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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경치

고양이

우연히 읽었던 시 한편이 계속 머릿속에 남아있다.
언뜻 언뜻 주변을 맴 돈다.
뭐랄까 ?
도발적이면서 한편으로는 슬프고 그래서 매혹적이다.
뿌리치기 힘든 유혹 같은 걸 느낀다.
반항 또는 순교의 감성을 충동질한다.

피가 끓는 정념의 감수성일까?
관능에 대한 욕망이 그렇게 읽었을까?
철 없음인가?
아니면 노추한 현실을 감추려는 마음일까?

세속적 기준으로 보자면 닳아서 점잖아야 될 노인이, 불경스런 이런 시에 대해 공감한다는 건  억지스럽고 불편하고 그리고 생경하다.
그래도 할 수 없다.
공감이 가는 걸 어떻게 하나.

고딩 때 서정주의 화사집을 몰래 읽던 기분이 든다.




달리는 타이어를 네 다리로 휘감고 있는 저 고양이들! 허벅지 사이에 타이어를 끼우고 굴리는 저 명랑한 고양이들! 털을 날리며 골수를 날리며 내장을 날리며 가뿐하게 달려가는 고양이들! 허벅지를 풀 생각이라곤 털끝만치도 없는 저 앙큼한 고양이들! 굴리고 어르고 핥으며 타이어를 끼고 달리는 저 달콤한 고양이들! 폭염에 녹는 아스팔트 위에서 습자지처럼 벗겨져 일어나는 겹겹의 고양이들! 늘어지게 기지개부터 켜대는 저 늘씬한 고양이들! 샛노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망가진 발톱부터 다듬는 저 고양이들!

­­-시집 <요즘 우울하십니까?>(문학동네)에서

cf) 궁금했다.
누가 아직도 이렇게 펄떡 펄떡 피가 긇는지.
검색을 해 보니, 갑이 다 된 노친네고, 여성이고, 시집은 올해 출간되어서 따끈 따끈하다. 
한편으로는 안도감이 들고, 한편으로는 부끄럽다.
안도감은 그녀가 내 어리석음을 변명해 주기 때문이고, 부끄러운건 내 조로증이다.

알리바이를 하나 발견했다는 건 또 다른 어리석음일까?

바보가 되기로 작정했다면, 이 정도는 되어야 한다.
그래야 전혀 새로운 세상을 볼 수 있다.
진짜 바보라야 그런걸 쓸 수 있고, 바보 흉내내는 사람은 그걸 열심히 읽는다.
언젠가 흉내짓을 청산하고 싶어서.

물론 대부분 모방의 강을 건너다 익사한다.
강 건너 새로운 세계에 도달한 자는 그런 익사의 시체들을 건져서 새로운 생명을 창조한다.
그러므로, 뛰어난 글 쓰기는 하나의 세계가 새롭게 열리는 사건이다.
그런 새로운 세계를 발견한다는 건 창조하는 만큼은 아니겠지만, 충만한 기쁨이다.

많은 사람들이 진즉에 그걸 알아봤겠지만.
뒤 늦게라도 거기에 동참한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