 보니 어마어마하게 큰 돈이었다.
부정부패가 일상에 깊이 스며들어 있는 모습을 여러번 확인해야 했다.
2. 캐이프타운
(케이프타운 다운타운. 중심가의 초고층 빌딩 광고판을 대충 한국기업들이 차지하고 있다)
케이프타운에 도착하니 미리연락해둔 한국인 게스트하우스 운영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집에서 3일정도 머물렀다.
하루에 숙박비와 Guide 비용으로 200달러를 요구했다.
처음부터 누굴 따라다닐 계획도 아니었고, 그렇게 비싸게 돈을 퍼주는 것도 아까웠다.
기거할 집을 알아보니 금방 싼집이 나왔다.
하루에 6,000원 정도면 가족 모두가 지낼 수 있었다.
거기다 주인이 자기차도 싸게 렌트해 준다고 제안했다.
문제는 그 지역이 백인과 흑인주거지역의 경계지점이었다는 것이다.
남아공은 80%이상의 흑인과 20%이하의 백인이 철저히 분리된 생활을 한다.
소수의 백인이 국토의 전체를 차지하고 있고, 다수의 흑인이 점점이 국토의 백인점령지 사이사이에 구더기처럼 밀집해 살고 있었다.
실제로 보면 충격 받지 않을 사람이 없다.
백인들은 흑인들을 마치 위험한 바이러스취급을 한다.
흑인은 백인에게 접근금지라는 표식이 부착된 위험물이다.
이걸 한국인들도 그대로 무조건 따라한다.
가능한한 흑인과의 접촉만 피하면 안전하다고 행동수칙을 정한다.
불안을 피하기 위해서 공포의 대상을 가상적으로 설정하고, 그런 공포의 대상에 대한 행동수칙을 정하고 그것을 따르기만 하면 나는 안전하다,라는 허구적 이데올로기가 작동하는 방식을 금방 내면화한다.
이런 이데올로기에 부딪혔다.
그곳에서의 생활에 모두가 반대했다.
할 수 없이 백인들만이 사는 최고급주택가와 호텔이 밀집한 지역에 거주지를 다시 물색했다.
어렵게 sea point라는 곳에 아파트 한채를 얻었다.
하루에 30,000원을 지불했다.
이곳에서의 생활은 영국에서의 생활과 동일했다.
음식이나 언어와 같은 기본적 라이프스타일이 그렇게 짜여져 있었다.
다른 점은 영국과는 달리 질 좋은 포도주를 엄청싸게 마실 수 있다는거다.
전세계적으로 기후가 좋은 지역,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 등과 같은 지중해연안 국가들, 칠레, 남미등과 같은 나라들은 모두 포도주로 유명하다.
기후가 좋으면 포도주로 유명한 곳이라고 생각하면 거의 일치한다.
거의 날마다 포도주 한병씩 마셔댔다.
(멀리서 잡은 테이블 마운틴 경치)
케이프타운은 조버그 더번 프리토리아 등과 함께 남아공의 대표적인 도시이다.
인구가 400만명 정도 되는 아름다운 항구 도시다.
남아공에 한달 조금 못되게 체류하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이곳에서 지냈다.
주택도 임대하고, 어비스라는 다국적 랜트카 업체에서 일제 빵빵한 자가용도 렌트하고 날마다 유명한 곳을 찾아 다녔다.
제일 선명한 기억은 희망봉 해안선을 따라서 끝도 없이 꿈결처럼 펼쳐진 자연이다.
그림 같은 아름다운 해변과 해수욕장들, 남극의 빙하에서 금방 씻겨온 먼지 하나 없는 깨끗한 공기, 너무 투명해서 피부가 베일것 같은 햇빛, 처음 본 진짜 녹색, 숲속 여기저기에 핀 야생화들은 너무 아름다워서 말을 잃게 만들었다.
이곳 저곳 돌아 다니면서 낙타도 타고, 해변가에서 고래도 보고, 섬위에 고물고물 모여 있는 팽귄과 물개들도 보고 신나게 돌아 다녔다.
케이프타운의 명물중의 하나는 테이블 마운틴이다.
글자 그대로 윗 부분이 탁자 모양으로 평평하고, 정상 까지는 깍아지른 절벽이다.
세계에서 제일 길다는 케이블카를 타고 정상에 도달했다.
케이블카 안에서 보니 그 절벽을 걸어서 올라가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진즉에 알았더라면 나도 케이블카 같은건 타지 않았을 거다.
정상에 올라가니 넓은 평원이 펼쳐졌다.
전세계에서 가장 다양한 식생분포가 있는 곳이란다.
정상 여기저기를 실컷 돌아다녔다.
기억에 선명한 것은 정상의 멋진 평원 경치뿐만이 아니라, 대서양과 인도양의 바닷 바람이 절벽에 부딪히면 상승기류가 생기는데 그걸 타고 정지상태로 비행을 즐기는 새들 이었다.
케이프타운 바로 밑 희망봉을 기점으로 대서양과 인도양으로 나눈다.
남극에 가까이 있고, 무더운 아프리카 대륙의 맨 남쪽에 위치한 지리적 조건 때문에 케이프타운은 다양한 식물이나 동물 분포를 이룬다.
동물을 예로 들자면 더운 사막의 낙타에서부터 아프리카 대륙의 기린 남극 대륙의 팽귄까지 함께 살아간다.
(커스텐보쉬 보태니컬 식물원. 기니파올로(야생닭)가 한가롭게 놀고 있음. 사람을 절대로 무서워하지 않음)
이곳의 생물 다양성을 기반으로 테이블마운틴 산자락에 엄청큰 식물원이 있다.
여유있게 돌아 볼려면 최소한 이틀은 잡아야할 것 같았다.
