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타주로서 학교 : <분노로불타는교실 과 차분한배움의교실>
<위의 그림은 구글에서 ‘불타는학교’ ‘차분함배움’이라는 검색어로 그림이미지를 찾아서, 두개의 그림 파일을 몽타주 흉내를 내기 위해서 합성했습니다. 글쓰기 방법론으로서 몽타주에 대한 직접적인 예시를 단순하게라도 직접 제시해 보려는 시도입니다>
Ⅰ. 몽타주로서 글 쓰기
이 글은 불타는학교(분노)라는 주제와 배움의교실(차분함)을 겹쳐서 서술하려는 시도입니다. 서로 다른 그림을 겹쳐서 새로운 정서(사고방식)을 창조할 수 있다는 상상은 벤야민에 의해서 시도된 글쓰기 방식입니다. 근대의 최첨단 도시였던 프랑스 파리를 묘사하면, 자본주의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묘사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서, 파리의 최첨단 백화점을 묘사하는(아케이드 프로젝트) 이런저런 조각들을 겹쳐서 모아놓으면, 저절로 자본주의의 실체가 폭로되리라는 상상 속에서 시도된 글쓰기 방식입니다.
몽타주로 새로운 사태를 표현하는 방식은 영화-시-미술-소설 등의 각종 문화 영역에서 다양하게 변주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교육과 관련된 기존의 논문식의 글쓰기가 표현방법에서, 기존의 완고한 현실을 뛰어 넘기에는 역부족하다는 답답함을 많은 사람들이 느끼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새로운 표현방법이 모색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강신주의 벤야민 해설을 읽으면서< 강신주. ‘철학 vs 철학’. p.652-653.> , 몽타주적 글 쓰기가 가능하겠다는 생각에 이르렀습니다. 이 글은 그런 문제의식에서 시도해 보는 겁니다. ‘분노로 불타는 학교’와 ‘배움이 있는 차분한 교실’이라는 그림이 잘 합체되어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현실을 바꾸려는 새로운 정서를 발생시키고 있는지, 저로서는 알지 못합니다. 다만, 새로운 시도가 완고한 현실을 바꾸는 작은 균열이라도 내려는 시늉으로라도 읽혔으면 좋겠습니다.
Ⅱ. 불타는 학교
1. 들어가는 말
개인적인 차원의 경험이어서 일반화시키는 데는 무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정밀하다는 수학적 세계의 순수정리가 개인의 혼란스런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탄생한다는 말에 의지하면서, 개인적인 차원의 의제를 던집니다. 거의 30여년을 교단에서 살아 내면서, 마지막 10년간 부딪혔던 그리고 시달렸던 감정은 분노입니다. 졸연히 분노의 감정에 휩싸였던 경험도 있고, 학생이나 학부형들의 밑도 끝도 가늠할 수 없는 분노를 마주하면서 절망감의 나락으로 추락했던 경험도 있습니다. 당시에는 이걸 정면으로 응시하면서 들여다볼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럴만한 재주나 깜냥이 없었다는 고백이 오히려 정확합니다.
수십 년을 현장에서 시달리고 계시는 많은 선생님들이 대부분 경험하셨듯이, 교직사회가 관료적 통제의 기술들에 촘촘하게 잠식당하면서 일상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여유 있게 성찰적으로 반추하는 시간이나 공간은 이제 없습니다. 그날그날 주어지는, 좀 더 잔인하게 말하자면, 매일매일 던져지는 고깃덩이가 붙어있는 과제들을 처리하느라 숨을 헐떡이도록 교직사회는 구조화되었습니다. 이런 평가가 정당화될 수 있다면, 제 교직생활의 뒷부분은 ‘분노에 시달리면서도 분노를 발생시키는 구조’자체를 문제시하지 못하도록, 수동적으로 분노에 지배당하도록 되어 있었다고 말해야 합니다. 수동적이라고 말했지만, 고깃덩이에 능동적으로 반응하기 때문에, 자본에 훈련된 능동성으로 수동성에 빠지는 그런 상태입니다.
<주1. 능동성과 수동성을 칼로 무우 베듯이 잘라 구분할 수 있는 잣대는 없다. 인간의 행위라는게 겹겹히 다른 차원의 매개들에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것처럼, 능동성과 수동성도 문화적 매개들에 서로 물들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마치, 욕망이, 내 욕망인지, 엄마의 욕망인지, 애인의 욕망인지, 친구의 욕망인지 등등으로 구분할 수 없는 것처럼. 개인적인 직관적 평가에 의존해서 손쉽게 말하자면, 교사의 능동성은 거개가 자본의 구심력에 의해서 조형되어 있다.>
이런 능동성의 외피를 쓴 수동성에 대한 자각은 내부에서는 관찰–통찰 불가능합니다. 계급재생산 시스템인 입시위주의 교육과 그것에 적합화한 네이스로 대표되는 기술적 직무통제 등은, 체계적이고 구조적이기 때문에 교사 개인들이 맞설 수 있는, 그리고 비판적으로 성찰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섭니다. 일종의 자연 상태로서 인식합니다. 체계 내부자들에게는, 현대사회의 기술지배라는 통치의 음화로서 새겨진 풍경이, 자연 상태라고 인식될 수밖에 없습니다. 역사적 전개과정에서 출현한 인공적 상황을 자연상태라고 인식하는 겁니다. 그러니 체계를 넘어서는 외부자의 시선을 얻기는 ‘하늘의별따기’입니다.
