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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덜대기

언어 : 언어의 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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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셀 뒤샹 - '샘' Readymade

소변기, 그냥 흔히 볼 수 있는 남성의 소변기이다.
그런데 하나 다른 점이 있다면 왼쪽 하단에 'R. Mutt'라는 제조업자의
서명이 있다. 그래서 하루 아침에 이 평범하고 대량생산(복제)된
이 변기는 작품으로 생명력을 얻었다. 이 변기에 생명을 불어넣어준
사람은 다름아닌 뒤샹이었다. 서명한 사람이 뒤샹이었으니까...

사회적으로 반향을 일으킨 이 '샘'이란 작품으로 인해 'Readymade'
라는 용어가 미술사에 기록되게 되었고, 한 화가의 인식의 전환에
의해 현대미술은 시작하게 되었다.

뒤샹의 이 놀라운 뻔뻔스러움은 벌거벗은 임금님의 재단사를 떠올리게
하지만 그는 전통미술에 대한 정의를 바꿔 놓았으며 그 인식의 전환,
전통미학을 부정한 반예술적 행위는 혁명이라 할 수 있다.

"예술품이란 색을 칠하거나 구성할 수도 있지만 단지 선택만 할 수도 있다." - 뒤샹
"그것들은 미학적 유쾌함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각적 무관심에 대한
반발이었다. 동시에 좋거나 나쁜데 대한 감각을 완전히 배제한 완전한 마취였다." - 뒤샹
출처 :
http://blog.naver.com/siva0000/5419637

(이것도 진중권의 미학강의에서 배운건데, 1917년 뒤샹의 이 작품이 미술의 표현형식을 완전히 바꾼 작품이란다. 진중권 본인이 독일 어디 미술관에서 이 작품을 직접 봤는데, 그는 그냥 공장에서 만들어진 변기 이상의 아무런 느낌을 이 작품에서 못 느꼈단다. 그렇기는 하지만 뒤샹이 말하고자 한 의도 - 물감, 붓, 화판이라는 전통적인 표현양식 만이 미술이다-라는 인식을 이렇게 확실하게 전복한 작품은 없단다.)



언어가 만들어내는 환상

1. 인간의 신체나 감정 상태에 대한 자의적 환상

나는 졸립다. 나는 흥분한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들은 우리의 사고를 왜곡하는 경우들을 발생시킨다.

예를 들어 '나는 졸립다'라는 표현에서 '졸립다'라는 행위의 주체는 '나'다. 그러므로 이 표현에서 '졸립다'라는 현재 나의 상태가 내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에 의해서 이루어진 행위가 된다. 그러나 엄밀하게 따져보면 '내가 졸리운'것은 내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에 의한 행위가 아니다. 나는 '지루한 강의' '지루한 영화' '지루한 책' 또는 '어젯밤의 수면 부족' 등과 같은 외부적 환경에 의해서 졸리운 상태에 있다.

그러므로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어젯밤의 수면부족이 나를 졸리운 상태로 되어지게 하고 있다'라고 수동태로 말해야 한다. '나는 졸립다'라고 능동적으로 말하면 조는 행위에 대한 책임이 조는 행위를 하는 나에게 귀속된다. 졸리운 환경이나 원인에 대한 사고가 차단되어 '졸리운 행위'를 효과적으로 방지할 사실적 조처들을 상상할 수 없게 만든다.

사람의 신체나 감정상태를 표현하는 측면에서 영어는 우리말 보다 훨씬 정확하다. 예를 들어 영어에서는 감정상태에 대한 표현에서는 대부분 수동태를 사용한다.

나는 흥분한다. I am exciting(x). I excit(x).

나는 흥분 되어진다.  I am excited(0).

나는 음악에 관심이 있다. I am interesting in music(x). I interest in music(x)

나는 음악에 관심이 가도록 되어진다 I am interested in music(0)

위의 예에서 보듯이 영어에서는 감정상태를 주어의 자발적 행위가 아니라, 외부적 환경에 의해서 발생된 것으로 기술하는 것이 원칙적이다. '나는 슬퍼한다'가 아니라 '나는 어떤일에 의해서 슬프게 되어진다'라고 표현하는 성향이 강하다.

