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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먹기 또는 놀기

유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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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학교에서 거의 날마다 교무실을 발칵 뒤집어 놓을 만큼 웃기면서 지냈다.
연말이라 회식자리가 많아서 밥먹고 술먹는 자리가 많았다.
그런 자리마다 좌중을 폭소의 도가니로 몰아넣곤 했었다.
너무 재미있어서 사람들이 나를 경박하다고 구박할까봐 은근히 걱정해야 했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필을 받으면 유머감각이 탁월하다.

오늘 어떤 책을 읽다가 그런 귀절을 발견했다.
'유머는 마조히스트적 반전 전략이다'

마조히스트는 자기를 학대하는 데서 쾌락을 얻는 사람을 가리킨다.
유머란 사회가 규정해 놓은 금기들을 무력화시키는, 일종의 폭로와 같다.
그러므로 유머는 사회적 금기를 폭로한 댓가로 사회적 처벌을 불가피하게 가져 온다.
대신에 그는 이 처벌을 통해서 더 큰 자유를 휙득한다.
유머는 표면적으로는 스스로 사회적 처벌을 즐기는 마조히스트처럼 보이지만,
유머 사용자는 그 처벌을 통해서 더 큰 쾌락을 획득하는 반전을 그 내부에 숨기고 있다는 것이다.

어린 아이가 '임금님은 벌거 벗어대요'라고 폭로하면,
그 폭로는 엄숙하고 위엄있는 귄위의 허위를 무너뜨리면서, 웃음을 유발한다.
그렇기 때문에 폭로는 허위적 권위의 시스템에 참여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한 순간 당황하게하고,
그 시스템을 유지하려는 관성을 가진 힘들이 어린아이를 처벌한다.

그러나 이렇게 허위라는 것이 폭로되고 나면,
그 시스템은 더이상 힘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에 그 처벌이 사소하고 무력해진다.
유머는 표면적으로는 마조히스트처럼 보이지만,
유머는 현실을 무력화시켜 새로운 생성을 낳는 긍정이 된다.

채플린의 희극이 위대한건
치밀한 논리가 아니라 웃음으로 단번에 포디즘적 자본주의 본질을 까발리기 때문이다.

최근에 왜 그렇게 유머에 본능적으로 집착했는지 그 이유를 깨달았다.
 
웃음으로서만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다.
이걸 깨닫는데 50년이 걸렸다.

사람들은 논리적 정연함으로 타자를 설득할려는 엄숙함을 일종의 습성처럼 가지고 있다.
특히 논쟁이 붙으면 엄숙해지면서 논리적 정연함을 필사적으로 추구한다.
대개의 경우 내 논리가 타자의 논리를  압도한다 할지라도 상대는 내 논리의 정연함에 의해서 나에게 굴복당하지 않는다.
상대는 내 논리의 내적 정연함을 부정할 전혀 사소한 부차적인 것들에 필사적으로 매달리면서 저항한다.
특히 말꼬리 잡기는 논쟁을 전혀 엉뚱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곤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경험을 가지고 있을거다.
어떤 주장을 논리적으로 관철시키고도, 정작 주장을 현실태로 만드는 과정에서 저항이나 소극적 협조 같은 방해들에 부딪히곤 했을거다.

왜 그런지 그 이유를 이제야 깨달았다.
무거운 논리적 정연함이 아니라, 웃음으로 상대를 설득해야 한다는 것을!

'어린아이의 천진한 웃음이 인간이 인간을 극복하는 길이다'라는 아포리즘을 좀더 잘 이해할 수 있을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