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비 출판사에서 고전 rewriting classic이라는 기획으로 고전을 현재라는 시각에서 재해석한 기획물 을 내놓고 있다. 그런 기획물 중의 하나다.
그린비라는 출판사의 책을 몇권 읽다보니 이 출판사가 지향하는 방향이 어렴풋이 읽힌다.
그린비라는 출판사는 '수유 + 너머'라는 연구공동체와 접속해있고, '수유 + 너머'라는 연구공동체는 젊은 연구집단들의 전위적 모임이다. 기존의 학제적으로 분화된 공부형태로 부터도 자유롭고, 한국 대학사회의 비민주적인 위계적 서열체제의 폐쇄적 분위기로 부터도 자유로운 텍스트들을 생산해 내고 있다.
그린비 텍스트가 지향하는 사유경향은 니체로 대표되는 프랑스의 지적 자양분을 토대로하고 있다. 이 책에서도 개인들의 자유로운 의사소통, 모든 형태의 형이상학에 대한 철저한 부정, 수평적 연대로서 리좀 또는 가로지르기 등과 같은 개념들을 중심으로 삼고 있다.
나는 어떤 언어보다 위계적 언어체계를 가진 한국사회에서 태어났고, 그 속에서 주류 남성으로서 40년 이상을 살아왔고, 어느 조직 보다도 수직적 위계구조가 철저한 공무원으로 20년 가까이 살았다. 당연히 수직적 인관관계에 잘 길들어 있다. 어설프지만 내 나름으로 소통의 불가능성에 대한 인식체계를 확고하게 확립하고 있다.
소통의 문제에 관해서 치열하게 사유하고, 타자와의 자유로운 소통이 가능하다고 말하는 이런식의 책은 나에게 일종의 전혀 새로운 타자와의 만남과 비슷한 경험을 유발한다. 책의 내용이 도전적이고 흥미롭다. 더구나 영어적 사유방식과 언어체계에 상당히 길들여진 나에게 장자라는 한문 텍스트는 100% 우리말로 번역 되었다 할지라도 신선한 문체이다. 동일한 기획시리즈의 첫번째 작품 고미숙의 한문 텍스트 '열하일기 ---- '를 읽을 때에도 비슷한 새로움을 느꼈었다.
1. 초월적자리와 초월론적자리
저자 강신주는 철학이란 삶을 성찰할 수 있도록 구체적 삶에서 거리를 확보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여행자가 익숙해 있던 자신의 고향으로 부터 떠나, 낮선곳에서 새롭게 적응한다면 원래 자기가 살던 곳이 낮설게 보일거라고 생각한다. 이런 낮선 감각이 원래 자기가 살던 곳에 대한 객관적 성찰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라고 본다. 삶을 낮설게하기라는 방식을 통해서 구체적 현실에서 일정한 거리를 확보하는 것을 일종의 초월이라고 보는데, 이런 초월을 강신주는 잠정적 초월과 영원한 절대적 초월로 구분한다.
영원한 절대적 초월은 플라톤의 이데아, 하이데거의 존재, 종교적 신 등을 언급하고 이를 초월적 자리라고 이름한다. 강신주는 이런 사고가 형이상학을 낳는 토대라고 생각했다. 이런 형이상학은 필연성의 법칙을 상정하고, 인간은 미리 설정된 그런 필연성을 따라서 살아야할 당위를 강요당하므로 인간에 대해 억압적 성격을 가진다고 본다.
이에 비해서 여행의 장소를 바꿈에 따라 원래의 자기 고향이 다르게 인식되는 것 처럼, 원래의 자기를 객관적으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낮설게 거리 두기가 필요하지만, 이런 초월이란 임의적이고 일시적인 것이라는 입장을 강신주는 초월론적자리라고 명한다. 강신주는 이런 임의적인 초월을 장자의 대붕 이야기를 통해서 설명하면서, 올바른 삶이란 이런 임의적 초월의 연속이라고 말한다.(대붕에피소드)
이런 임의적 초월은 시스템과 시스템, 공동체와 공동체의 차이에서 출현한다. 서로 다른 가치체계 사이에 서서 두가치체계를 비판적으로 성찰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체제로 부터 자유로운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거다. 체제들 사이를 자유롭게 가로질러 횡단하려는 의지가 자유의지라고 강신주는 생각한다.(송나라 모자 장수 에피소드, 혜시의 땅 에피소드, 손이 트이지 않는 약 에피소드)
2. 실존적 고독을 넘어 타자와의 소통은 가능한가?