식물원 구경도 재미 있지만, 식물원 여기 저기에 아프리카 고유의 민속생활을 재현해 놓은 것들도 빼 놓을 수 없는 귀중한 체험이 될 수 있다.
식물원 구경의 맨 끝자락에 볼 수 있는 조각공원도 소중한 경험이었다.
아프리카 미술의 색다른 신비함을 원초적으로 느낄 수 있는 많은 조각작품들을 볼 수 있다.
(식물원 길가에 설치해 놓은 조각상. 식물원 맨 끝쪽에 설치해 놓은 조각공원이 따로 있음. 그곳에는 진짜 아프리카적 정조가 느켜지는 작품들이 있다. 가이드들은 식물원 전체를 두어시간 정도로 뚝딱 헤치워 버린다.)
케이프타운에서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경험은 아무래도 희망봉 트레킹이 될 것 같다.
나는 아쉽게도 차로 씽 둘러보고 왔다.
많은 젊은이 들이 자전거로 야영을 하면서 희망봉을 탐사하는 모습이 부러웠다.
그들의 젊음에, 그들의 여유로움에 마냥 부러움이 느껴졌다.
(케이프타운 바로 밑의 희망봉. 면단위 보다 더 크고 도 단위 보다는 적은 군단위 지역을 두세개 정도 합쳐놓은 면적. 자연보호구역으로 묶여 있고, 당시에는 허가를 받아서 야영을 하면서 트레킹이 가능하다고 들었다.)
케이프타운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다른 멋진장소는 water front지역이다.
아름다운 바다와 인간 문명이 빛어낸 공간이다.
아라파트헤이트시절 대표적인 흑인출입금지구역이다.
이곳은 아프리카임에도 물가가 너무 비싸다.
부유한 백인들 돈쓰는 장소라고 생각하면 정확하다.
여기저기 길거리 공연도 구경할 수 있고, 가끔씩 박제화 되었지만 아프리카 민속 공연도 구경할 수 있다.
케이프타운에서 해야할 또 다른 일은 테이블마운틴 중턱 전망좋은 곳에서 석양을 구경하는 일이다.
유럽놈들은 단체로 맥주코크가 달린 버스를 타고와서 술먹으며 석양을 즐기고 있었다.
케이프타운에서 희망봉에 펼쳐진 해변은 너무 아름다워서 말로 표현할 방법이 없다.
가끔씩 그런 해변에가서 아이들이 재미있게 해수욕하곤 했다.
재미있는 것은 해변 얕은 바닷속 바위에 전복이 덕지덕지 붙어있다는거다.
우리것과 종이 좀 다른것 같기는한데 분명한 전복이다.
이걸 따다가 까먹는것도 재미있는 체험이다.
3. 아프리카의 밤
(가든 루트가는 길에 이런 풍경이 하루종일 계속된다)
케이프타운에서 서쪽 해안선을 따라 여행하는걸 가든 루트코스를 여행한다고 말한다.
케이프타운에 머물면서 한국인 다른 가족과 함께 이곳을 따라 여행한 적이 있다.
가이드와 봉고차 운전수로 따라 붙은 공항에서 만났던 게스트하우스 주인이 초행길이었다.
모두가 초행길이기는 마찬가지 였다.
그러니 여행이 우발적 상황에 노출될 수 밖에 없었다.
그 과정에서 이런저런 우여곡절을 거쳤고, 남아공 여행에서 가장 극적인 경험을하게 되었다.
그것은 길을 헤메다가 우연히 마주한 아프리카 밤하늘이다.
위치도 제대로 파악되지 않는 깜깜한 밤중에 문득 창밖으로 밤하늘이 보였다.
차를 세우고 밤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밤하늘이 아니라 불 꽃놀이 하는 하늘이었다.
황홀하다는 말은 아마 아프리카 밤하늘의 찬란함을 두고 하는게 아닐까라고 생각한다.
그 광경이 잊혀지지 않아서 나중에 남아공의 동해안 사막지형을 한밤중에 운전하는 여행을 하기도 했다.
처음의 그 감동은 아니었지만 그 밤하늘의 별빛을 잊을 수는 없다.
cf) 아프리카의 밤 하늘은 에니메이션 영화 '마다가스카르'에 잘 표현되어 있다.
4. 남아공의 동해안
남아공의 동해안을 따라서 나마콰랜드라는 곳까지 2박3일 정도의 여행을 했다.
나마콰랜드는 노던 캐이프주에 속하는데 사막지형에 가갑다.
남아공은 9개의 주로 이루어진 국가인데 1개 주가 남한만큼의 크기라고 생각해야할 것 같다.
나마콰랜드는 아름다운 꽃으로 유명하다.
초봄에 사막 평원에 온갖 꽃들이 만발하니 우리나라의 여름쯤에 이곳을 방문해야 한다.
내가 있던 시기는 우리나라의 한겨울이니 남반구인 남아공은 한여름이다.
밎밎한 사막지형만 지속됐다.
어디에서도 꽃을 발견할 수 없었다.
실컷 운전만하고 다녔다.
나마콰랜드 롯지에서 하룻밤을 묶었고, 중간에 하룻밤을 묶었다.
깜깜한 밤중에 사막한 가운데 차를 세우고 차량의 모든 등불을 끄고, 인공적인 조명하나 없이 별들만 찬란한 하늘을 길 바닦에 누워 하염없이 보곤했다.
5. 남아공의 언어
영어를 주로 사용한다.
공용어가 영어고, 아프리칸스라는 언어도 많이 사용된다.
워낙 부족이 많고, 언어가 다르니 초기 유럽 식민주의자들이 통치의 편의를 위해서 만든게 아프리칸스어라고 한다.
