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읽기-영화보기

선녀와 나무꾼

사용자 삽입 이미지


나무꾼과 선녀라는 이야기가 있다.
모르는 사람을 위해서 간략하게 말하면 이렇다.

'옛날 깊은 산골에 나무꾼이 살고 있었다.
이 나무꾼은 잘생기고, 힘도세고, 똑똑하고, 무엇보다 엄청 부자다.
그래서 이 나무꾼이 사는 산골의 폭포에 목욕을하러 오는 모든 선녀들이 이 나무꾼을 흠모하였다.
어느날 선녀들이 평소와 같이 폭포에 목욕을하러 하늘에서 내려왔다.
그중 어느 띨빵한 선녀가 목욕하고 나서 동료들과 술한잔하고, 담배피다가 실수로 날개옷을 홀랑태워 먹었다.
그래서 하늘에 못 올라 가는 난처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곤궁한 상황에 처하게 된 선녀는 이판사판이다고 생각하고 나무꾼이 사는 집에 찾아가 도움을 청했다.
그게 인연이 되어서 이 띨빵한 선녀와 나무꾼은 살림을 차렸다.

이게 부러웠던 다른 선녀들도 모두 차례로 술먹고 담배피다가 우연인척 자기 날개옷을 불태워버렸다. 그러곤 눈에 뵈는 나무꾼 대충 붙잡고 도움을 청했다.
그래서 이동네 사는 모든 선녀들은 더이상 날개옷을 갖지 못하게 되었다'

내가 어렸을적 들은 나무꾼과 선녀에 관한 이야기다.

박완서의 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라는 소설이 있다.
싱아로 표상되는 의미는 자연과 완전한 합일이 이뤄지는 행복했던 어린시절의 추억이다.
날개옷을 입고 마음껏 하늘을 날고, 폭포에서 목욕하던 시절이다.
싱아를 누가 다 먹어버렸다는 말은, 과거의 그런 행복을 잃었다는 말이다.
날개옷을 상실하고 나무꾼에게 목메어 사는 의존적 존재가 되었다는 말이다.
선녀로서 자기정체성을 상실하고 범속한 존재로 추락했다는 말이다.
(소설의 실제 의미는 전근대가 근대에 의해 완벽하게 파괴되는, 한국사회의 잘못된 근대화 과정에 대한 이야기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왜 선녀들은 자기 날개옷을 스스로 태웠을까?
최초의 선녀가 모두가 흠모하는 나무꾼과 결혼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초의 선녀와 그 후의 선녀들의 차이를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최초의 선녀가 날개옷을 상실하는 사건은 우연성에 의해서 발생한다.
자기에게 발생한 우연적 사건-날개옷을 실수로 불태워 버림-을 능동적인 사건으로 변환한다.
이판사판이라고 생각하고 나무꾼에게 도움을 청함으로서, 우연적으로 주어진 실패를 새로운 배치의 상황으로 능동적으로 변환시킴으로서, 새로운 행위를 창출한거다.
들뢰즈의 개념을 빌려오면, 자극에 대한 반응이 아니고, 우연적 사건에 대한 능동적 배치의 변환이다.

그러나 그 후의 선녀들은 최초의 선녀의 단순한 모방 행위자들이다.
날개옷이 우연적 사건으로 없어지지도 않았고, 이판사판이라는 결단을 통한 능동적 배치의 변환도 결여되어 있다.

그래서 최초의 선녀에게서는 재미있고 행복한 긍정적 정조가 느껴지고,
그후의 선녀에게서는 상실, 슬픔, 애석함과 같은 부정적 정조가 느켜진다.

나는 대한민국의 여성 대다수가 최초의 선녀 이후의 선녀들이라고 생각한다.
신데렐라스토리(최초의 날개 잃은 선녀 신화)에 중독된 환자들이다.
결혼이 자기 삶을 구원할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이가 들면 결혼을 위해서 사랑을 한다.
우연히 사랑에 빠져 결혼하는게 아니라 결혼이 목적으로 존재하고 사랑은 수단이 된다.
결혼을하지 않으면 인생의 실패자라도 되는 듯 결혼에 목을 맨다.
배우자를 보는 시각도 자기 관점이 없이 쳔편 일률적이다.
최초의 선녀가 만났던 나무꾼이 미디어의 로맨스 스토리라인에 따라 정형으로 존재한다.
그러다 보니 자기가 원하는 삶에 대한, 자기 욕망에 대한 진지한 성찰도 없다.

그래서 나는 여학생들에게 이렇게 가르친다

'신데렐라적 환상을 버리세요.
여러분의 인생의 주인은 여러분입니다.
남자가 여러분 인생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두다리로 이 땅에 굳건하게 서십시오.
무소의 뿔 처럼 혼자서 가십시오.
신데렐라콤플렉스에 갇혀있는한 여러분의 인생은 불행해 집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독립적인 존재가 되었을 때 비로소 남자와 평등하게 사랑할 수 있습니다.
남자가 여러분 인생을 구원할거라고 생각하는 한, 의존적 관계에서 발생하는 불행한 결혼생활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여기저기서 볼맨 소리를 한다.
오랜 시간동안 지속적으로 내면화된 환상을 버리기 싫어하는, 산통깨지는 소리를 듣기 싫어하는 눈치가 역력하다.
그러나 내 말이 아이들에게 신데렐라균에 대한 최소한의 면역체계라도 만들겠지하고, 아이들의 볼멘소리를 콧등으로 튕겨내고 또 다른 헛소리를 한다.