대화란 대화 참여자가 동일한 논리기반을 공유하고 있을 때 가능하다. 나와 네가 이미 공통 가능한 가치체계를 공유하고 있을 때, 나와 너는 서로에게 더 이상 타자가 아니다. 그럴 경우는 대화란 타자와의 대화가 아니라, 동일자들간의 대화라고 말해야 한다.
서로 다른 가치체계를 가진 나와 타자는 절대적으로 외재적 존재이기 때문에 소통이 불가능하다. 이 경우에 제삼자도 소통을 전혀 매개 할 수 없다. 만일 삼자가 어느 한편과 동일한 가치체계를 가진 존재라면 그는 단지 일방적 편향을 수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제삼의 가치체계를 가진 존재라면 그는 나와 타자 사이의 또다른 타자로서만 존재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나와 타자 사이의 소통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피할 수 없다 (제물론의 논쟁에피소드)
그렇다면 서로 다른 가치체계를 가진 타자와의 소통은 어떻게 가능할까?. 이 문제에 관해서 장자는 나를 버리고 타자를 나로 삼아서 유영할 수 있을 때 소통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타자와의 소통에는 두 단계가 필요한것으로 보인다. 첫째는 나를 비워두는 것이다. 둘째는 타자를 나로 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떻게 자신을 비우고 타자를 나로 삼을 수 있는가 ?
3. 해체와 망각의 논리
강신주에 따르면 장자는 타자와의 소통을 가장 철저하게 고민한 중국의 사상가라고 말한다. 장자는 타자와의 소통을 위해서 첫번째 할일은 자신을 비워두는 것이다. 자신을 비운다는 것은 자신이 내면화해 가지고 있는 세계관이나 가치체계를 해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이 태어난 사회의 가치나 습속을 장자는 성심이라고 말했고, 프랑스 사회학자 브르디외는 아비투스(habitus)라고 말한다.
성심이나 아비투스는 우리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나에게 주어진 것이다. 우리 스스로 언제 어디서 누구를 부모로 선택해서 태어날지 결정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가진 성심은 기본적으로 외부에서 나에게 주어진 임의적인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것은 시대나 지리적 위치에 따라 다르게 구성될 수 밖에 없다. 더구나 시대나 지리적 위치가 같다 할지라도 자신이 몸담고 있는 계급적 지위 또는 성별에 따라서도 서로 다를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행동을 결정할 때 사용하는 가치체계나 세계관은 외부에 객관적으로 존재한다는 점에서 구조적이고, 이게 어떤 사람의 내부에 들어가서 그 사람의 행위를 규율하는 통제 장치로 쓰인다는 점에서 생산적 구조이다. 부르디외는 이런 구조를 '생산하는 구조이면서 동시에 개인적 차원에서 생산된 구조다'라고 파악한다.(장자의 바닷새 에피소드)
사람들은 이런 아비투스나 성심을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어떤 것으로 간주한다. 여기에서 형이상학이 출현 한다. 성심이 임의적이고 가변적인 것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따라야 할 가치체계로 인식될 때 삶의 주인은 더 이상 우리 자신이 아니라, 성심이나 아비투스가 된다. 서구 근대철학을 뛰어넘고자 한 니체를 대표로 하는 많은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형이상학적 사유체계를 해체하는 것이 절대적 성심에 사로잡힌 노예적 인간을 해방시키는 필수적인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우리의 내부에서 우리를 규울하고 지휘하는, 오랜 시간동안 익숙해진 습속이나 세계관을 버린다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장자는 그걸 꿈의 세계에서 삶의 세계로 복귀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장자가 말하는 꿈의 세계란 나의 성심으로 타자의 행위를 예단함으로서 발생하는 나의 행위이고 나의 상상이다. 노나라 왕은 자신의 성심에 따라 바닷새를 극진하게 온갖 진귀한 음식과 음악으로 대접하였다. 그러나 바닷새는 노나라 왕의 호의를 며칠을 못버티고 죽고 말았다. 노나라 왕에게 바닷새는 절대적인 타자다. 만일 그가 자신의 성심을 버리고 바닷새의 성심을 자신으로 삼고자 했다면 다른 결과가 나왔을거다. 그런 의미에서 노나라 왕의 성심은 꿈이고, 바닷새라는 타자를 자신의 성심으로 받아들이려는 자세는 삶의 세계로의 복귀이다.