식민세력이 영국으로 기울면서 영어가 아프리칸스를 누르고 압도적인 언어가 되었을거다.
6. 남아공에 대한 유럽의 착취
(해변가에 이런 아이들이 노는 장면을 흔하게 볼 수 있다. 외국인을 보면 먹을걸 달라고 요구한다. 구김살은 없다. 이런 아이들이 밝게 자라 아프리카의 미래가 되어야 한다. 현실은 총을 든 전사로 성장하는 경우가 더 많다. 실제로 중부 아프리카의 내전은 소년병사들이 주력 부대라고 한다. 그 모든 종족간 갈등의 결과로서 내전의 뿌리를 거슬러 추척하면 유럽의 식민정책이 나온다. 남아공은 부족들의 자치를 적극 허용함으로서 부족간의 갈등 또는 인종간의 갈등을 성공적으로 관리한다고 한다. 이런 정책적 지향이나 결과를 '무지개 국가'라는 말로 표현한다.)
이 천혜의 땅을 처음 식민개발한 것은 네덜란드인 들이다.
나중에 들어온 영국 세력이 커지면서 영국과 네덜란드가 패권을 놓고 전쟁을 벌였다.
그게 보어전쟁이다.
아프리칸스를 쓰는 사람은 네덜란드계라고 생각하면 된다.
남아공에는 다양한 부족이 살았는데, 우리에게 친숙한 부족이 부쉬맨이다.
영어로 부쉬는 숲을 의미하니 산에서 사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아프리카 남부 지방에 주로 이런 부쉬맨들이 살았다고 한다.
물론 다른 부족들도 있었겠지만 유럽인들이 들어 오기전까지 나름의 아프리카적 삶을 유지한채로 수천년을 살아온 남아공의 원주인이 이들일 것이다.
우중충하고, 춥고, 물도 안좋고, 척박한 땅의 유럽인들이 이 천국을 발견하고 이주해오기 시작하면서 숲을 밀어내고 농지를 만들어 상업적 농업을 시작했다.
개발은 가속화 되고, 도시도 발달하기 시작했다.
그 즈음 어딘가에서 자연보호의 필요성이 대두됐을 테고, 아직 개발되지 않은 자연은 그대로 국립공원으로 묶어 사람의 접근을 차단하였다.
부쉬맨들은 점점 삶의 터전을 빼았겻고, 최종적으로 도시의 변두리로 몰려들었다.
백인들과 부쉬맨들이 섞여살면서 백인들은 흑인들과 삶의 공간을 철저하게 분리하기를 원했다.
그게 아라파트헤이트라는 정책이다.
백인출입구역이라고 정해진 곳을 흑인이 접근하면 불법행위로 처벌하는 정책이다.
이게 20여년 전까지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버젓히 시행되고 있었다.
유명한 넬슨만델라가 이걸 반대해서 무장투쟁을 벌였다.
지금은 아라파트헤이트 정책이 불법화 되었지만 여전히 백인이 궁전 같은 집을짓고, 흑인들은 그런 집의 하인들로 생활하는 삶은 여전하다.
내가 처음 묶었던 한국인 게스트하우스도 흑인 하인을 3명이나 두고, 청소부터 잔디관리까지 모두 그들 손에 의지하고 있었다.
아마 하루에 겨우 2-3천원의 임금을 지불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재미있는 희극은 아라파트헤이트시절 일본인은 법률적으로 백인으로 분류되었단다.
소수의 한국인도 당연히 일본인으로 분류되니 백인이었다는 거다.
그 게스트하우스 주인이 아라파트헤이트 시절에는 정말 살기좋았다고 하더라,고 말하면서 꼭 백인처럼 그 시절을 좋았던 시절로 추억하고 있었다.
7. 남아공의 한국인들
2003년 당시 남아공을 방문하는 한국인들은 두 부류였다.
영국이나 미국에 비해 저렴한 어학연수를 온 젊은이들이 많았다.
젊어서 그런지 비교적 생활도 검소하고 남아공 사회에 잘 적응하고 있었다.
다른 하나는 남아공에서 사업을 시작하려는 신천지를 찾아온 부류였다.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난 사업아이템을 들고 찾아온 사람들과 이미 현지에서 뿌리를 내린 한국인들이었다.
이들의 생각은 단순했다.
남아공이 사업하기 좋단다.
이유는 뇌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거였다.
박정희 개발시대의 경험을 축적한 사람들이었다.
뇌물로 공무원들을 구워 삶아서 그 보다 수십배 또는 수백배의 이익을 취할 수 있는 기회를 찾아왔다고 자랑삼아 말하는걸 여러번 들었다.
아마 이 사람들이 지금쯤 중국이나 베트남 또는 캄보디아 같은 곳에서 맹활약하고 있지 있을까?라고 상상해 본다.
이들은 흑인들에 대해서 백인들과 비슷한 사고를 가지고 있다.
유럽출신 백인들의 흑인에 대한 이해를 아무런 반성 없이 그대로 내면화해서 가지고 있다.
8. 남아공의 한국인 개척교회
공항에서 만났던 게스트하우스 주인이 한달에 한번씩 흑인마을의 교회를 간다기에 어렵게 부탁해서 따라갔다.
처음으로 들어가 본 흑인마을 이었다.
백인 마을이 깨끗한 천국이라면 이곳은 지옥 그 자체였다.
구불 구불 미로의 길, 포장되지 않은 도로, 아무렇게나 넝마 같은것들로 얼기설기 지어 놓은 집, 70년대의 한강변 판자촌보다 더 심하면 심했지 결코 덜하지 않았다.
그곳 어딘가에 한국 교회에서 재정지원을 하는 교회가 있었다.
한국출신 목사가 영어로 설교하고 있었다.
흑인들은 연신 에이맨! 에이맨!이라고 외치고 있었다.
