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상의 경치

자기 삶의 주체화


< 너무 너무 진지하고 무거운게 싫어서 김영민을 외면하다가도, 어느새 또 그에게 기울어진 내 자신을 발견한다. 김영민의 새책이 나왔다길래 그냥 구경만 할라 했다. 근데, 그 진지하고 무거움에 또다시 무릎 꿇었다. >


1. 체제와 기득권으로서 직업

직업을 가지고 있다는 건, 그 어떤 존재 양식이든 기득권이다.
기득권에 대한 댓가는 체제의 요구를 수행해야 한다는거다.
수행해야할 요구사항들은 다양하다.
체제재생산에 필요한 직무를 수행하는것.
구체적으로, 주류사회의 가치관을 재생산하는 직무를 수행하는 것.
체제의 유지와 발전을 위해서, 동료와의 경쟁에 진지하고 성실하게 나서는 것. 등등---.
헤아릴 수 없이 많다.

2. 주체적 삶의 상실
문제는 체제의 요구를 수용하는 만큼 주체적 삶은 증발해 버린다는 점이다.
체제의 요구를 삶으로 번역해 들이면서, 스스로의 주체적 삶은 휘발되어 사라진다.
체제의 명령을 수행하는 단말기로서 삶이 기능한다.
체제가 설계한 통로를 따라 길이 주어져있다.
이렇게 주어진 길을 따라가다 보면, 문득 나는 누구인가?
내 삶의 주인은 나인가?

내 삶의 주인은 체제인가? 아니면 내 자신인가?
나는 내 내면의 목소리에 충실한가? 아니면 체제의 감시와 욕망에 복종하는 노예인가?

3. 체제와의 불화
삶의 주인으로서, 주체적 인간이란, 불가피하게 체제와의 불화를 피할 수 없다.
사회적 존재인 인간이 체제와 불화한다면 그 경계는 어디일까?
세속에서 체제와의 불화란 질적인 가치의 문제이므로 그 경계를 어디까지라고 직접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
우회해서, 거꾸로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낼 수 있는 능력이 무엇인가?라고 질문하는게 올바르다.
체제와 불화할 수 있는 힘을 능력이라고 말한다면, 체제의 요구, 체제의 길들임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능력이다.
직무수행이 자기 내면의 요구인지, 아니면 체제의 욕망에 대한 순응인지를 구분할 줄 아는걸 성찰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능력이 있어야 체제와 어긋날 수도 있고, 아니면 비판적으로 체제에 순응할 수도 있을 것이다.


4. 불화의 생산성
체제와의 어긋남, 체제와의 불화란 자기만의 삶의 길을 만드는 일이다.
외부적 강제가 아니라 스스로의 선택에 따라 삶을 산다는건 그러므로 길이 아닌 길을 가는 일이다.
이미 주어져 있는, 체제가 인정한 표준적 길에서 어긋나는 일이다.
그런 삶은 결국 새로운 자기만의 생활양식을 만들고 그리고 그걸 살아내는 일이다.
자기 삶을 주체화한다는건 결국 새로운 생활양식의 창출이다.
그러므로 체제와의 불화가 새로운 창조적 생산성의 근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