이에 비해서 우리 말은 감정이나 신체상태에 대한 지나친 능동태적 표현 경향을 가지고 있다. 이런 과잉능동태 서술 성향은 외부 환경에 의해서 유발된 자신의 신체나 감정 상태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방해한다. 수동적으로 발생하는 신체나 감정상태에 관련된 많은 일들이 능동적으로 표현됨으로서 발생시키는 인식상의 오류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일상언어를 끊임없이 다듬을 필요가 있다. 그래야 현실에 대한 파악이 보다 분명해지고, 그런 보다 정확한 인식속에서 보다 분명한 실천행위를 생산할 수 있다.

2. 소유적 언어가 만들어 내는 환상

내여자. 내남자.

우리가 일상적으로 가장 많이 사용하는 잘못된 언어적 표현의 하나다. 이 말에 따르면 상대가 나의 소유물로 전락한다. 집, 책, 돈, 책상 등과 같은 어떤 물질적 대상은 소유관계로 나타낼 수 있다. 소유물이므로 나는 이런 대상들을 내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다. 남에게 팔수도 있고, 조건없이 양도할 수 도 있고, 불태워 버릴수도 있다.

인간은 어떤 인간의 소유물로 전락할 수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이사람은 내 여자입니다'라고 표현한다. 이런 표현이 무의식중에 상대에 대한 또는 인간에 대한 잘못된 소유관계적 사고방식을 낳게 된다. 서로 일정한 관계속에 있는 사람들이 무의식중에 상대를 소유관계로 파악하는 많은 경우들이 가정내에서 발생한다.

예를 들어 '내자식'이라는 표현에서는 부모와 자식간의 서로 독립적 인격체로서 존중의 태도가 말살되기 쉽다. 그러므로 이런식의 잘못된 표현에 대한 비판의식이 없다면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상대를 소유관계로 취급하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 상대를 '나의 무엇'이라고 파악할 때, 상대를 독립적인 인격체로 다루지 않고, 상대가 독립된 개별적 인격체라는 인식을 상실한 채로 무의식 중에 상대를 소유물로 취급하는 치명적 오류를 범할 수 있다.

언어에서 인간들 사이의 관계를 소유관계로 파악하는 습성이 가지는 폐해는 '에리히 프롬'과 같은 무수한 심리학자들에 의해서 충분히 지적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상생활의 언어가 여전히 인간을 물적 대상으로 파악하는 언어로 범람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의 일상생활이 그렇게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현실속에서 물적 대상처럼 거래되고, 처분되는 현실의 반영이 언어속에 그렇게 반영되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인간관계에 대한 언어 표현에서 소유관계적 언어표현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적으로 물신화된 세계에 대한 비판적 성찰과 그에 대한 대안적 언어사용에 대한 상상력이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하나의 대안적 언어사용의 용례로서 가족구성원간의 언어를 사용할 때 우리는 의식적으로 소유관계적 언어사용을 고칠려고 노력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이 아이는 내자식 입니다'라는 언어가 발생시키는 자식에 대한 소유적 환상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나는 이 아이의 보호자 입니다'와 같은 언어 사용이 훨씬 바람직해 보인다.

3. 주어에 대한 강박증적 확신이 만들어내는 환상

번개가 친다. 비가 내린다. 바람이 분다.

이 표현에 따르자면 번개라는 주체가 있고, 이것이 자유로운 의사에 따라서 특정한 장소를 스스로 선택해서 '치는 행위를 한다'라는 잘못된 인식을 불러 일으킨다. 그러나 엄밀한 과학은 말한다. 번개는 자연계의 마이너스 전기장이 플러스 전기장과 서로 우연히 마주 칠 때 발생한다. 따라서 '번개가 친다'라는 말이 불러 일으키는 인식의 오류 때문에 사람들은 번개맞은 사람에게서 무언가 문제를 찾아내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번개 맞은 사람은 이중의 피해자로 전락한다.

'비가 내린다'나 '바람이 분다' 등도 마찬가지로 잘못된 오류 표현이다. 이런 표현들은 비나, 바람이라는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행위자가 있어서 스스로의 자발적 자유의지에 의해서 하늘에서 떨어지거나, 특정한 방향으로 몰려간다는 환상을 불러 일으킨다.

왜 이런 식의 잘못된 언어표현이 발생할까? 그것은 사람들이 세상을 파악할 때 불변하는 확정된 '실체'라는 주어(주체)와 그 '속성'인 술어(동사)라는 오래된 언어 습관에 길들여져 왔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하늘이 파랗다'와 같은 표현을 보면 '하늘'이라는 확정적 실체가 있고, 이 고정불변하는 실체는 '파랗다'라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파악한다. 여기서 하늘이란 실체는 무엇일까. 어젯밤의 별이 총총한 하늘일까? 지난 여름의 먹장구름이 잔뜩 드러워진 하늘일까?. 아니면 지난 추석때의 보름달이 휘영청 했던 하늘일까?. 그리고 어디서 어디까지가 하늘일까? 인간의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하늘일까?. 아니면 우주 전체를 하늘이라고 할까?