70년대 한강변 판자촌 동네 교회가 거기 그대로 있었다.
게스트하우스 주인은 불상한 흑인들을 위해서 봉사하고 있다는 자족감에 흠뻑 빠져 있었고, 목사는 불쌍한 흑인들에게 하느님의 축복을 전달한다는 뿌듯함을 느끼는듯 했다.
고단한 현실을 임시적으로 위로해 주는 이게 진짜로 흑인들을 위한 일일까?
나도 그런 모습을 그저 관찰의 대상으로서만 대하니 그들과 하나도 다르지는 않겠지만, 씁쓸한 뒷 맛은 어쩔 수 없었다.
교회예배 도중 흑인 아줌마들의 성가합창이 있었다.
흑인들의 가창력에 대해서 익히 들어온 바지만 실제로 그들의 노래를 들으니 영혼이 흔들리는 감동이 일었다.
더욱 특별한 경험은 성가 합창에 드럼연주가 합주 되는데, 이 드러머가 정식 음악교육을 전혀 받은바가없단다.
그냥 무의식적으로 드럼을 두들기는거다.
그 드럼소리가 아프리카 초원 깊은 숲속 카니발의 선율을 그대로 전하는 듯 했다.
충격 그 자체였다.
인간의 무의식은 집단의 과거 경험을 모두 축척한 총합이라는 말을 긍정하지 않을 수 없는 충격적 경험이었다.
드럼에 문외한이지만 그는 이 세상의 그 어떤 도러머보다 더 기막힌 연주를 무의식속에서 하고 있었다.
9. 남아공의 계급
다양한 부족의 흑인이 최하위계층이다.
결국 백인들의 부이지만 평균국민소득이 3000달러 정도다.
굶어 죽지 않기 위해서 중부아프리카에서 내려온 다양한 종족의 흑인들도 또다른 극빈층이다.
중산층은 주로 인도계 흑인들이다.
오래전부터 인도쪽에서 아프리카로 이주민들이 흘러들어 왔다고 보아야한다.
이들이 기술 관료적 중산층을 구성하고 있다.
최상층은 백인들이다.
유럽의 거의 모든 국가에서 사람들이 이주해 왔다고 보아야 한다.
프랑스 마을도 있고, 독일냄새 물씬 풍기는 지역도 있고, 별의별 유럽 냄새가 안나는 곳이 없다.
그중 초기 이민자들인 네덜란드 계통의 백인들이 가장 극우적인 인종차별정책의 지지자들이라고 보아야한다.
무장투쟁을 주도했던 아프리카민족회의(ANC)가 백인들과 정치협상을 통해서 평화적으로 정권을 이양 받은게 20여년 전이다.
그런 결과의 초대 대통령이 만델라다.
흑인들이 정치권력을 장악한건 분명하지만, 백인지배체제는 변함 없다고 보아야 한다.
cf) 남아공의 아라파트헤이트 정책을 다룬 영화로 'power of one'이라는 영화가 있다. 나는 정작 이 영화를 남아공을 방문한 다음해에 봤다. 남아공 방문전에 봤더라면 더 값진 여행을 했을텐데라고 후회하게 만든 영화다. 오래된 영화라 비디오자료로 찾아야할 것 같다.
최근에 개봉관에 걸렸던 아프리카 관련 영화로 '블러드 다이아몬드'가 있다. 이 영화도 유럽인의 식민주의적 사고에 오염되지 않은 비교적 객관적인 시선으로 아프리카를 그린다. 하지만 할리우드적 상업주의 스토리는 여전하다. 할리우드 영화의 기본골격인 가족주의와 낭만적 사랑을 적절히 범벅해서 관객들의 기호를 맘껏 충족시켜준다. 그런점에서 현실 강화적인 보수적 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것만 벗겨 내면 아프리카 현실을 어느 영화보다 객관적으로 그리고 있다.
아프리카 영화의 고전으로 취급하는 로버트레드포드와 메릴스트립의 '아웃오브아프리카'는 철저한 유럽 식민주의자들의 시선이다. 아마 아프리카 본토인들이 이 영화를 본다면 분통이터져 죽을거다.
2003년도 겨울에 가족들 전부 끌고 남아프리카공화국에 갔다.
당시만해도 아프리카에 대한 일반인들의 상식이 전무한 시절이다.
여행은 무조건 선진국으로가서 그들이 얼마나 잘 사는지 구경하고 오는것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우연히 알게된 누군가가 아프리카 여행을 권했다.
진짜 자연을 만날 수 있고, 진짜 사람을 만날 수 있다,고 추천했다.
그말만 믿고, 서점에 들러 허접한 아프리카 여행관련 서적 달랑 두권사고(아직도 변변한게 없다), 아프리카 현지 한국인 게스트하우스 전화번호 인터넷을 통해서 따고, 여행사 수소문해서 싼 비행기표 구하고, 번갯불에 꽁 볶아먹듯 서둘러 출발했다.
아이들도, ex배우자도 어리 벙벙한 상태였다.
이번에도 항공사로 캐세이퍼시픽이 걸렸다.
국내는 아프리카를 취항하는 항공사가 없었고, 아시아에서 남아공에 취항하는 노선은 홍콩의 캐세이가 거의 유일하다시피 했다.
비행경로는 인천-첵랍콥-요하네스버그(현지인들은 '조버그'라고 발음한다)-케이프타운 이다.
최소한 48시간 가까이 비행기안에서 여기저기 공항 대합실에서 시간을 보내야 했다.
1. 부정부패
아무리 세밀하게 준비해도 여행에서는 예기치 못한 우연적 사건들에 부딪힌다.
처음 발생한건 조버그 국제공항이었다.
입국심사대에서 나에게 시비를 걸었다.
