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스트 생산자와 텍스트를 어떻게 볼 것인가?
기본적으로 개인과 텍스트의 관계는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텍스트는 그것을 생산한 개인의 신체에 그려진 역사와 상흔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텍스트와 개인은 주체와 생산물이라는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그렇다고 텍스트를 주체로 환원해서 설명할 수는 없다.
자식과 부모의 관계가 아무리 밀접하다고 해도 그 둘이 동일한 존재로 환원될 수 없는 것과 같다.
부모가 아무리 높은 통제력을 발휘한다해도 자식은 부모를 극복의 대상으로 삼는게 더 본질적인 관계이다.
결과적으로 텍스트를 주체로 환원할려는 노력은 결국 텍스트의 독립성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텍스트에 대한 폭력이다.
자기가 보던 방식대로 주체를 보려는 권력의지가 텍스트를 주체로 환원해 이해하려는 욕망에 작용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텍스트는 생산자인 주체의 자기극복 노력의 반영물이다.
자기극복 과정에서 묻어 나오는 주체의 흔적이 텍스트에 상흔의 형태로 존재한다.
그렇다고 주체의 상흔이 텍스트의 전체가 아니다.
오히려 상흔을 간직한 텍스트의 주체에 대한 대립적 자기극복이 보다 본질적인 텍스트의 속성이다.
텍스트는 주체가 자기를 극복하려는 노력의 결과물로서 독립적 속성을 가진다.
더나아가 생산된 텍스트는 주체를 새롭게 변형한다.
텍스트가 주체를 새롭게 탄생시키는 거다.
텍스트 만들기는 주체의 자기 극복 노력이다.
그 결과물은 주체를 새롭게 구성하기 때문에 텍스트가 주체에 우선한다.
텍스트를 통해서 주체를 해석하는 것이 옳다는 말이다.
주체를 통해서 텍스트를 해석하겠다는 것은 주체를 과거에 고정시킬려는 보수적 욕망이다.
결국 텍스트 만들기는 차이를 생산하는 가장 효과적이 방법이다.
주체를 새롭게 구성하고자 하는 가장 진보적인 행위이다.
cf) 이정우 강의 중에 '글쓰기가 차이를 생산하는 방법이다'라는 멘트를 듣고 생겨난 아이디어에 근거해서 이 글을 썼다. 결국 글쓰기가 최종적인 자기혁신의 방법이라는 것을 새삼 확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