'하늘이 파랗다'라는 진술을 확증해 줄수 있는 '하늘'이라는 실체를 우리는 어떤 식으로도 고정불변한 그 어떤 것으로 확인할 수 없다. 고정불변한 실체로서 확증할 수 없다보니, 그 속성조차 불안정하기는 마찬가지다. '하늘이 파랗다'라는 표현이 잘못된 오류적 표현은 아니지만 '하늘'의 속성을 정확하게 기술하고 있다고 할 수도 없다. 색깔이라는 측면에서만 보더라도 파란 '하늘'보다는 검은 '하늘'이 하늘의 보다 본질적 속성이라고 보아야 한다. 파란 하늘은 낮시간의 일부분이지만, 검은 하늘은 모든 밤과 먹구름 낀 낮의 하늘을 포괄할 수 있다.

불변하는 어떤 고정된 실체가 있고, 그 고정불변하는 실체의 속성으로 세상을 기술하는 모든 언어로 부터 발생하는 인간의 인식은 오류투성이일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주어의 '실체성'에 대한 강박증적 언어사용 습관에서 발생하는 잘못된 인식에서 벗어나 보다 올바르게 사유할 수 있을까?

형이상학적 진리체계를 해체하는데서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근대적 이성에 의해서 구축된 형이상학적 진리체계는 주어의 실체성에 대한 굳건한 믿음에 근거하고 있다. 앞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주어의 독립적 실체성은 불안정하기 짝이 없다. 칸트나 헤겔 또는 전통유교철학 등이 만들어낸 관념론적 형이상학을 해체하고,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보다 겸손한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들뢰즈의 말을 빌리면, 세상은 무질서한 층층의 면들로 구성되어 있고,  그런 무질서 속에서 질서 있고 조직화된 '생물학적 유기체' '언어적 사유체계(물질적 기계, 사회조직, 도덕이나 법률체계를 포함하는 개념)'가 끊임없이 발생하고 사라진다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을 전제한다면 우리는 고정 불변하는 절대적 실체라는 것에 대한 환상을 버리고, 모든걸 임의적이고 우연적인 어떤 것으로 파악할 수 있고, 그런 임의성을 긍정한다면 니체가 말한 차이의 반복을 실천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가치체계나 세계관에 대한 절대적 신뢰를 버리고, 외부의 이질적 사실들에 대해서 보다 유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그리고 이런 토대 위에서 편안하게 전과 다른 차이가 발생하는 실천행위의 세계속에 뛰어들 수 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런 단순한 사유체계 하나를 왜 받아 들이지 못할까?

나는 그것이 공포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오랫동안 익숙해진 사고체계나 가치관을 버리면 자기 또는 세계가 무너진다고 생각한다. 기존의 사고체계 속에서 쌓아올린 모든 기득권을 상실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이 새로운 변화에 저항하도록 만드는 심리의 뿌리이다.

이걸 들뢰즈식으로 설명하면 사람들이 굳어진 감각운동방식에 고착되어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도 있다. 들뢰즈는 오랜 시간동안 형성된 자극에 대한 정형화된 반응방식을 감각운동이라고 말한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사회의 다수가 아무런 의문없이 받아 들이는 상식적 사고체계라고 할 수 있다. 들뢰즈는 한번 형성된 감각운동은 새로운 환경-이질적 타자성-에 의해서 자극 받지 않는한 잘 깨어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들뢰즈는 배치의 변화라는 용어를 도입하여 굳어진 감각운동방식에서 탈출하여 새로운 행동을 산출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전통 영미계열의 학자들은 인간의 행위를 자극에 대한 반응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인간의 행위를 단순하게 자극에 대한 반응이라는 관점에서 해석하는 틀이 인간을 너무 수동적으로 파악한다고 비판한다. 그러면서 능동적으로 행위를 산출하고 생성하는 인간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행위가 관계적 배치의 변화때문에 발생한다고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걸 좀더 단순하게 말하면, 기존의 관계망에 고착되지 말고, 관계망을 항상 새롭게 능동적으로 짜는 일종의 도약-기존의 세계라는 휘장을 뛰어 넘어서 새로운 배치속에 자신을 접속시키는 새로운 시도가 행동의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라고 말한다.