내 여권만 보류시키고 나머지 가족들은 다 통과시켰다.
어이가 없었다.
어쩌나보자고 버텼다.
같은 비행기 타고온 모든 승객들이 다 빠져나가고 나만 남았다.
돈을 요구하는 눈치가 역력했다.
동양인이 귀하니 현지 물정에 어둠고 만만한 밥이라고 생각했음에 틀림없었다.
심호흡하고 왜 내 여권만 보류하냐고 항의했다.
사실은 약간 쫄아있었다.
여권을 가지고 사무실 안쪽으로 들어갔다 나오더니 금방 태도가 돌변해서, 친절하게 웃으면서 입국허가 도장을 꽉 찍어서 건네주었다.
공항 터미널로 나와서 짐 찾으러 가서, 케이프타운 비행기표를 보여주면서, 어디로 가야하느냐고 물으니, 공항 관계자가 시간이 늦었다고 손수 직원들을 재촉해서 내 짐을 따로 빼내서, 자기가 질질 끌고 냅다 뛰어갔다.
속으로 참 친절한 직원이라고 생각했다.
나도 아이들도 배우자도 함께 그를 따라 조버그 국제공항을 빠져나와 국내선 공항으로 뛰어갔다.
겨우 탑승 시간에 맞춰서 국내선 공항에 도착하니, 이 친절한 공항 직원이 너무너무 친절하게 생글생글 웃으면서 'give me something'이라고 말했다.
도저히 거절할 수 없었다.
영국에서 쓰다만 파운드화가 있어서 '20파운드 지폐' 한장을 건넸다.
나중에 확인해 보니 어마어마하게 큰 돈이었다.
부정부패가 일상에 깊이 스며들어 있는 모습을 여러번 확인해야 했다.
2. 캐이프타운
(케이프타운 다운타운. 중심가의 초고층 빌딩 광고판을 대충 한국기업들이 차지하고 있다)
케이프타운에 도착하니 미리연락해둔 한국인 게스트하우스 운영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집에서 3일정도 머물렀다.
하루에 숙박비와 Guide 비용으로 200달러를 요구했다.
처음부터 누굴 따라다닐 계획도 아니었고, 그렇게 비싸게 돈을 퍼주는 것도 아까웠다.
기거할 집을 알아보니 금방 싼집이 나왔다.
하루에 6,000원 정도면 가족 모두가 지낼 수 있었다.
거기다 주인이 자기차도 싸게 렌트해 준다고 제안했다.
문제는 그 지역이 백인과 흑인주거지역의 경계지점이었다는 것이다.
남아공은 80%이상의 흑인과 20%이하의 백인이 철저히 분리된 생활을 한다.
소수의 백인이 국토의 전체를 차지하고 있고, 다수의 흑인이 점점이 국토의 백인점령지 사이사이에 구더기처럼 밀집해 살고 있었다.
실제로 보면 충격 받지 않을 사람이 없다.
백인들은 흑인들을 마치 위험한 바이러스취급을 한다.
흑인은 백인에게 접근금지라는 표식이 부착된 위험물이다.
이걸 한국인들도 그대로 무조건 따라한다.
가능한한 흑인과의 접촉만 피하면 안전하다고 행동수칙을 정한다.
불안을 피하기 위해서 공포의 대상을 가상적으로 설정하고, 그런 공포의 대상에 대한 행동수칙을 정하고 그것을 따르기만 하면 나는 안전하다,라는 허구적 이데올로기가 작동하는 방식을 금방 내면화한다.
이런 이데올로기에 부딪혔다.
그곳에서의 생활에 모두가 반대했다.
할 수 없이 백인들만이 사는 최고급주택가와 호텔이 밀집한 지역에 거주지를 다시 물색했다.
어렵게 sea point라는 곳에 아파트 한채를 얻었다.
하루에 30,000원을 지불했다.
이곳에서의 생활은 영국에서의 생활과 동일했다.
음식이나 언어와 같은 기본적 라이프스타일이 그렇게 짜여져 있었다.
다른 점은 영국과는 달리 질 좋은 포도주를 엄청싸게 마실 수 있다는거다.
전세계적으로 기후가 좋은 지역,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 등과 같은 지중해연안 국가들, 칠레, 남미등과 같은 나라들은 모두 포도주로 유명하다.
기후가 좋으면 포도주로 유명한 곳이라고 생각하면 거의 일치한다.
거의 날마다 포도주 한병씩 마셔댔다.
(멀리서 잡은 테이블 마운틴 경치)
케이프타운은 조버그 더번 프리토리아 등과 함께 남아공의 대표적인 도시이다.
인구가 400만명 정도 되는 아름다운 항구 도시다.
남아공에 한달 조금 못되게 체류하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이곳에서 지냈다.
주택도 임대하고, 어비스라는 다국적 랜트카 업체에서 일제 빵빵한 자가용도 렌트하고 날마다 유명한 곳을 찾아 다녔다.
제일 선명한 기억은 희망봉 해안선을 따라서 끝도 없이 꿈결처럼 펼쳐진 자연이다.
그림 같은 아름다운 해변과 해수욕장들, 남극의 빙하에서 금방 씻겨온 먼지 하나 없는 깨끗한 공기, 너무 투명해서 피부가 베일것 같은 햇빛, 처음 본 진짜 녹색, 숲속 여기저기에 핀 야생화들은 너무 아름다워서 말을 잃게 만들었다.
이곳 저곳 돌아 다니면서 낙타도 타고, 해변가에서 고래도 보고, 섬위에 고물고물 모여 있는 팽귄과 물개들도 보고 신나게 돌아 다녔다.
케이프타운의 명물중의 하나는 테이블 마운틴이다.
