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의 수수께끼, 어머니,어머니
(이 그림은 바로크적인 불규칙한 격동이 꿈틀대는 듯한 형태 속에 섬바위의 풍화된 암석 같은 모양과 환상의 건축가 안토니오 가우디적 형태의 영향 등을 감지케 한다. 왼쪽 아래쪽에 다소곳이 잠든 듯한 태아에 수염을 붙인 듯한 기묘한 생물, 그 위에 운집된 개미들과 그 왼쪽 저 멀리에는 사자, 메뚜기, 물고 기, 칼을 쥔 손, 그리고 아버지를 부둥켜안은 달리 자신의 모습 등이 한데 어울려 덩어리를 이루고 있다. 수없이 뚫린구멍 중 36개의 구멍 속에는 '나의 어머니'라는 단어가 써 있는데, 이것은 다다이스트인 트리스탄 차라가 발표한 어떤 시귀와도 깊은 관련을 지니고 있다고도 한다. 이 작품을 달리는 그의 작품 중 가장 중요한 작품의 하나로 손꼽고 있다.)
- 설명을 읽어도 대체 무슨 말인지 이해안되는 부분이 많이 있다. 단지 내가 이해한 것은 달리가 초현실주의자라는 유파로 분류되고, 진중권의 미학강의에서 배운건데, 초현실주의는 프로이드를 미술의 영역에서 적극적으로 해석할려고 노력했던 사람들이라는거다. 그렇게 보니 이 그림이 어머니라는 대상이 욕망의 근거고 그 욕망의 복잡 난해함을 표현할려고 한것 같다는 막연한 느낌이다. 인테넷에서 가장 크게 잡히는 사진을 퍼 왔다. 그래도 자세한 부분은 안 보인다. 어디 화보집이라도 있으면 한번 보고싶다. -
<나는 너를 욕망한다.>
<나는 술을 욕망한다. 나는 밥을 욕망한다. 나는 돈을 욕망한다.>
이렇게 내가 무엇을 욕망한다고 말할 때, 욕망의 주인은 무엇인가?
익숙한 사고방식에 따르면 욕망하는 주체-주인은 당연히 나다.
그러나 이걸 한번 뒤집어 보자.
<네가 나를 욕망한다.>
<술이 나를 욕망한다. 밥이 나를 욕망한다. 돈이 나를 욕망한다.>
우선 욕망이라는 것에 대한 일반적 생각들을 한번 보자.
내가 무엇을 욕망한다는 것은 나에게 무언가 결핍되어 있고, 그 결핍을 채워서 해소하고 싶다는 심리적 갈망이다.
결핍이 해소된다는 말은 결핍을 충족시켜야할 욕망의 대립물로 해석한다는 말이다.
결핍이 욕망의 반대말이 된다는 거다.
이렇게 해석하면 결핍은 해소해야할 그 무엇이 된다.
결핍은 마이너스 상태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결핍은 어떤 목적달성(바람직한 상태)이 부재한 상황을 가리킨다.
인간관계에서 <내가 너를 욕망한다>라고 할때, 결핍은 너의 부재상태를 말한다.
나에게 내가 없다.
그러므로 나는 너를 원한다.
그렇게 되면 내 결핍은 해소되고, 그것은 목적달성이 된 상태를 의미한다.
이런 식의 사고방식이 가지는 문제를 두가지 차원에서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첫째는 목적론적 사고에 대한거다.
어떤 상태를 바람직한 이상으로 구체화 해 놓고, 그 상태를 욕망의 충족으로 보고, 그렇지 않은 경우를 욕망의 충족이 안된 결핍의 상태로 보는 거다.
이런 목적의 달성을 전제하면, 욕망은 달성해야할 목적의 부재 상태로 존재하게 된다.
목적에 따라서 욕망이 구성된다고 해야 한다.
욕망이라는 것이 자립적인 그 무엇이 아니라 먼저 목적이 상정이 되고, 그 목적달성이라는 위상학적 스토리를 따라 욕망이 구성되는 수동적 위치를 가진다.