사실은 다른 동네에 가니까.
나뭇꾼과 선녀의 이야기가 내가 알던거하고 다르더라고!

'그동네에서는 선녀가 날개옷을 불태운게 아니라.
몰래 숨겨 놨었데.
그러다가 어느날 그 날개옷을 입고 다른데로 날아가버렸데.
그래서 나무꾼이 날마다 술먹고 행패 부린데.'

좀더 원본에 가깝지 않은가!

'to 선녀들에게
날개 옷 불태우지 마세요.
날개 옷 불태우면 어떤 나무꾼도 더이상 선녀를 선녀라고 부르지 않아요.
그리고 날개옷 불태웠다는것도 헛된 망상이에요.
헛간에 가보세요.
아직 날개옷이 그대로 있잖아요!
날개옷 불태웠다는 환상은 하나님이, 날아 다니면 혼내주겠다는 협박에 놀라, 스스로 만든 환상이예요.
근데 그 하나님을 나무꾼이 만들었데요'

cf) 이 글은 집근처를 자전거로 하이킹하면서 문득 떠오른 아이디어에 기대어서 썼다.

본래는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의 내용이 나무꾼 중심의 애뜻한 사랑이야기로만 소비되고 있었는데, 언젠가 부터 여자들이 나무꾼 이야기의 능동적 소비자로 등장하면서, 여자들에게 나무꾼이 힘좋고 충직한 욕망하는 남자의 상징으로 소비된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렇다면 나무꾼 이야기를 좀더 여성적 입장으로 재구성한다면 상징적 의미가 풍성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앞에 써 놓은 가짜 나무꾼 이야기는 본래 나무꾼 이야기를 여성 중심적 이야기로 해석하려고 억지로 만들어 놓은 거다.

그리고 '우연성의 개념' '배치의 행동학' 등은 요즘 듣고 있는 서강대 이정우 철학과 교수의 인터넷 강의에서 얻어온 아이디어들이다. 그에 따르면 최근의 과학적 성과들은 '우연성'이 세계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라는 것을 확증해 준 단다. 나는 과거에는 '필연으로 짜인 인과적 세계'라는 것을 믿는 일종의 합리적 이성주의자 였다. 그러다가 니체를 읽으면서 '세계는 우연적이고, 우연성을 축복이라고 생각해야 한다'는 주장을 접하게 되었다.

'배치의 행동학'은 노마디즘의 주요 개념중 하나다. 이건 너무 뻔해서 설명할 필요조자 없다. 주변환경을 바꾸면 행동이 바뀐다는 거다. 그런데 이때 나는 환경의 영향을 받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환경을 구성하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나는 내 주변과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 내 주변과 결합된 존재라는 것이 기존의 '자극-반응'이라는 기계론적 행동학이론과 다른 점이다. 그래서 기계론적 행동학이 나라는 주체가 수동적이면서도 선명하게 정립되는 모순이 있는 것에 비해서, 배치이론에서는 나라는 주체의 경계가 불투명하다. 그래서 이 이론에서는 나와 주변을 분리하지 않기 때문에 나와 결합된 배치에 따라 '소리기계, 수영기계, 이동기계 등으로' 부른다.

이 기계라는 개념은 신체 또는 유기체라고 부를수도 있다. 이런 식으로 인간이라는 주체-인간중심적 사고-를 해체하기 때문에, 비인간적인 어떤것이라도 기계, 신체, 유기체라고 호명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내가 쓴 이 글은 '페미니즘 신체' '페미니즘 기계' 페미니즘 유기체'라고 부를 수 있다. 이 글이 어떤 사람과 결합하여, 인테넛과 결합하여, 종이와 결합하여 어떤 작동을 일으킨다면 이 글은 '기계, 유기체, 신체'다.

그러므로 배치의 행동학에서는 인간을 완전히 지워버린다. 근대 이성이 정립한 '인간주체' '나머지는 정복해야할 대상' 이라는 사고방식을 포스트모더니즘이 어느정도 까지 해체시켰는지 확연이 느낄 수 있다. 근대이성의 결과로서 초래된 자연파괴, 세계1-2차 대전의 인간자신에 대한 대량살육 등을 극복할 새로운 사유를 포스트모더니즘은 열망한다. 그런 결과들로서 산출된 이런 식의 사유가 새로운 대안적 세계, 삶을 구성해 줄 구원인지, 아니면 근대이성의 또 다른 변종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나는 이런 수 많은 시도들이 결국 근대이성을 극복하는 의미있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도 모더니즘을 파괴하는 작동자기계다.

cf) 글을 다 쓰고 인터넷을 검색하면서 이미 '나무꾼과 선녀' 이야기를 여성주의적 시각에서 해석한 책들이 여러권 있다는 걸 발견했다. 그 중 하나를 소개하고 싶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