글자 그대로 윗 부분이 탁자 모양으로 평평하고, 정상 까지는 깍아지른 절벽이다.
세계에서 제일 길다는 케이블카를 타고 정상에 도달했다.
케이블카 안에서 보니 그 절벽을 걸어서 올라가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진즉에 알았더라면 나도 케이블카 같은건 타지 않았을 거다.
정상에 올라가니 넓은 평원이 펼쳐졌다.
전세계에서 가장 다양한 식생분포가 있는 곳이란다.
정상 여기저기를 실컷 돌아다녔다.
기억에 선명한 것은 정상의 멋진 평원 경치뿐만이 아니라, 대서양과 인도양의 바닷 바람이 절벽에 부딪히면 상승기류가 생기는데 그걸 타고 정지상태로 비행을 즐기는 새들 이었다.
케이프타운 바로 밑 희망봉을 기점으로 대서양과 인도양으로 나눈다.
남극에 가까이 있고, 무더운 아프리카 대륙의 맨 남쪽에 위치한 지리적 조건 때문에 케이프타운은 다양한 식물이나 동물 분포를 이룬다.
동물을 예로 들자면 더운 사막의 낙타에서부터 아프리카 대륙의 기린 남극 대륙의 팽귄까지 함께 살아간다.
(커스텐보쉬 보태니컬 식물원. 기니파올로(야생닭)가 한가롭게 놀고 있음. 사람을 절대로 무서워하지 않음)
이곳의 생물 다양성을 기반으로 테이블마운틴 산자락에 엄청큰 식물원이 있다.
여유있게 돌아 볼려면 최소한 이틀은 잡아야할 것 같았다.
식물원 구경도 재미 있지만, 식물원 여기 저기에 아프리카 고유의 민속생활을 재현해 놓은 것들도 빼 놓을 수 없는 귀중한 체험이 될 수 있다.
식물원 구경의 맨 끝자락에 볼 수 있는 조각공원도 소중한 경험이었다.
아프리카 미술의 색다른 신비함을 원초적으로 느낄 수 있는 많은 조각작품들을 볼 수 있다.
(식물원 길가에 설치해 놓은 조각상. 식물원 맨 끝쪽에 설치해 놓은 조각공원이 따로 있음. 그곳에는 진짜 아프리카적 정조가 느켜지는 작품들이 있다. 가이드들은 식물원 전체를 두어시간 정도로 뚝딱 헤치워 버린다.)
케이프타운에서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경험은 아무래도 희망봉 트레킹이 될 것 같다.
나는 아쉽게도 차로 씽 둘러보고 왔다.
많은 젊은이 들이 자전거로 야영을 하면서 희망봉을 탐사하는 모습이 부러웠다.
그들의 젊음에, 그들의 여유로움에 마냥 부러움이 느껴졌다.
(케이프타운 바로 밑의 희망봉. 면단위 보다 더 크고 도 단위 보다는 적은 군단위 지역을 두세개 정도 합쳐놓은 면적. 자연보호구역으로 묶여 있고, 당시에는 허가를 받아서 야영을 하면서 트레킹이 가능하다고 들었다.)
케이프타운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다른 멋진장소는 water front지역이다.
아름다운 바다와 인간 문명이 빛어낸 공간이다.
아라파트헤이트시절 대표적인 흑인출입금지구역이다.
이곳은 아프리카임에도 물가가 너무 비싸다.
부유한 백인들 돈쓰는 장소라고 생각하면 정확하다.
여기저기 길거리 공연도 구경할 수 있고, 가끔씩 박제화 되었지만 아프리카 민속 공연도 구경할 수 있다.
(워터프론트의 해변 식당가)
케이프타운에서 해야할 또 다른 일은 테이블마운틴 중턱 전망좋은 곳에서 석양을 구경하는 일이다.
유럽놈들은 단체로 맥주코크가 달린 버스를 타고와서 술먹으며 석양을 즐기고 있었다.
케이프타운에서 희망봉에 펼쳐진 해변은 너무 아름다워서 말로 표현할 방법이 없다.
가끔씩 그런 해변에가서 아이들이 재미있게 해수욕하곤 했다.
재미있는 것은 해변 얕은 바닷속 바위에 전복이 덕지덕지 붙어있다는거다.
우리것과 종이 좀 다른것 같기는한데 분명한 전복이다.
이걸 따다가 까먹는것도 재미있는 체험이다.
3. 아프리카의 밤
(가든 루트가는 길에 이런 풍경이 하루종일 계속된다)
케이프타운에서 서쪽 해안선을 따라 여행하는걸 가든 루트코스를 여행한다고 말한다.
케이프타운에 머물면서 한국인 다른 가족과 함께 이곳을 따라 여행한 적이 있다.
가이드와 봉고차 운전수로 따라 붙은 공항에서 만났던 게스트하우스 주인이 초행길이었다.
모두가 초행길이기는 마찬가지 였다.
그러니 여행이 우발적 상황에 노출될 수 밖에 없었다.
그 과정에서 이런저런 우여곡절을 거쳤고, 남아공 여행에서 가장 극적인 경험을하게 되었다.
그것은 길을 헤메다가 우연히 마주한 아프리카 밤하늘이다.
위치도 제대로 파악되지 않는 깜깜한 밤중에 문득 창밖으로 밤하늘이 보였다.
차를 세우고 밤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밤하늘이 아니라 불 꽃놀이 하는 하늘이었다.
황홀하다는 말은 아마 아프리카 밤하늘의 찬란함을 두고 하는게 아닐까라고 생각한다.
그 광경이 잊혀지지 않아서 나중에 남아공의 동해안 사막지형을 한밤중에 운전하는 여행을 하기도 했다.