이런 목적론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욕망하는 주체는 더 이상 내가 아니다.
목적이 나로 하여금 욕망하게하는 원인으로 기능한다.
목적이 없다면 나의 욕망도 없다.
따라서 내가 스스로 무엇을 욕망한게 아니라, 목적이 나로하여금 무언가를 욕망하게 한다는 거다.
이렇게 되면 더 이상 나는 욕망의 주인이 아니라 목적이 내 욕망의 주인이다.
<네가 나를 욕망한다.>
<돈이 나를 욕망한다. 술이 나를 욕망한다. 밥이 나를 욕망한다.>와 같이 목적어들이 주어 자리를 차지해야 정확한 진술이 되는 거다.
한번 자신의 순수한 욕망을 들여다 보라!
자신의 욕망이 어디에 기반을 두고 있는지!
그러면 금방 알 수 있다.
자신의 욕망이 자신의 욕망이 아니라 타자의 욕망이라는 것을!
그래서 목적론의 함정에 빠지면 열심히 주체적인 자기 삶을 산다고 살았는데, 나중에 보면 타자라는 형식으로 주어진 목적이 자기 삶을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걸 일찍이 눈치챈 불교에서는 모든 욕망이 의미없다고 주장한거고, 니체로 대표되는 포스트모더니즘은 목적론적 세계관을 깰려고 그렇게 노력한거다.
둘째는 목적에 개입해 들어 오는 사회적 힘이다. 첫번째 차원의 논의와 밀접하게 연결된거지만, 목적론이 가지는 폭력성을 드러내기 위해서 따로 말하고 싶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우리가 바람직한 어떤 상태라고하는 목적은 스스로 성립하는게 아니고, 사회적 규범라인을 따라서 구성된다.
목적은 이렇게 저렇게 사는 것이 바람직한 거다라는 형태로 사회적으로 이상화된 모델로 주어진다.
이런 모델은 물론 사회집단이나 시대적 상황에 따라 가변적이다.
그런데 사회는 그 자체로 살아있는 유기체이기 때문에, 자기라는 유기체의 존속을 위해서 그 구성원들을 유기체의 재생산에 맞도록 생산하는 힘을 가진다.(뒤르캠의 사회 유기체론 : 사회는 그 자체로 살아있는 하나의 사실이다)
이런 재생산의 힘은 그 구성원들로 하여금 삶의 지향성-목적성을 일정한 방향으로 구성하게하는 힘으로서 작용한다.
이 경우 이상화된 모델이란 그 시대와 생활집단에 주어진 사회적 규범이다.
이렇게 되면 이상화된 모델만이 바람직하고, 그렇지 않은 경우는 제거-삭제해야 할 그 무엇으로 전락한다.
과거에는 군사주의적 성격이 강한 전체주의가 지배적인 사회적 규범이었고,
김대중-노무현 시대는 민족주의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혼재된 자본주의적 강성대국주의가 사회적 규범이었고,
앞으로 5년 이명박 시대는 자본파시즘 체제, 돈이 모든 가치를 압도하는 자본 파시즘체제가 사회적 규범으로 기능할거다.
개인들의 삶의 목적이 이런 규범라인을 따라 형성될 것이기 때문에 이에 어긋나는 모든 목적들은 제거-삭제의 도태압을 받을 것이다.
이걸 거부하면 물리적 폭력에 의한 삭제의 압력을 받을거다.
그렇다면 변화의 계기들은 어디서 발생하는가?
뻔한 대답이다.
목적론적 세계관을 의심하는거다.
이게 진심으로 내가 원하는 삶인지 의심하는거다.
내 욕망의 근거들을 한번쯤 생각해 보는거다.
이걸 위한 방법론으로 포스트모더니즘식 사고를 하는 거다.
포스트 모더니즘은 체제가 강요하는 사회적 압력에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욕망은 차이를 생산하는 생산적 힘이라고 생각했다.
