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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에 새겨진 상식


출처 : http://blog.paran.com/blog/detail/postBoard.kth?pmcId=starz00&blogDataId=38189496&hrefMark=

출처 : http://stylecrave.frsucrave.netdna-cdn.com/wp-content/uploads/2008/12/emma-hack-14.jpg

신체에 새겨진 당대의 규율과 상식 이미지. 출처에는 여성의 신체가 표현을 위한 매체가 될 수 있다는 의미로 위의 이미지들를 사용하고 있다. 이미지는 어쨓든 의미를 창출하는데, 내게는 위의 이미지들이 규율에 포박당한 인간의 신체로 읽혔다.

출처 : http://b.vimeocdn.com/ps/280/280572_300.jpg

근대가 체계적인 감시체제라는 걸 설명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판옵티콘(전방위감시체제)이미지. 근대의 공간이 판옵티콘 이미지 처럼 한가운데에 권력 또는 사회적 규율 또는 사회적 상식의 시선이 있고, 개별자는 원주위의 작은 공간들에 배당되는데, 이렇게 배치된 개별자들은 중심의 가치를 어떻게든 스스로 내면화 한다는 설명이다. 근대의 주체화 과정을 설명하는 푸코식 모델인데, 너무 비관적이고 우울한 모델이다. 개인의 자율 또는 주체성 영역을 완전히 지워버린 모델이다.


출처 : http://www.aboutmyarea.co.uk/images/imgstore/268_oieq1g7rnk_i.jpg

Hallow Panopticon(텅빈 전방위 감시체제) 이미지. 판옵티콘을 이렇게 텅빈 감시자 모델로 상정하면 훨씬 자유롭다. 근대가 체계적 감시체제라는 걸 인식한다면, 체계에서 숭숭 미끌어져 흘러내리는 이런 대안적 상상이 가능하다. 아마도 푸코가 말하고 싶었던 건 이런식의 탈출이었을 거다. 그걸 김영민은 '이드거니 몸을 끄-을고 간다'고 말했을 거다. 삶으로 체계를 내파한다,는 개념도 아마 이런것일 거다. 결국 인간은 상식적 규율을 뛰어넘어 자기가 살아낸 몸으로 주체를 형성한다는 말이다.


상식초월이면 예측불허란다. 인간이란 몸으로 행한 습성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그게 이드거니 몸을 끄-을고 앞으로 나아 가야 하는 이유다. 세속적 상식이란 단지 머리로만 계산한 현실이다. 그런 상식 안에는 아무것도 없다. 몸을 끄-을고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머리로만 계산한 상식은 그래서 허무하다. 한창훈의 글에서 머리가 아니라 몸에 새겨진 상식, 그렇게 해석하고 싶은 대목을 잠깐 엿 보았다.

"당신이 고향에 두고 온 것들 중에 무엇이 가장 그리운가."
몇 년 전 몽골 울란바토르에서 유학 온 여학생에게 내가 물었다. 흔히 가족이나 친구, 또는 연인 중에 하나를 댈 텐데 서울 생활 삼 년째라는 그녀는 바람이라고 대답했다. 사막에서 불어오는 독한 바람. 극도로 추웠던 바람. 너무너무 지겨웠던 그게 가장 그리운 거란다. 허락한다면 고향에서 한 사흘 그 바람만 맞다 돌아오고 싶다고 말했다. 나는 이해가 됐다.
하매, 여인네는 서울 가는 기차에 몸 실었겠다. 사 년 동안 그녀를 감싸고 있었던 바람과 파도와 소금기가 문득 아득한 먼 옛날처럼 느껴질 것이다. 그리고 어느 날 불현듯, 이곳을 떠올릴 것이다. 그러면 울란바토르 출신의 여학생이 그러했듯, 그 사나운 바람과 거친 파도가 그립구나, 할 것이다. (한창훈의 향연 p.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