처음의 그 감동은 아니었지만 그 밤하늘의 별빛을 잊을 수는 없다.
cf) 아프리카의 밤 하늘은 에니메이션 영화 '마다가스카르'에 잘 표현되어 있다.
4. 남아공의 동해안
남아공의 동해안을 따라서 나마콰랜드라는 곳까지 2박3일 정도의 여행을 했다.
나마콰랜드는 노던 캐이프주에 속하는데 사막지형에 가갑다.
남아공은 9개의 주로 이루어진 국가인데 1개 주가 남한만큼의 크기라고 생각해야할 것 같다.
나마콰랜드는 아름다운 꽃으로 유명하다.
초봄에 사막 평원에 온갖 꽃들이 만발하니 우리나라의 여름쯤에 이곳을 방문해야 한다.
내가 있던 시기는 우리나라의 한겨울이니 남반구인 남아공은 한여름이다.
밎밎한 사막지형만 지속됐다.
어디에서도 꽃을 발견할 수 없었다.
실컷 운전만하고 다녔다.
나마콰랜드 롯지에서 하룻밤을 묶었고, 중간에 하룻밤을 묶었다.
깜깜한 밤중에 사막한 가운데 차를 세우고 차량의 모든 등불을 끄고, 인공적인 조명하나 없이 별들만 찬란한 하늘을 길 바닦에 누워 하염없이 보곤했다.
5. 남아공의 언어
영어를 주로 사용한다.
공용어가 영어고, 아프리칸스라는 언어도 많이 사용된다.
워낙 부족이 많고, 언어가 다르니 초기 유럽 식민주의자들이 통치의 편의를 위해서 만든게 아프리칸스어라고 한다.
식민세력이 영국으로 기울면서 영어가 아프리칸스를 누르고 압도적인 언어가 되었을거다.
6. 남아공에 대한 유럽의 착취
(해변가에 이런 아이들이 노는 장면을 흔하게 볼 수 있다. 외국인을 보면 먹을걸 달라고 요구한다. 구김살은 없다. 이런 아이들이 밝게 자라 아프리카의 미래가 되어야 한다. 현실은 총을 든 전사로 성장하는 경우가 더 많다. 실제로 중부 아프리카의 내전은 소년병사들이 주력 부대라고 한다. 그 모든 종족간 갈등의 결과로서 내전의 뿌리를 거슬러 추척하면 유럽의 식민정책이 나온다. 남아공은 부족들의 자치를 적극 허용함으로서 부족간의 갈등 또는 인종간의 갈등을 성공적으로 관리한다고 한다. 이런 정책적 지향이나 결과를 '무지개 국가'라는 말로 표현한다.)
이 천혜의 땅을 처음 식민개발한 것은 네덜란드인 들이다.
나중에 들어온 영국 세력이 커지면서 영국과 네덜란드가 패권을 놓고 전쟁을 벌였다.
그게 보어전쟁이다.
아프리칸스를 쓰는 사람은 네덜란드계라고 생각하면 된다.
남아공에는 다양한 부족이 살았는데, 우리에게 친숙한 부족이 부쉬맨이다.
영어로 부쉬는 숲을 의미하니 산에서 사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아프리카 남부 지방에 주로 이런 부쉬맨들이 살았다고 한다.
물론 다른 부족들도 있었겠지만 유럽인들이 들어 오기전까지 나름의 아프리카적 삶을 유지한채로 수천년을 살아온 남아공의 원주인이 이들일 것이다.
우중충하고, 춥고, 물도 안좋고, 척박한 땅의 유럽인들이 이 천국을 발견하고 이주해오기 시작하면서 숲을 밀어내고 농지를 만들어 상업적 농업을 시작했다.
개발은 가속화 되고, 도시도 발달하기 시작했다.
그 즈음 어딘가에서 자연보호의 필요성이 대두됐을 테고, 아직 개발되지 않은 자연은 그대로 국립공원으로 묶어 사람의 접근을 차단하였다.
부쉬맨들은 점점 삶의 터전을 빼았겻고, 최종적으로 도시의 변두리로 몰려들었다.
백인들과 부쉬맨들이 섞여살면서 백인들은 흑인들과 삶의 공간을 철저하게 분리하기를 원했다.
그게 아라파트헤이트라는 정책이다.
백인출입구역이라고 정해진 곳을 흑인이 접근하면 불법행위로 처벌하는 정책이다.
이게 20여년 전까지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버젓히 시행되고 있었다.
유명한 넬슨만델라가 이걸 반대해서 무장투쟁을 벌였다.
지금은 아라파트헤이트 정책이 불법화 되었지만 여전히 백인이 궁전 같은 집을짓고, 흑인들은 그런 집의 하인들로 생활하는 삶은 여전하다.
내가 처음 묶었던 한국인 게스트하우스도 흑인 하인을 3명이나 두고, 청소부터 잔디관리까지 모두 그들 손에 의지하고 있었다.
아마 하루에 겨우 2-3천원의 임금을 지불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재미있는 희극은 아라파트헤이트시절 일본인은 법률적으로 백인으로 분류되었단다.
소수의 한국인도 당연히 일본인으로 분류되니 백인이었다는 거다.
그 게스트하우스 주인이 아라파트헤이트 시절에는 정말 살기좋았다고 하더라,고 말하면서 꼭 백인처럼 그 시절을 좋았던 시절로 추억하고 있었다.
7. 남아공의 한국인들
2003년 당시 남아공을 방문하는 한국인들은 두 부류였다.
영국이나 미국에 비해 저렴한 어학연수를 온 젊은이들이 많았다.
젊어서 그런지 비교적 생활도 검소하고 남아공 사회에 잘 적응하고 있었다.
다른 하나는 남아공에서 사업을 시작하려는 신천지를 찾아온 부류였다.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난 사업아이템을 들고 찾아온 사람들과 이미 현지에서 뿌리를 내린 한국인들이었다.
