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여성의 탄생 ---- 환타지에서 현실로
'여자의 변신은 무죄'라는 광고 카피가 있었다.
화장품광고였던지, 의류광고였던지 둘 중의 하나다.
광고카피가 말하는 것 처럼 여자들은 잘 변신한다.
여자들은 평소에도 항상 변신연습에 몰두한다.
변신을 위한 도구들을 잔뜩 끼고 산다.
우리학교의 예를 들자면,
작년에 엄격한 용의규정을 풀어주었더니 교실이 금방 미용실 수준으로 바뀌었다.
화장품 부터 시작해서 고대기 까지 갖추어 놓고 시간날때마다 온갖 변신실습을 했다.
여자애들끼리 하는것에 싫증이 나면, 애먼 남학생들까지 실습의 대상으로 삼아 놀았다.
물리적 수준에서의 변신만 잘하는게 아니다.
행동의 변화도 엄청 빠르다.
체육대회때 응원준비를 시켜보면 금방 알 수 있다.
남학생들이 백년이 걸려도 못할일을 여학생들은 뚝딱헤치운다.
어디서 만든건지 알록달록 응원 도구도 만들어 나오고,
신기하게 응원가며, 응원동작 까지 만든다.
남학생들은 그저 멍청하게 쭈삣거리고, 두리번거릴줄 만 안다.
여자들의 이런 탁월한 변신능력은 어디서오는가?
그것은 아마도 그들의 풍부한 상상력에서 오지 않는가라고 막연하게 생각한다.
10대의 여자애들은 거의 꿈속에서 산다고 보아야 한다.
이러저런 질문을 해보면 이 아이들이 현실의 존재인지 의구심이 든다.
꿈속을 붕붕 날아다닌다.
수퍼쥬니어 누구를 누군가가 찜해놨다고 선포하면, 그것에 대한 독점적 권리가 아이들의 생활공간에서 실제로 통한다.
공상적 상상력과 현실을 대충 뒤 섞어서 사는게 순정한 10대 소녀들의 삶이다.
드라마의 로맨스 이야기로 수다를 떠는데 많은 에너지를 소비한다.
독서의 대부분도 소위 하이틴 로맨스 어쩌고하는 것들로 도배되어 있다.
상상속의 꿈을 현실과 구분하지 않고 사는 이 순정한 소녀들이 결국 어른이 된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이들에게 일종의 도약이다.
환타지의 세계에서 현실로 나오는건데, 이 행위에는 간극을 건너 날아가야하는 비상이 필요하다.
환타지와 현실의 간극이 워낙 넓고, 깊고, 심오하다보니 자신의 전부를 거는 도박이 필요하다.
순정한 소녀가 여성으로 탄생하는 과정이다.
자신의 모든걸 거는 도박 행위는 그녀들이 현실에 대한 정밀한 대차대조표를 만들도록 요구한다.
이 과정에서 소녀에서 여성으로 바뀐 존재들은 현실에 대한 인식이 명확하고 심오해진다.
피상적으로 약해 보이는 여자들이, 실제 현실에서 남자들 보다 훨씬 현실적인 강고한 힘이 있는 것은 불가피한 결과로 보인다.
존재의 심연으로 부터의 불안을 거친 여자들은 결국 이중적 존재가 된다.
순정한 소녀적 환타지의 상흔에 흔들리면서도, 현실에 대한 냉정하고 정밀한 인식을 가진 존재가 된다.
환타지와 현실의 간극때문에 고통스러운 우울증에 사로잡혀 있어야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냉철한 현실주의자라는 지킬과 하이드적 분열이 상존한다.
이에 비해서 남자 아이들은 어렸을적 부터 현실에 고정된 존재다.
여자 아이들에 비해서 어른이 된다는 것에 도박을 건 비약 같은걸 덜 요구 받는다.
그냥 대충 여자를 만나고 어른이 된다.
존재의 심연으로 부터의 위협적 감각이 없이 어른이 된다.
여자 아이들이 사랑이라는 것은 존재의 카오스적 위협이라는것을 아는 심오함이 있는데 비해서, 남자 아이들은 사랑에 대해서 너무 피상적인 채로 머문다.
2. 식민주의자 여성 ---- 남성의 거세
이렇게 서로 다른 여자와 남자가 만나면 무슨일이 발생하는가?
심오하고 다중적인 냉철한 현실주의자 여자와 피상적인 남자라는 충돌이 발생한다.
여자들의 심오함을 남자들은 극복하기 힘들다.
대부분의 경우 남자들이 아는 자신을 여자들은 더 깊고 뿌리 깊게 파악하고 있다.
남자들이 자신의 존재감을 확보하기 위해서 만들어 내는 이상적 자아상이 얼마나 허약하고, 현실 기만적인 것인지 여자들은 단번에 알아챈다.
