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형은 무릎 깊이까지 물이 밀려오는데도 물러서지 않고 낚시를 계속했다. 나는 채비를 정리한 다음 그 모습을 지켜봤다. 그가 갈 때 같이 가려고 했던 것이라 치끝에는 우리 두 사람만 남아 있었다.
이미 여러 마리의 고기를 낚아냈는데도 만족하지 못하고 그는 낚싯대 끝만 노려보고 있었다. 이러다가 곧 어두워지고 말겠다 싶었을 때 뭐라고 소리를 지르며 낚싯대를 잡아 챘는데 그만 우지끈 부러지고 말았다. 그는 앞뒤 볼 것 없이 물로 뛰어들었고 필사적으로 첨벙거리면서 낚싯줄을 팔에 둘둘 감았다. 미끄러지기도 하고 알아 들을 수 없는 비명을 질러대기도 하다가 마침내 보듬다시피 잡아올린 것은 어른 팔뚝만 한 우럭이었다.
나는 외마디 탄성을 질렀고 그는 해초 더미 잔뜩 붙인 채 헤벌쭉 웃었다. 그 형은 손가락이 심하게 굽은 불편한 몸이었으며 고작해야 5학년이었다. 그가 낚시에 매달린 이유는 그 집에서 유일하게 동물성 단백질을 구해오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친구의 가족은 형과 늙은 할머니, 단둘이었다. 아버지는 먼바다로 나가 잘 돌아오지 않았고 어머니는 가족을 외면하고 떠나버렸던 것이다.
그렇게 큰것을 잡다니 --- 낚시라는 게 물속까지 뛰어들어야 하는 거였다니 --- 내가 낚은 배도라치는 고기도 아니구나 --- 그런 생각이 꼬리를 물고 빙빙 돌아서 쉬 잠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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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의 그런 모습은 날마다 되풀이 되었다. 바닷가로 나가 먹을 수 있는 것은 무어든 한 움큼씩은 꼭 움켜쥐고 돌아왔다. 그에 비해 내 친구는 말썽만 부리는 개구쟁이였다. 무조건 뛰었고 같이 노는 것 보다 울리는 것을 택했으며 말하는 것보다는 악쓰는 것을 좋아했다. 칠판에 제 이름 쓰기를 할 때도 네모판 가득 거대하게 써놓아야 직성이 풀렸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원망이 그렇게 만들어버린 거였다. 그는 갈수록 눈의 열기가 뜨거워지고 충동의 위험도 높아갔다. 웃고 까불어도 쓸쓸한 기운이 늘 주위를 맴돌았다. 폭발과 절제 가운데서 그는 방황했다. 그리고 소식이 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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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친구.
내가 그 친구를 다시 만난 것은 오랜만에 열린 동창회에서였다. 그는 긴 길을 돌아왔다. 동원산업 오징어배 살롱보이로 오대양 돌아다니다가 조리장이 되었고 근자에는 선박기계 수리, 유지하는 외국계 회사 엔지니어로 근무하며 역시나 전 세계를 제집 작은방처럼 돌아다니고 있다는 게 그동안 이력이었다. 그는 변해 있었다. 열기로 번들거리던 눈은 수평선을 닮아 있었고 행동거지와 말투가 부드러워져 있었다. 바람의 세월을 보내면서 아름답게 삭은 것이다.
형의 안부를 물었고 삶이 곤궁한데다 그나마 자주 못 본다는 대답을 들었다. 나는 오래전에 보았던, 어린 가장의 집념 어린 낚시에 대해 말했다. 한동안 듣던 그는 눈 들어 40년 저쪽을 물끄러미 바라다보았다. 그리고 조만간 형에게 식사대접을 하겠다고 답을 했다.
cf) 나는 한창훈의 '우럭'편을 읽으며 너무 감정 이입이 되어 주책스럽게도 자꾸 눈물이 났다. 한창훈에게도 그의 친구에게도 그리고 그의 형에게도 모두 감정이입이 되었다. 40여년 저편을 보면 이런 삶들이 하나의 보편적 전형이었다. 한창훈도 친구도 그의 형도 모두 내가 살던 마을에 있었다. 그런 점에서 한창훈의 서사는 거문도의 특수한 이야기 이지만 동시대의 보편적인 이야기이다. 또한 시대를 뛰어넘어 세상을 살아 낸다는 것에 대한 어떤 보편적 진리를 획득하고 있다.
그런 그에게 바다가 무엇이냐고 물으니, '아직도 바다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겠다'고 말했단다. 아마도 바다는 그에게 삶 그 자체일 것이다. 최소한 그는 그것은 알고 있을 것이다. 근데 삶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누구도 대답할 수 없다. 삶을 안다면 더 이상 살아서 무엇하겠는가? 그리고 사는 재미가 뭐가 있겠는가? 몰라야 당연하다. 그러니 그는 바다가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 한창훈에게 바다가 무엇이냐고 질문하는 것 자체가 우스운 질문이다.
그나저나 한창훈으로 부터 재미있는 그리고 풍성한 또 다른 세계를 선물 받은 기분이다. 그것에 고맙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