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저녁 밤늦게 고향에 가서 친구를 만났다.
촌놈들에게 친구란 어릴적부터 서로의 일상을 하나도 빠짐없이 알고 지내는 그런 사이를 말한다.
나에게도 어린시절부터 동네 모퉁이에서 어른들 몰래 술먹는걸 같이 배웠던 고향 친구들이 있다.
어림잡아 세어보면 금방 십여명을 꼽을 수 있다.
그런면에서 촌놈이라는 정체성은 커다란 축복이다.
요 며칠 사이 감기에 걸려서 끙끙 앓느라 술한잔 입에 대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소주가 입에 착착 앵겨왔다.
둘이 낄낄거리며 금방 한시간여만에 서너병을 해치우고, 맥주로 입가심하러 가서 필름이 끊겨버렸다.
최근에 거의 없던일인데!
아침에 일어나서 몹시 마음이 상했다.
그러나 매번 새롭게 확인하는것은 언제나 즐겁게 놀 수 있는 친구들의 존재다.
예전에는 촌놈이라는 것을 극복해야할 그 무엇이라고 생각했다.
그게 나에게 큰 축복이라는 자의식이 없었다.
아마도 내 무의식속에 과거가 부정적으로 각인된 결과일 것이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과거가 나에게 새롭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누추하고, 초라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다정하고 포근한 그 무엇이 되었다.
세속적으로 실패한 친구도 많이 있고, 세속적으로 성공한 친구도 많이 있다.
그들 모두 격의가 없다.
이해관계로 엮이지 않아서 서로의 차이를 있는 그대로 봐 주는 너그러움 때문일 것이다.
나는 사회생활에서는 그런 친구들을 단 하나도 만나지 못한것 같다.
가까이 지냈던 어느 누구도 이해관계를 따지지 않은 적이 없었다.
내가 먼저일 수도, 상대가 먼저일 수도 있다.
심지어 운동을 위해서 만났던 수 많은 선배 동료 후배들도 그러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관계 맺기가 힘들었다.
아마 내가 가진 그 무엇이 그를 현혹했거나,
아니면 내가 가진 그 무엇에 대한 지나친 내 자의식이 그의 진심을 왜곡했을 수도 있다.
어떤 경우든 내가 가진 그 무엇에도 불구하고 나와 그가 진심으로 소통하고 있다는 느낌을 갖기는 어려웠다.
그런데 내가 가진 그 무엇이 가벼워지면서 관계에 대한 부담도 마찬가지로 가벼워졌다.
때로는 직빵으로 내 뜻을 전달하기도 하고, 때로는 표피적 관계에 충실하기도 한다.
그러다보니 훨씬 관계 맺기가 수월하다.
예전처럼 이것저것 재고 자시고 할게 없다.
처음에 하고 싶었던 말은 현재는 매순간 과거와 미래로 이중화된다는 거였다.
그래서 시간을 과거-현재-미래의 선형적인 역사로 인식하는건 현재의 삶을 과거의 노예로 만드는 사고방식을 낳는다는 거였다.
현재가 매 순간 과거와 미래로 이중화된다는 사고를 가지면, 과거를 현재속에서 다시 갱신하고, 현재속에서 미래를 살 수 있는 길이 보인다는 거 였다.
그런데 써 놓고 보니 엉뚱한 회고만 잔뜩 늘어 왔다.
현재가 과거로만 겹쳐들어갔다.
근데 자세히 보면 현재가 미래로 겹쳐진 부분이 보일거다.
그래서하는 말인데 현재는 과거와 미래로 끝없이 이중화 된다.
고정된 과거도 없고, 딱딱하게 굳어서 존재하는 미래도 없다.
술이 덜 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