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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덜대기

안티오이디프스


오이디프스 콤플렉스라는 말이 있다.
설명하자면 이렇다.
(여성에 해당하는 오이디프스 컴플렉스의 대립 짝은 엘락트라 콤플렉스다. 남자아이 자리에 여자아이, 아버지 자리에 어머니를 대입하면 된다)

'아이가 어린시절 처음으로 여자를 욕망한다.
당연히 그 대상은 어머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버지의 소유물이다.
다시 말해서 어머니는 금지의 최초 대상이다.
어머니를 욕망하면 거세당할 거라는 공포가 주입된다.
그래도 어머니에 대한 욕망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찿아낸 방법이 아이가 자기와 아버지를 동일한 존재라고 생각하는거다.
자기와 아버지를 동일시한다는 것은 아버지가 가진 세계관 가치체계 등을 그대로 수용한다는거고, 아버지가 가진 세계관이나 가치체계는 그 사회가 부여한 세계관이나 가치체계다.
그러므로 아이는 두가지 수준에서 가치체계를 내면화한다.
첫째는 아버지에 의해서 이고, 이 수준에서 내면화된 가치체계를 자아라고 한다.
둘째는 아버지를 규제하는 더 큰 존재인 사회적 수준의 가치체계다.
이 수준의 규제 장치를 초자아라고 한다.

다시 말해서 아버지는 자아로 존재하고, 그런 아버지의 아버지 즉 아버지의 외부에서 아버지를 규정하는 기존 사회의 가치체계는 초자아라고 부른다.

아이의 욕망은 이런 자아와 초자아에 의해서 이중적으로 억압당한다.
그렇게 억압당한 욕망이 무의식이라는 형태로 의식의 밑바닥에 숨는다는 거다.

그런데 자아라는 의식이 빙산의 수면위 부분이라면, 억압당한 무의식은 빙산의 수면 아래에 해당한다.
빙산이라는 비유를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빙산의 수면위 부분은 빙산의 수면 아래에 비해서 턱없이 작다는 거고,
다른 하나는 빙산의 수면위 부분이 빙산의 수면 아래 부분의 운동에 의해서 절대적인 영향을 받는다는 거다

그래서 프로이드는 인간의 모든 행동을 무의식의 작용이라고 해석한다

이런 논리를 따르면 모든 인간은 사회적으로 주입된 가치체계와 그것을 전복하려는 무의식의 욕망에 시달리는데, 결국은 잠재된 무의식의 욕망이 자아나 초자아의 억압을 뚫고 변형된 형태로 행위라는 결과로 나타난다.

자아나 초자아에 의해서 억압된 잠재욕망이 변형된 행위라는 결과로 나타나는 수준은 당연히 사회나 제도가 결정한다.

예를 들어 어머니에 대한 잠재된 욕망은 자아나 초자아에 의해서 억압되므로 어머니를 닮은 여자와 결혼하는 형태로 해소된다. 잠재된 무의식의 욕망과  자아나 초자아의 타협의 결과가 행위라는 거다.'

그런데 왜 이름이 오이디프스 컴플렉스냐고?

그리이스 신화에 오이디프스 대왕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오이디프스의 아버지가 왕이었는데, 이 왕이 매우 아름다웠다.
이 왕의 동생이 자기 형을 죽이고 자기가 왕이 되었다.
당연히 형의 아름다운 왕비는 형을 제거한 동생이 차지하였다.
오이디프스는 어린 나이에 왕궁에서 쫒겨났다.
오이디프스는 우여곡절을 겪고 자기아버지를 죽인 아버지의 동생 즉 삼촌을 죽이고 왕이 된다.
당연히 아버지의 왕비였다가 삼촌의 왕비가 된 오이디프스 어머니는 이제 오이디프스가 차지한다.
나중에야 이 사실을 안 오이디프스는 운명의 장난을 저주하며 자기 눈을 파낸다'

자기 어머니와 결혼한 신화 이야기다.

오이디프스가 자기 눈을 파낸다는 것은, 눈이 욕망의 핵심이라고 파악했기 때문이다.
눈이 없다면 욕망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이다.

남자들의 성적 욕망의 90%가 시각적 욕망이라는 해석도 여기에 근거한다.

그럼 왜 콤플렉스냐고?

콤플렉스를 우리말로 해석하면 복합체다.
인간의 행동이 초자아, 자아, 무의식의 억압된 욕망이 복잡하게 뒤엉켜 나타난 복잡한 복합체라는 말이다.