장자는 이와 같이 자신의 성심의 세계에서 타자의 성심의 세계로 자유롭게 접속하는 걸 문의 회전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면서 '저것과 이것이 짝을 잃었다'라고 말한다.
이것과 저것이 짝을 잃었다는 것은 자신이 주체인지 타자인지 불분명한 상태를 말할 것이다. 나와 타자 사이에 존재하면서 타자와 무한하게 접속할 수 있는 상태를 장자는 타자와 소통할 수 있는 조건으로 보았다.
이와 같이 자기를 비우기 위해서는 자신을 잃는것이 필수적이다. 인간에게 자신이란 과거에 대한 기억으로 구성된다고 할 수 있고, 과거의 기억이란 자신의 성심이라고 할 수 있다. 타자와의 소통을 위해선 이런 자기 내부의 관습적인 성심에 대한 망각이 능력으로 요구된다,는 거다. 니체가 어린아이의 망각 능력을 새로운 창조를 가능하게 하는 힘으로 파악한 것과 같은 논리를 장자는 말하고 있다.
망각이란 자신에 대한 비움이고, 이런 공백은 타자와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낸다. 이런 탈중심적인 공백은 수동적인 허무가 아니고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창조의 의미를 흭득한다. 기존의 생각 혹은 기존의 의미를 비웠기 때문에 탈중심적인 단독자는 불가피하게 새로운 의미를 채워야할 숙명에 놓이게 된다. 자기 내부에 견고하게 존재하면서 세계를 읽고 해석하는 가치체계, 다른말로 자기의 내부에 견고하게 굳어진 성심 또는 아비투스에 대한 망각은 타자와 대면할 수 있는 최소의 조건이라는 거다.
cf1) 책을 읽으면서 장자가 에피소드에 등장시키는 인물들의 특이성에 눈길이 갔다. 왜 장자는 모자장수, 바닷새 등과 같이 일상성에서 탈피한 인물들을 다룰까?라는 의구심이 들었다. 고전을 공부한 사람으로부터 들은 말인데, 장자의 대척점에 있는 유가는 철저히 현세적 성공을 위한 사유를 했단다. 이에 비해서 장자는 유가가 외면한 대상들. 소외 되고 주목 받지못한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사유를 했단다. 그게 장자의 에피소드에 특이한 소수자들 - 사회적 약자들이 빈번하게 등장하는 이유란다.
'노나라 왕과 바닷새'라는 에피소드는 그걸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인것 같다. 인간의 입장에서, 특히 최고권력자인 왕의 입장에서 바닷새는 한갖 미물에 불과하다. 이런 미물에 접근할 때 장자는 철저하게 왕의 입장을 내려 놓고 바닷새의 입장으로 내려가야 소통이 가능하다고 말하는 것 같다. '타인의 수레를 타고 중심을 잡는다'는 장자의 아포리즘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해야할 것 같다.
그래도 여전히 남는 의문은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이해 받을 수 있을까?다. 너무 소갈머리가 좁은 생각일까?
cf2) 장자의 성심개념과 피에르부르드외의 아비투스 개념의 일치성을 보면서 놀랐다.
부르디외는 현대사회학에서 '문화적자본'이라는 개념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부르디외에 따르면 계급재생산에 자본보다는 '문화적습관'이 더 큰 영향을 끼친다고 파악한 인물이다.
이런 설명과정에서 아비투스라는 개념이 등장하는데, 아비투스를 영어로 풀면 그냥 'habit'이다.
사회적 수준의 각종 집단들이 가지는 습관-관습-관행 등이 계급재생산의 힘이라는거다.
브르드외식의 개념에 동의한다면 다양한 사회적 수준에서 새로운 문화적 행위들의 실천이 계급재생산을 교란시키는 혁명적 행위가 된다.
장자의 생각도 기존의 딱딱한 성심이라는 문화적 틀을 깨기 위해서는 사회적 약자들의 입장으로 사고전환을해야 이들과 진정한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는 관점이다.
그가 소통의 문제를 치열하게 사유한 이유는, 그런 소통이 가능해야 진정한 사회적 소수자들(약자들)의 존립이 가능하다고 생각한것 같다.
아무리 왕이 호의를 가지고 바닷새를 대한들, 자신의 성심을 내려놓지 않는한 그 바닷새는 겨우 3일을 버티지 못하고 죽었다는 장자의 에피소드는 그걸 극명하게 보여주는 예처럼 보인다.
수천년을 사이에 두고, 동양과 서양이 같은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었다는게 놀랍고, 신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