남자들이 자신의 존재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 현실속에서 분투하는 그의 이상적 목표가 얼마나 말도 안되는 뿌리도 깊이도 올바름도 부재한 허구적인 것인지를 여자들은 단번에 안다.
여자와 남자가 만나면 남자는 여자에게 놀이감으로 전락할 수 밖에 없다.
남자는 여자가 지배하는 식민지적 영토화로 가는 길을 피할 수 없다.
여자가 남자를 영토화하는 방식은 어떤것일까?
남성을 거세(이상적 자아정체성을 해체)하는 거다.
여자와 남자가 충돌하면 어떤 경우든 남자는 여자의 심오함을 이겨낼 수 없다.
설득력 있는 논리로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고 라고 주장해봐야 대부분의 경우 여자들의 '아! 그러세요'라는 직관적 감각에 기댄 판단능력을 돌파할 수 없다.
남자가 제시하는 주장의 핵심을 이성적 논리로 무찌르려고 하지 않는다.
남자들간의 논쟁은 어떤 주장의 핵심에 대한 반례를 들이 밀면서, 그 핵심을 둘러싸고 서로의 논리적 정합성에 기댄 투쟁을 한다.
이에 비해서 여자들은 남자들의 주장을 몇가지 사소한 주변적인 것들로 간단하게 해체해 버린다.
결코 논쟁의 핵심적 사안에 매몰되지 않는다.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그냥 남자의 주장을 긍정해준다.
이 경우는 더 치명적이다.
'네가 그래봐야 내 눈에는 내 모순이 보여, 그렇지만 그냥 너를 긍정해주는 거야!'라고 놀아준다.
어떤 경우든 남자의 정체성은 해체되고(거세되고) 여자의 유희대상으로 전락하는걸 피할 수는 없다.
남자들은 여자들의 이런 모습을 보고 여자들이 깊이가 없이 피상적이라고 말한다.
여자들은 정작 진실이 깊이 있는 심오함에 있는것이 아니라 얕은 표면의 껍데기에 있다는 것을 안다.
진실은 표면의 항상 변하는 다채로운 모습속에 있다는 것을 안다.
니체식으로 말해서 끊임없이 변하고 새롭게 생성되는 표면의 가벼움이 진리라는 것을 여자들은 본능적으로알고 있다.
진실이 껍질의 표면이라는 것을 아는 여자들은 그래서 역설적으로 심오하다.
진실이 심오한 내부 어딘가에 고정된 형태로 존재한다는 믿음을 가진 남자들은 그래서 현실에 항상 속게 되어있다.
이걸 아는 여자들은 안타까워 하면서 그런 남자들을 연민의 마음으로 사랑한다.
남자들의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한 현실인정 투쟁은 결국 실패하고 상처를 입는다.
남자들은 이런 자아 정체성을 포기하면 자기존재감을 느낄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이 설사 잘못된 오류의 길이라는 것을 알때 조차도 그것에 고정된다.
그러면서 계속 자신에게 상처를 입힌다.
남자들의 이런 상처를 여자들은 사랑한다.
여자들은 결코 자족적 존재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것에서는 자기 존재를 확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자들의 남자들에 대한 사랑이란 여자들 자신을 위한 일종의 유희가 된다.
이렇게 유희의 대상으로 전락한 남성이란 거세된 - 자아정체성이 부재한 - 여자들의 식민지로 영토화된다.
남여 관계에서 발생한 거세를 극복하고, 거세이전의 상태인 자아정체성이 확보되는 것은, 단지 관계 외부의 사회적 영역에서 구축된다.
그래서 여자들은 남자들이 현실에 기만당하고 있다는 것을 앎에도 불구하고 남자들의 사회활동을 묵인하거나 지원해 준다.
3. 식민화된 영토의 외부 / 식민화된 영토의 내부
(인생의 목적은 끊임없는 전진이다.밑에는 언덕이 있고 냇물도 있고 진흙도 있다.걷기 평탄한 길만 있는 게 아니다.먼곳을 항해하는 배가 풍파를 만나지 않고 조용히 갈 수는 없다. 풍파는 언제나 전진하는 자의 벗이다.차라리 고난 속에 인생의 기쁨이 있다. 풍파 없는 항해, 이 얼마나 단조로운가! 고난이 심할수록 내 가슴은 뛴다. ㅡ 니체 Friedrich Wilhelm Nietzsche)
그렇다면 남자의 존재가 이렇게 여자에 의해서 식민화된 상태를 벗어나는 길은 무엇일까?
제일 확실한 방법은 자신의 존재를 지워버리는 거다.
여자와의 관계에서 쌓아온 자신의 자아정체성으로 표기된 기득권을 포기하는거다.
이 과정은 순정한 소녀들이 여자들로 태어나는 과정 만큼이나 큰 비약을 필요로한다.
순정한 소녀가 환타지의 세계를 버리고 현실의 세계로 비상하는것 처럼 큰 변화를 필요로한다.
자신의 모든것을 버리고 자신을 새롭게 재구성 할 수 밖에 없다.