이들의 생각은 단순했다.
남아공이 사업하기 좋단다.
이유는 뇌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거였다.
박정희 개발시대의 경험을 축적한 사람들이었다.
뇌물로 공무원들을 구워 삶아서 그 보다 수십배 또는 수백배의 이익을 취할 수 있는 기회를 찾아왔다고 자랑삼아 말하는걸 여러번 들었다.
아마 이 사람들이 지금쯤 중국이나 베트남 또는 캄보디아 같은 곳에서 맹활약하고 있지 있을까?라고 상상해 본다.
이들은 흑인들에 대해서 백인들과 비슷한 사고를 가지고 있다.
유럽출신 백인들의 흑인에 대한 이해를 아무런 반성 없이 그대로 내면화해서 가지고 있다.
8. 남아공의 한국인 개척교회
공항에서 만났던 게스트하우스 주인이 한달에 한번씩 흑인마을의 교회를 간다기에 어렵게 부탁해서 따라갔다.
처음으로 들어가 본 흑인마을 이었다.
백인 마을이 깨끗한 천국이라면 이곳은 지옥 그 자체였다.
구불 구불 미로의 길, 포장되지 않은 도로, 아무렇게나 넝마 같은것들로 얼기설기 지어 놓은 집, 70년대의 한강변 판자촌보다 더 심하면 심했지 결코 덜하지 않았다.
그곳 어딘가에 한국 교회에서 재정지원을 하는 교회가 있었다.
한국출신 목사가 영어로 설교하고 있었다.
흑인들은 연신 에이맨! 에이맨!이라고 외치고 있었다.
70년대 한강변 판자촌 동네 교회가 거기 그대로 있었다.
게스트하우스 주인은 불상한 흑인들을 위해서 봉사하고 있다는 자족감에 흠뻑 빠져 있었고, 목사는 불쌍한 흑인들에게 하느님의 축복을 전달한다는 뿌듯함을 느끼는듯 했다.
고단한 현실을 임시적으로 위로해 주는 이게 진짜로 흑인들을 위한 일일까?
나도 그런 모습을 그저 관찰의 대상으로서만 대하니 그들과 하나도 다르지는 않겠지만, 씁쓸한 뒷 맛은 어쩔 수 없었다.
교회예배 도중 흑인 아줌마들의 성가합창이 있었다.
흑인들의 가창력에 대해서 익히 들어온 바지만 실제로 그들의 노래를 들으니 영혼이 흔들리는 감동이 일었다.
더욱 특별한 경험은 성가 합창에 드럼연주가 합주 되는데, 이 드러머가 정식 음악교육을 전혀 받은바가없단다.
그냥 무의식적으로 드럼을 두들기는거다.
그 드럼소리가 아프리카 초원 깊은 숲속 카니발의 선율을 그대로 전하는 듯 했다.
충격 그 자체였다.
인간의 무의식은 집단의 과거 경험을 모두 축척한 총합이라는 말을 긍정하지 않을 수 없는 충격적 경험이었다.
드럼에 문외한이지만 그는 이 세상의 그 어떤 도러머보다 더 기막힌 연주를 무의식속에서 하고 있었다.
9. 남아공의 계급
다양한 부족의 흑인이 최하위계층이다.
결국 백인들의 부이지만 평균국민소득이 3000달러 정도다.
굶어 죽지 않기 위해서 중부아프리카에서 내려온 다양한 종족의 흑인들도 또다른 극빈층이다.
중산층은 주로 인도계 흑인들이다.
오래전부터 인도쪽에서 아프리카로 이주민들이 흘러들어 왔다고 보아야한다.
이들이 기술 관료적 중산층을 구성하고 있다.
최상층은 백인들이다.
유럽의 거의 모든 국가에서 사람들이 이주해 왔다고 보아야 한다.
프랑스 마을도 있고, 독일냄새 물씬 풍기는 지역도 있고, 별의별 유럽 냄새가 안나는 곳이 없다.
그중 초기 이민자들인 네덜란드 계통의 백인들이 가장 극우적인 인종차별정책의 지지자들이라고 보아야한다.
무장투쟁을 주도했던 아프리카민족회의(ANC)가 백인들과 정치협상을 통해서 평화적으로 정권을 이양 받은게 20여년 전이다.
그런 결과의 초대 대통령이 만델라다.
흑인들이 정치권력을 장악한건 분명하지만, 백인지배체제는 변함 없다고 보아야 한다.
cf) 남아공의 아라파트헤이트 정책을 다룬 영화로 'power of one'이라는 영화가 있다. 나는 정작 이 영화를 남아공을 방문한 다음해에 봤다. 남아공 방문전에 봤더라면 더 값진 여행을 했을텐데라고 후회하게 만든 영화다. 오래된 영화라 비디오자료로 찾아야할 것 같다.
최근에 개봉관에 걸렸던 아프리카 관련 영화로 '블러드 다이아몬드'가 있다. 이 영화도 유럽인의 식민주의적 사고에 오염되지 않은 비교적 객관적인 시선으로 아프리카를 그린다. 하지만 할리우드적 상업주의 스토리는 여전하다. 할리우드 영화의 기본골격인 가족주의와 낭만적 사랑을 적절히 범벅해서 관객들의 기호를 맘껏 충족시켜준다. 그런점에서 현실 강화적인 보수적 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것만 벗겨 내면 아프리카 현실을 어느 영화보다 객관적으로 그리고 있다.
아프리카 영화의 고전으로 취급하는 로버트레드포드와 메릴스트립의 '아웃오브아프리카'는 철저한 유럽 식민주의자들의 시선이다. 아마 아프리카 본토인들이 이 영화를 본다면 분통이터져 죽을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