기존의 세계라는 휘장을 뛰어 넘어가면 천개의 새로운 신세계가 열린다는 들뢰즈의 말처럼, 우리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긍정, 자신에 대한 긍정으로 현실의 벽을 웃으면서 넘을 필요가 있다. 이질적인 타자성에 자기를 맡기고 그 타자성과 함께 어울려 유영하는 자유스러운 인간이 가장 행복하고 편안한 최상의 인간존재 양태라고 생각한다. 그런 측면에서 인간은 정형화된 감각운동방식을 지속적으로 변화시킬 필요가 있다. 이질적 타자와 소통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감각운동방식을 새로운 배치와 접속에 열어둘 필요가 있다. 그런 과정에서 인간은 타자에 대한 동일성의 폭력이 아닌, 진정으로 의미있는 민주적 소통을 할 수 있을것이다.

자기자신에 대한 긍정(운명애), 더나아가 새로운 변화에 대한 긍정적 희망을 잃지 않는 자세가 변화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게 해주는 힘이다. 니체식으로 말해서 어린아이가 되어서 매번 새로운 놀이를 즐길때 인간은 비로소 오버맨쉬(over man)로 변화할 수 있다. 낙타의 인내심도 아니고, 사자의 강력한 부정의 힘도 아니고, 오직 어린아이 되기가 짜라투스트라가 말하는 오버맨쉬로서의 새로운 인간의 출현이다.


cf)
 언어의 불완전성에 대한 논리를 처음 접하게 된건 언어학을 공부하면서 부터다. 언어학의 개론에서 부터 시니피앙(기표, ex 개라고 쓰여진 단어나 음성)과 시니피에(기의, ex 개라는 실제 사물)는 일치하지 않는다는 이론과 접한다. 개론의 첫 입구에 서 있는 소쉬로는 시니피앙이 의미를 지시하는 것은 시니피에들 간의 차이 때문이라고 한다. 이게 라깡에 이르면 시니피에와 시니피앙의 끝 없는 미끄러짐을 프로이드이론과 연결한다.
예를 들어 '아버지는 내가 공부를 잘하기를 바란다'라는 시니피앙은 '아버지는 내가 운동을 잘하기를 바란다, 아버지는 내가 돈을 잘 벌기를 바란다, 아버지는 내가 좋은 직장을 얻기를 바란다, 아버지는 내가 착한 여자와 결혼하기를 바란다, ------와 같은 시니피에들로 끝없이 분열한다는 거다. 그래서 시니피에와 시니피앙은 결코 완전한 합일에 도달할 수 없다는 거다.
프로이드의 무의식이론에서 아버지라는 기표는 실제 아버지이면서, 지배적인 사회체제를 의미한다. 지배적인 사회체제란 당연히 자본주의 사회 시스템을 가리킨다. 내 욕망과 아버지의 욕망이 항상 이런식으로 미끌어지는 관계이니, 나는 결국 분열할 수 밖에 없다는 거다. 이런 논리를 가지고 자본주의 사회체제를 해석하면, 자본주의사회체제는 끝없이 분열을 발생시키는 체제라는 해석이 나온다. 이게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이 공유한 자본주의에 대한 인식이다.
나는 언어학의 이런 논리들을 처음 접하고 일종의 절망 비슷한 허무주의적 정조를 느꼈다. 내가 누군가와 완전한 의사소통을 하는것이 본질적으로 불가능하구나 하고 절망했다. 그러나 요즈음은 그런 부정적 허무주의-부정적 니힐리즘을 다른 차원에서 생각할려고 노력한다.
완벽한 소통에 대한 전제가 사실은 일종의 근대적 합리주의 이성이 만들어 놓은 환상이다. 근대적 이성은 우리가 올바르게 사유한다면 절대적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이건 말짱 거짓말이다. 진리라는 것 자체가 상대적이고, 임의적이고, 상황적이라는 것을 요즈음은 그냥 편하게 받아 들인다. 세상을 도그마에 갇혀 독단론적으로 보지 않고, 세상을 차이의 생성이라는 태도로 보기 시작하자 훨씬 세상이 말랑말랑해졌다.
요즈음은 열심히 그 주변에서 놀고있다.
(근대이성이 구축한 절대적인 진리체계에 대한 확신은 20세기의 기괴한 폭력들의 근본 뿌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