이런 시도들은 당연히 남녀의 생존을 건 투쟁을 발생시킨다.
개인적 수준에서는 지금까지 향유했던 물리적 심리적 모든 편익을 도박으로 걸어야 한다.
사회적 수준에서는 이런 시도가 유기체화된 사회시스템에 대한 공격으로 읽히기 때문에 시스템의 반발을 극복해야 한다.
식민화된 자신을 극복하려는 이런 시도들은 전쟁상태에 가깝다.
관계 당사자 모두가 카오스적 무질서와 혼란의 구덩이에 빠져든다.
피아도 구분되지 않는다.
상대에 대한 공격이 자해를 유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많은 경우 예상하지 못한 이런 카오스에 부딪힌다.
현실이 예측된 스토리라인을 벗어난 이런 무질서한 상태에 놀란 남자들은 겁에질려 전쟁을 포기한다.
카오스적 전쟁 상태에서 발생하는 우연적 무질서에 굴복하지 않고 경계를 넘어서면 새로운 외부가 탄생한다.
식민화된 영토의 외부가 탄생한다.
이 새로운 영토는 그러나 자신을 지우고, 모두 상실하는 과정을 거쳐 경계를 넘어서야 만 주어진다.
황량한 사막의 형태로 주어진다.
그곳을 오아시스로 만드는 것은 또 다른 실험이다.
여자에 의해서 식민화된 자신을 탈영토화 시키는 모험은 이런 전쟁상태를 극복해야한다.
새롭게 열린 식민지의 외부는 자신의 정체성을 새롭게 구성하면서 구축된다.
이런 과정이 주는 비약을 통해서 남자는 여자와 같은 다중적 인격성과 함께 현실에 대한 냉철하고 정밀한 인식을 획득한다.
결론적으로 여자로 부터 식민화된 유희의 대상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일종의 여자되기 과정이다.
이렇게 탈 식민화의 과정이 일종의 전쟁상태이고,
그 과정에서 잃게되는 상실이 너무 크다는 것은 피할 수 없다.
그래서 두번째 방법은 제대로 된 식민주인을 모시는 길이다.
어짜피 남자가 여자를 극복하는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포기하는거다.
제대로 된 여주인을 만나 주인의 충실한 유희대상이 되는 거다.
그 안에도 다양하고 풍요로운 생산적 영토가 있음을 긍정하는거다.
많은 세속적 기준으로 현명한 남자들이 선택하는 길이다.
cf) 이 글을 쓰면서 진리개념은 니체에게서 차용했다. 니체는 진리가 생생한 항상 변화하는 현실 너머 어딘가에 있다는 생각, 플라톤의 이데아를 상정하는 거와 같은 형이상학적 생각이 병리적 근대의 뿌리라고 보았다. 그는 이런 진리관을 상정하면 현실을 부정하는 니힐리즘적 허무주의를 발생시킨다고 생각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진리관을 수용하면, 공인된 어떤 절대적 진리 기준에 적합하지 않은 차이나는 외부의 것들을 폭력적으로 억압하는 논리에 빠질 수 밖에 없다고 보았다. 이걸 동일시의 논리라고 하는데, 근대시기의 모든 폭력-양차 세계대전, 대량인종학살, 대량자연파괴-이 모두 이런 동일시의 논리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보았다.
이 글의 전체적인 논리적 아이디어는 http://blog.naver.com/paxwonik/40046741023 에서 영향을 받았다. 그의 글에서 상정하는 여자는 잘 교육 받은 지적으로 감수성이 예민한 유한계급 살롱 여주인이다. 그러므로 내 글도 마찬가지로 그런 여자를 상정하고 있다. 그의 글에서는 그런 여자의 대표적 상징으로 버지니아 울프를 들고 있다.
계급적 배경이 다르고, 사회적 상황이 다르면 당연히 이런 글의 현실설명력은 그것에 따라 달라질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경험에 비추어 보건데 한국이 버지니아 울프가 살았던 영국의 빅토리아 왕조 시대와 비슷한 측면이 있다. 빅토리아 왕조시대를 한마디로 정의하면 '얌전을 빼는 시대, 점잖은 척 하기 시대'라고 말한다. 영국신사라는 말이 생겨난 시대라고 생각하면 된다.
남녀 관계가 상보적이고 소통적이기 위해서는 남성쪽의 여성화가 필수적인 것으로 보인다. 탈근대적 철학의 한 흐름에서 '여성되기'를 근대성 극복의 방법론으로 제안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현실은 오히려 남성중심사회가 강요하는 남성성을 내면화한 여성들이 훨씬 많다. 여성이면서도 철저하게 남성적 가치관과 태도를 강고하게 가지고 있는 여성이 태반이고, 남성들은 더 말해 무엇하랴 ! 사회적 성정체성의 관점에서 보자면 여성 1% 남성 99%가 현실에 대한 정확한 진실일거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