이런 프로이드의 이론은 라캉한테는 '무의식은 언어다' 알뛰세한테는 '무의식은 지배 이데올로기다' 등과 같이 수 많은 형태로 변주 되어 왔다.
오늘날 세상을 해석하는 모든 인문학이 프로이드에게서 크게 자유롭지 못할 정도로 프로이드 이론은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프로이드 이론은 또 하나의 우리를 구속하는 형이상학적 진리체계다.

프로이드의 이론에 따르면 인간의 내면은 초자아와 욕망이 싸우는 지옥이다.
한순간도 편안한 평화를 누릴 수 없다.

왜 이렇게 프로이드는 지옥과 같은 인간의 내면을 발견할 수 밖에 없었는가?

프로이드가 연구의 대상으로 삼았던 사람들을 보자.
프로이드 이론을 형성하는데 중요한 전기가 되는 이론은 히스테리에 대한 연구에서 시작한다.
프로이드가 히스테리를 연구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그의 고객들이 주로 상류계층의 여성 히스테리 환자들이었다.
프로이드가 살던 당시의 오스트리아 상류 사회는 매우 엄숙한 기독교적 도덕률이 지배하던 사회였다.
기독교의 기본적인 인간에 대한 이해는 인간이 원죄를 가지고 태어난 죄악의 존재라는 것이다.
인간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죄악의 존재인 자신을 부정해야 한다.
자신을 부정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자신을 학대하면 된다.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면서 행복하게 사는 것은 지옥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자신을 학대하면 학대할수록 휼륭한 인간이 된다.
중세 수도사들은 채찍으로 자신의 몸을 피가 나오도록 학대하면서 희열을 느낀다.
그로테스크하지 않은가?
자신을 학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망들의 충족을 억제하는 거다.
식욕이나 성욕과 같은 욕망들을 죄악시하면서 그것들에 대한 욕망을 억압하는것은 자신의 신체에 대한 부정으로 발전하지 않을 수 없다.
신체에 대한 부정, 육체에 대한 부정.
이것이 당대 오스트리아 상류 사회 여자들이 직면한 현실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히스테리 환자가 안될 사람이 어디있겠는가?

프로이드는 지옥과 같은 내면을 가진 사람들을 연구하고, 그것이 인간의 본질이라고 해석했다.
지옥을 보고 그냥 지옥이다라고 동어 반복을 한것에 불과하다.

프로이드의 이런 암울한 인간이해를 벗어나는 길은 간단하다.
자신을 긍정하는거다.
자신의 욕망을 있는 그대로 아름답고 소중한 생명활동이라고 인정하는 거다.

너무 뻔한 이야기라고.
그렇다.

그런데 현실은 이렇게 뻔하게 굴러가지 않는다.
다 아는 것 처럼, 현실은 지속적으로 인간이 인간을 부정하도록 가르친다.
학교, 미디어, 가족, 종교 등이 꼭 중세시대 기독교의 엄숙한 사제들이 했던것 처럼 인간에 대한 부정을 가르친다.
가부장적 유교윤리가 기독교와 결합하면서 엄숙하고 단단한 '자기 부정의 도덕주의'가 현실의 견고한 이데올로기로 작동하는게 한국의 현실이다.

20여년 전 처음 교직생활을 여자고등학교에서 시작하였다.
갓 20대 중반을 넘긴 나는 엄격한 도덕주의자 였다.
그런데 당혹스러운 것은 그 어린 여학생들이 어디서 배웠는지 교태를 부린다는 거다.
나는 그 당시에 그건 나쁜 죄악이라고 생각했다.
그게 너무도 당연한 살아있는 생생한 생명의 표현이라고는 꿈에도 상상을 못했다.
그래서 진지한 꼰대처럼 그런 행위들을 비난하고 억압했다.
지금 생각하면 어이가 없다.
내가 아마도 아이들에게 상처 준 경우도 있을 것이다.
혹시 나 때문에 히스테리 환자가 된 30대 중반 아줌마들 있을까?

왜 다 지난 20년전을 회상하냐고?

내가 근무하는 학교는 시골 촌구석 학교다.
남여 공학하는 작은 시골 학교다.
이 작은 학교에 짝짓기가 엄청나다.
3학년 여학생이 신입생 남학생 찍어 두기도 하고, 같은 학급 커플들도 있고, 난리가 아니다.
나는 그런 짝짓기를 뒤에서 몰래 몰래 후원한다.
A가 너를 보는 눈이 심상치 않더라 라는 둥.
여기 저기 불을 지르고 다닌다.
그런 나는 학생부장이다.

