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노자의 도와 자연
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
도라고 부를 수 있는 도는 참된 도가 아니다.
이름 붙일 수 있는 이름은 참된 이름이 아니다.
cf) 신영복은 노자를 해체주의적으로 읽는다.
춘추전국시대가 정리되고, 비주류였던 유학이 제자백가를 누르고 주류학문으로 받아들여 진다.
유가가 비로소 대빵이 되었다.
유학은 그 기본 성격상 서양의 사유체계와 유사하다.
인간 중심주의적이다.
인간을 중심에 놓고 인간문명의 개발과 발전을 추구한다.
이런 인간중심주의적인 관점을 뛰어넘으려는 시도가 노자의 철학이다.
'도는 도가 아니다. 이름은 이름이 아니다.'라는 언술은 유학의 인의예지를 정면으로 부정한다.
맹자가 정립한 사단인 '인의예지'가 없다는 언명과 같다.
이걸 좀더 밀고 나가면 언어에 대한 부정, 개념에 대한 부정으로 나아간다.
그렇다면 무엇이 있을까?
'도무수유 道無水有' 란다.
도는 없고 오직 물이 있을 뿐이다.
비유가 기가 막히다.
도를 초월하는 그 무엇인가 있는데, 그것이 물이란다.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고 물이 있다라고 말한다.
노자가 생각하는 것은 일종의 상대주의적 세계관이다.
앞-뒤 / 고-저 / 유-무 / 난-이 / 장-단 등이 절대적인 값으로서 주어져 있지 않다는 논리다.
단지 상대적 비교에 의해서만 그것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도가 없다는 말은 도가 항상 일정하지 않다는 말이다.
시대와 역사에 따라 다르게 규정된다는 말과 같다.
이런 인식을 따라가면 '현묘불가식玄妙不可識'이 이해가된다.
현이란 붉은색과 검은색이 합해진 색깔을 가리킨다.
붉은 색은 '있다有'는 것을 가리키는 색이고, 검은 색은 '없다無'는 것을 가리키는 색이다.
결국 인간은 '있다, 없다 / 有無 '를 알 수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있음과 없음을 초월해서 주어진 상황을 해석하고, 적절한 가치판단을 하고, 타인을 설득하고 미래를 설계하고 하는 등의 일을 어떻게 하란 말인가?
그러기 위해서는 인위人爲는 거짓(僞)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라는 거다.
天下皆知美之爲美 斯惡已 皆知善之爲善
미는 혐오스러운 것이고, 선은 위선이라는 거다.
인간이 개입한 선은 혐오스러운 것이고, 선은 위선이라는 말과 같다.
그렇다면 선과 미를 추구함에 있어 인간의 개입을 없애라는 말과 같다.
자연스럽게 그렇게 하라는 말이다.
자연스럽다라는 말은 물과 같다라고 해석 할 수 있다.
'도무수유 道無水有'
물처럼 살아라는 말과 같다.
도무수유가 해석 판단 설득 설계 등과 같은 일들의 실천방법이라는 거다.
비유와 역설의 천재 노자
빔이 쓰임이 됩니다.
쓰임새가 있기 위해서는 비어 있어야 한다.
사물의 형태(있음)에 주목하지 않고 거꾸로 그 사물의 형태가 품고 있는 빈 공간 즉 배후를 보고 있다.
그릇의 형태가 아니라 형태가 담고 있는 빈공간을 바라본다.
노자는 형태에 고정되지 않고 그것을 뛰어 넘는 훨씬 본질적인 시선을 던진다.
스스로를 신뢰하도록 : 노자의 정치론
자기조절 능력이 모두에게 있다는 것을 믿으라는 말이다.
조급하게 다그치지 말고, 기다려 주면 스스로 되어진다는 말이다.
조급하게 구는 것은 스스로를 신뢰하지 못하다는 반증이다.
cf) 아이들을 억지로 다그쳤던게 내 자신에 대한 불신의 증거다.
서툰글씨가 명필이다.
大成若缺, 其用不弊. 大盈若沖, 其用不窮.
대성약결 - 참으로 완성되어 있는 것은 어딘가 잘못 되어진 것처럼 보이나,
기용불폐 - 아무리 써도 못 쓰게 되는 일이 없으며,
대영약충 - 참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은 언뜻 비어 있는 듯 보이나
기용불궁 - 쓰고 또 써도 부족함이 없다.
大直若屈, 大巧若拙. 大辯若訥.
대직약굴 - 참으로 곧은 것은 도리어 굽은 것처럼 보이고,
대교약졸 - 참으로 잘하는 것은 어딘가 서툴러 보이며,
대변약눌 - 참으로 잘 하는 말은 어눌한 것처럼 들린다.
躁勝寒. 靜勝熱. 淸靜爲天下正.
조승한 - 분주하게 움직이면 추위를 이길 수 있고,
정승열 - 고요히 있으면 더위가 물러가게 된다.
청정위천하정 - 탐욕이 없고 고요하면 천하가 평안하다
cf) 노자의 도덕경은 한사람이 쓴 책이 아니다.
cf) 노자류의 사상은 주로 사관들에 의해서 말해졌다. 그래서 노자의 철학이 비밀통치철학이었다는 비판이 있다. 강신주의 노자와 장자에 대한 비교에서도 그런 입장이 드러난다.
cf ) 노자류의 사상가들이 유가를 철저히 배격했다는 것은 노자의 공자에 대한 비판에서도 명확히 드러난다. 노자는 공자가 표리부동하고 교만하며 탐욕적이라고 비판한다고 사기에 쓰여 있단다.
cf) 노자가 인간중심주의를 넘어서려 했다는 시도가, 모더니즘에 대한 포스트모더니즘의 비판처럼 읽힌다.
신영복이 노자와 장자를 유가 다음에 배치하는 이유를 납득할 수 있을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