순수한 욕망이란 결핍되어 있기 때문에 채워야 할 마이너스적 요소가 아니라, 새로운 생성을 낳는 플러스적 힘이라는거다.
그렇다면 개인은 어떻게 체제가 강요하는 사회적 압력에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자기 욕망을 찾을 수가 있을까?
결국 사회의 주류로부터 이탈하는거다.
물론 이런 이탈이 반드시 물리적 이탈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한번 결핍을 욕망해보자!
다른 말로 '결핍을 결핍한다'라는 거다.
결핍을 결핍으로 느끼지 않는다면 그때서야 비로소 사회적으로 주어진 욕망에 휘둘리지 않는 자유로운 존재가 탄생하는거다.
지금 가진것들에 만족하면서, 타자가 강요하는 욕망을 자기의 욕망으로 인식하지 않는다면, 이런 존재들은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가는 변화의 계기들을 만드는 자율적 특이점으로 존재하는거다.
이런 상태를 확보하면 비로소 생산적 욕망을 구성할 수 있다.
채워야할 부족한 무언가가 아니라, 새로운 차이들을 생산하는 순수한 욕망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제일 먼저 배울 말은 '자본을 욕망하지 않는다. 자본의 결핍을 결핍하자.'라는 거다.
한번 생각해보라.
내가 자본을 욕망하는 진짜 주체인가?
대부분의 경우 그렇지 않다는 것은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수 많은 매체들이, 학교가, 심지어 종교조차도 자본을 욕망하라고 부추긴다.
그러지 않으면 너는 죽을거다라고 협박한다.
그러다 보니 끝도 없이 자본에 대한 욕망의 계곡에 빨려들어 간다.
그러나 그 매체들을, 학교를, 종교들의 배후를 자세히 들여다봐라.
자본이 그들의 주인이다.
그러니 내가 자본을 욕망하는건 결국 내가 아니고 자본이다.
그래서 한번쯤 자본이 자본을 욕망하도록 나를 부추기고 있다고 성찰해보자.
그러면 훨씬 생활의 여유를 찾을 수 있을거다.
자본이 내 삶의 내 욕망의 주인이 되는 경우는 최소한 물리칠 수 있을것 같다.
cf) 이 글은 오늘 공부한 이정우교수의 '무의식과 욕망'이라는 강의에서 기본 아이디어를 얻었다. 어눌한 그의 강의가 갈수록 내용이 풍성해진다. 이정우는 욕망을 프로이드 심리학과 대비시켜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프로이드의 욕망개념이 기독교적 도덕론에 포획된 표준화된 가족모델에 근거하기 때문에, 욕망을 결핍에 대한 욕구로 환원시키는 오류를 피할 수 없었다고 말한다. 그에 비해서 들뢰즈나 가타리는 목적론적으로 이상화된 가족이나 사회체제에 대한 어떤 원형도 상정하지 않기 때문에 프로이드에 비해서 욕망을 긍정적인 새로운 변화를 낳는 힘으로 보았다고 말한다.
예전에 어떤 글에서 그리이스 로마 신화 해설가로 유명한 이윤기의 인터뷰를 읽은적이 있다. 아버지가 없어서 성장기에 빈 공간이 없냐는 질문에, 아버지의 존재 자체가 없어서 아버지의 부재를 인식할 기회 자체가 없었다는 기조의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그때 프로이드의 이론이 현실에서 아무런 설명력이 없는 허구적 가설일 수 있겠다는 어렴픗한 생각을 품게 되었다. 그래서 요즘 드는 생각인데 프로이드를 해체하는게 근대를 뛰어 넘는 중요한 한 지점이다는 거다. 프로이드에 갇혀있는 것은 스스로를 프로이드의 밧줄로 칭칭 동여메고, 프로이드가 정말 옳아라고 외치는 격이다.
하긴 프로이드가 모든 인문학적 구조주의의 출발점이라고 해야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이 구조 자체를 깰려고하니, 프로이드와 가장 뿌리깊게 충돌할 수 밖에 없을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