어느날 엄숙한 어떤 등빨 좋은 50대 아저씨가 교무실에서 냅다 책상을 치면서 소리친다.
'이것이 학교여!'
어느날 착하디 착한 여리게 생긴 40대 어저씨가 자기반 커플 학생들을 교무실로 불러와서 훈계한다.
'야 이자식들아 어디서 그런 더러운 짓 배웠어!'
어느날 40대지만 17살짜리 순정한 소녀성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한 쟌다르크 여선생님이 아이의 뺨을 때리면서 부르르 분노에 떤다
'무엄하도다'

이게 학교의 현주소다.
20년 전의 내가 압도적 다수인게 현실이다.
나도 오랜시간을 분열적인 위선적 존재로 살았다.
그러니 현실이 프로이드의 해석에서 자유롭기는 영 글러버린것 같다.
프로이드여 영원하라!

그렇다고 현실이 절망적인것도 아니다.
실제 아이들을 보면 어른들과는 현저히 다르다.

왜?
그렇게 혼나고도 아이들이 결코 주눅들지 않는다.
그런 건강함이 어디서 오는지 어떤때는 신기하다.
주류사회의 지배적 이데올로기로 부터 자유로운 시골이라는 환경과, 입시의 중압감이 없다는 것이 아이들이 정신적으로 건강한 요인이 아닌가라고 속으로만 생각해 볼 뿐이다.

어떤데?
아이들의 성의식이 엄숙한 꼰대들 보다 훨씬 건강하다.
열심히 사귀다가 어느날 보면 커플이 바뀌어 있다.
'헤어졌냐?'하고 물으면, 아무 구김살 없이 '그랬어요'라고 말한다.
쿨하게 정리되는 경우도 있고, 상처를 받은 모습도 있다.
그래도 다 건강하고 싱싱해 보인다.
길게 사귀어 봐야 6개월 넘기는 커플을 보지 못했다.
심각한 경우로 발전하는 커플은 거의 없다.
자신들의 나이에 맞는 수준에서 열심히 사귄다.

엄숙한 꼰대들의 무의식을 들여다 보자!

술먹으러 아저씨 선생님들과 맥주집에 간다.
서빙하는 아까씨가 섹시한 연예인 누구 닮았다.
침을 질질 흘리면서 연신 채근하듯 말한다.
'진짜 잘 빠지지 않았어? 죽이는데! 꼭 누구 닮지 않았어?'

어느날 어느 여선생님의 느닺 없는 폭탄발언.
'남편 몰래 남자 사귀고 싶어요!'

허걱!
사람이 이렇게 이중적으로 분열되어 있다.
히스테리 환자들이 안될래야 안될 수가 없다.

삶은 그 자체로 순진무구하고 소중하고 아름답다.
윤리 도덕 어쩌고 하면서 순진무구한 아이들을 들볶지 말자.
가능한한 아이들의 윤리나 도덕적 감수성을 존중할려고 노력해보자.

아이들을 오이디프스 컴플렉스의 노예로 만들지 말고, 자유롭게 세상과 교감하게 하자.
그냥 좀 아이들을 자연스럽게 크도록 한번 지켜보자.
그렇게 달달 복지 않아도 지들이 알아서 제대로 다 큰다.
한번 믿어보자.
좀 진득하게 기다려 보자.
그래도 학교도 안무너지고, 세상도 안 무너진다.

(홍세화는 '대한민국의 교육은 자기존재를 부정하게하는 교육이다'라고 말한다. 나는 홍세화의 이런 주장이 계급적 지위상승을 부추기는 입시위주 교육에 대한 비판이라고 생각한다. 나도 어렸을적 그런 말 무수하게 들었다. 공부 못하면 니 아버지처럼 농투성이 된다. 그래서 어렸을적 내 목표가 고등학교 졸업하면 독립해서 내 존재의 근거인 시골바닥에서 탈출하는 거였다.
그러나 나는 현행 학교교육의 좀더 근본적인 문제는 자기를 사랑하도록 가르치지 않는데 있다고 생각한다. 입시중심으로 짜여진 현행 학교교육의 이데올로기는 철저하게 자신을 부정하도록 가르친다. 한명의 성공을 위해서 나머지 99명을 패배자로 만든다. 그 한명 조차도 병들어 있기는 마찬가지다.
나는 이곳 시골학교에서 그런 매카니즘으로 부터 자유로운 학교가 있을 수 있다는 걸 발견했다. 내 교직생활에서 가장 소중한 경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