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추사체. 김영민은 김정희의 추사체가 법고창신의 대표적인 예라고 한다. 김정희의 글씨는 전통의 모든 서체를 치열하게 공부하고, 그것을 뛰어넘어 새로운 글씨의 세계를 열었다고 말한다. 김영민은 김정희의 창신이 피카소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말한다. 거꾸로 피카소가 김정희를 모방한게 아닌지 의심한다.>
올 3월에 지금 근무하는 학교로 왔다.
9월에 근무하던 교장이 정년 퇴직을하고 새로 교장이왔다.
1년도 안되는 사이에 두명의 교장을 경험한 셈이다.
지난 교장은 대단한 애주가 였다.
해만 지면 직원들을 몰고 다니면서 술을 마셨다.
술로 의사소통하고, 리더쉽을 확립하였다.
대개 그렇듯이, 술로 통하는 관계망들은 빈구멍이 숭숭하다.
그 숭숭한 틈들 사이로 여러가지 것들이 들고 나간다.
악평을하는 사람들은 부정적 측면에 주목한다.
호평을하는 사람들은 긍정적인 것들에 주목한다.
새로 부임한 교장은 대단히 성실한 사람이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거의 술을 마시지 않는다.
가끔씩 술로 사람들을 만나기는 하지만, 그것은 극히 예외적인 경우에 해당한다.
생활도 대단히 검소하다.
자신의 원칙에 철저하다.
그것을 뒷받침할려고 분주하게 학교를 스크린한다.
시쳇말로 전임 교장과 술로 대충떼우던 일들이 사단이 났다.
관계의 체가 촘촘해지면서 새롭게 문제로 적시되는 일들이 빈번해졌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이러저런 변화가 생겼다.
제일 큰 변화는 학교환경이 비교적 깨끗해졌다.
세상일이 그렇듯 좋아지는게 있으면 나빠지는 것들이 있다.
전임 교장이 술로 확립한 관계망들에서는 여러가지 척도들이 공존했다.
학교 제일의 척도인 열심히 착하게 기성사회의 규칙을 내면화하는 것.
쉬운말로 열심히 공부하는 범생이가 숨쉬는 공간도 있었고.
그 외부 춤추고, 노래하고, 영화만들고, 노는 공간도 있었다.
그에 비해서 성실한 새로운 교장은 소위 교육체계라는 것의 관료적 서류에 충실하다.
그것이 대변하는 것이란 결국 기존의 질서를 충실히 강제하거나, 그것을 수동적으로 내면화 시키는 행위들이다.
관료적 서류로 뒷받침 되는 행위들은 격려 받는다.
그 외부의 비형식화된 임시변통의 일들은 배제된다.
기성질서가 학교에 부과한 척도가 우뚝서는 모양이 출현했다.
그러다 보니, 기성질서의 바깥 또는 그 외부의 것들이 알게 모르게 억압당한다.
기본적으로 학교란 기성의 질서를 재생산하는 체계다.
그렇다고 그것에만 머물러 있는 체계는 아니다.
또 다른 대안적인 삶들을 모색하고, 창출하는 체계다.
연암 박지원이 '법고창신法古昌新'을 글을 배우는 자세라고 말할때.
법고는 옛것을 읽히는 것이고.
창신은 그걸 뛰어 넘는걸 말했을 것이다.
두주불사의 전임 교장 아래서는 법고창신이 있었고.
성실한 신임 교장 아래서는 법고는 창궐하고, 창신은 여위어 간다.
< 피카소의 게르니카. 피카소의 어린시절, 피카소가 어찌나 그림을 정밀하게 사실적으로 그리던지, 화가 였던 피카소의 아버지가 자기의 모든 화구를 피카소에 물려주고, 더이상 붓을 들지 않았단다. 그의 추상화들은 사실적인 재현이었던 모든 화풍을 일소시킨 날카로운 과거와의 단절이다. 피카소의 창신이란 세계를 보는 전혀 다른 시선을 의미하고, 어쩌면 현대회화의 모든 씨앗이 거기서 잉태된거라고 보아야 한다. 그의 그림들은 사실의 재현이 아니라, 색-면-선들이 그 자체로 자율적인 세계라는 것을 선언한다.>
cf) 두 교장의 리더쉽 차이가 술을 마시는가 아닌가에 근거를 둔 차이는 아닐 것이다.
오히려 본능적으로 세속의 모순이나 역설을 이해할 줄 아는 전임 교장은 그래서 술을 마셨을거다.
언젠가 그가 공개석상에서 정년을 앞두고 교육이 뭔지 더욱 아리송하다고 말했다.
그를 두고 여러가지 비난이 있었지만, 나는 그때 그에게 일종의 연민 같은 뭉클한 감정을 느켰다.
cf) 성실함으로 각을 세운 새로운 교장이 학교에 불러온 변화를 잘 안다.
교육과정이 보다 충실해졌고, 학생들의 기본생활 습관이 보다 나아졌다.
그렇다고 그의 법고 일변도에 전적으로 동의하기는 어렵다.
어제 오후 내내 방학중 밴드부 활동을 두고 얼굴을 붏히며 싸웠다.
서류상의 계획에도 없고, 안전사고의 문제도 우려되니 연습활동을 지원할 수 없단다.
나중에는 서로 언성을 높이다가, 교장이 방학중 연습활동 자체를 허용할 수 없다고 어긋장을 놓았다.
어이가 없었다.
감정이 서로 꼬였다.
본질없이, 말이 엉뚱한데로 흘러 넘쳤다.
유치하게, 감정이 넘치니 말이 정중함을 잃었다.
갈데까지 갔다.
교무실로 돌아와 가만히 있자니.
더욱, 분이 끌어 올랐다.
다른 선생님들한테 내 말만 과장해서 잔뜩 떠벌였다.
분이 좀 삭았다.
방학중 아이들 연습할 때 빵좀 사주라는 것이 원래 요구였다.
괜한 감정싸움으로 빵하나 못 얻고, 초가삼간 태울것 같아 흥분을 가라 앉혔다.
다시 교장실에 들어가 밴드부 학생들이나 한번 직접 만나보라고 예를 갖추어 부탁했다.
다행히 학생들을 만나고 태도가 누구러져 서로 헤헤거리며 헤어졌다.
그렇지만 이런 구태한 벽에 부딪히는 것이 피곤하다.
성실하면서도, 체계의 외부를 상상할 줄 아는 교장은 없을까?
그러면 대한민국 사회에서 교장이 못 되겠지!
cf) 누구나 지적 하듯이 대한민국 교육의 가장 큰 문제는 지나치게 법고에 방점이 찍혀있다는 점이다.
이명박 정권이 난리 법석을 피우는 모든 교육정책은 한마디로 정리하면 법고다.
그것도 편협하게 극우적 가치관에 기반을 둔 협소한 법고다.
소위 개혁정권이라던 지난 10년간도 법고 일변도인건 마찬가지 였다.
이명박 정권의 새로운 법고는 아예 아이들 목을 조른다.
법고는 좀 내려 놓고, 아이들이 현실속에서 이런저런 실패를 거듭하면서 자기 스스로 인생을 설계하도록 기회를 주어야 한다.
결국 그들의 인생은 그들이 살아 내야 한다.
아무리 법고로 철저하게 갑옷을 입혀 세상에 내 놓아 봐야 실패를 피할 수 없다.
그게 세속이고 삶이다.
삶을 대신 살아 줄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된다.
세계 교육의 대안적 모델이라는 핀란드 같은 북구유럽국가들이 왜 가르침을 평가를 주저하면서 교육을 하려고 애쓰는지 눈꼼만큼이라도 세상이 이해해야 한다.
모순이 더 쌓여야 변화의 에너지가 생길라나.
인문의 세상은 이치가 그러하니!
cf) 이 글은 김영민의 책 '보행'에 기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