<주2. 개인들이 체계의 외부라는 관찰자의 위치를 확보하려면, 체계 대항적 지향성을 가져야한다. 왜냐하면, 체계는 자기 기준적인 주체를 생성하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체계는 주체의 내부에서 작동한다’는 말을 상상하면 이해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 사회속의 인간은, 자본주의적 주체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자본주의적 욕망-도덕-가치판단 등을 가진 주체를 자본주의는 자동적으로 생산한다(autopoiesis). 반복하자면, 체계는 주체의 내부에서 작동한다. 그러므로 체계를 벗어나는 종합적인 시각은 체계에 대한 불가피한 적응(순응)과, 체계에 대한 비판적 부정의 양면성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기능적으로 복잡하게 분화된 근대적 조직체계에서 개인들은 체계에 대한 적응의 하중에 압도적으로 장악되어 있다. 극단적인 근대적 합리성(과도한 이성중심주의)에 의한 이런 비대칭적 상태를 위험사회의 원인이라고 해석하면서, 이런 체계에 압도된 위험을 극복하는 방안으로 성찰적 근대성을 대안으로 제시하는 사회학 이론들도 있다. 그러나 이런 사회학 이론들이 드러내는 것은 오히려, 현대사회의 체계가 그 체계의 내부자인 개인의 인식수준을 넘어서는 복잡성과 압도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역설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이런 구조적-체계적 지배와 통제를 비판하는 방식은 미국식의 자본주의체계에 적응하도록 적합화된 개인심리학(?)으로는 불가능합니다. 분노의 문제가 개인의 심리라는 차원으로 다루어질 수 없다는 겁니다.
<주3. 미국의 주류적인 심리학은 각각의 개인들을 분석대상으로 삼는다. 전체사회라는 사회적 차원에서 분리된 개별단위인 보다 아래의 작은 집단속의 개인들을 상정하고(가족, 직장, 학교 등), 그런 기초적인 하위 집단에 적응하지 못하는 개인들을 어떻게, 적응시킬 것인가에 집중한다. 이런 개별심리학(?)은 분노의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다루고, 분노조절장애 등과 같은 질병으로 처리하면서, 심할 경우 약물처치 등을 정당화한다. 심리학이 제약-의학 산업과 연계된 학문으로 발전한 경우이다. 이에 비해서 유럽의 심리학은 개인의 배경인, 개인의 행위를 유발하는 사회전체를 굽어다 보는 경향이 있다. 미국의 심리학이 자본주의 산업체계와 순접 되어 있다면, 유럽의 심리학은 자본주의 체계 자체를 문제시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식의 직관에 근거한 평가적 설명은 등재된 학문으로서 객관적 과학으로 입증할 수 없으니 위태롭다. 그러나 모든 지식들은 그런 변두리적 직관의 그림자에서 출발하고, 명확하게 입증되지 않았지만 흐릿한 직관적 이해에 그 태반을 둔다. 단순하게 말해서, 세상에 처음부터 공인된 객관적 과학은 없다. 이 글은 그런 측면에서 ‘미국심리학, 개별심리학 기술적심리치료’ 등과 같은 검증되지 않은 용어를 무차별적으로 사용한다. 이런 태도는 가상의 허술한 전제 위에 건축물을 쌓는 짓과 같아서 위태로우나, 그런 용감함이 없이는 현실의 단단한 고치를 뚫을 수 없으니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변명할 수 밖에 없다. 덧붙이자면, 좀 더 엄밀한 실증은 또 다른 누군가의 일이라고, 지금으로서는 능력 밖의 일이라고 고백하는 것이 생산적인 여지를 남기는 태도일 것 같다.>
그래서 이 글은 우선은 분노에 시달리는 학생-교사-학부형이라는 전제를 가정합니다. 그리고 이런 전제를 통찰하고 치유하는 시각을 사회전체와 관련된 교육환경 차원에서 다루어 보고자 합니다. 분노를 개인의 차원에서 다룰 수 없다면, 당연히 분노를 유발하는 좀 더 근본적인 차원을 상정해야 합니다. 전제와 그걸 다루는 이론적 배경을 사회적 수준이라고 가정하고 있으니, 시각이 너무 거시적일 수 있습니다. 물론, 개인심리학이라는 차원에서 미국식의 자본주의 화된 임상심리학이 전혀 쓸모가 없지는 않을 겁니다. 지금 당장, 분노에 의한 심리적 장애나 고통을 당하는 당사자에게 임시방편으로써 쓸모에, 그것이 적합하다는 것을 어떻게 부정하겠습니까?
그러나 분노의 문제를 사회전체와 관련된 교육환경이라는 차원에서 살펴보는 것은, 학교제도나 그리고 교육제도를 미래지향적으로 구상하는데 필요한 일정한 시각을 제공할 수 있을 겁니다. 바꾸어 말하면, 분노의 문제를 교육학적으로 다룬다는 것은, 체계에 대한 개인적 수준의 적응 문제가 아니라, 개인을 넘어서는 체계가 어떻게 개인들에게 분노의 감정을 야기하는지 사회환경적 측면에서 다루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 사회환경적 측면을 살펴야, 교육과 관련된 제도들에 대한 미래지향적인 비판적 성찰의 시선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2. 분노 감정의 부정적 소모성 김영민. ‘집중과 영혼’. p. 788-846. 파트‘2’는 대부분의 아이디어를 ‘김영민’에게 빚지고 있다.
분노에 대한 일반적인 개념은 ‘인내’의 반대 말 입니다. 참아서 억제하는 것이 당위이고, 그걸 못하면 자신과 타인에게 피해를 준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분노에 대한 정의는 결국 분노를 조절할 줄 아는 인격의 수양이나 기술적 심리치료(약물치료)를 정당화하는 기반입니다. 이런 분노에 대한 부정적 견해와 달리, 분노를 새로운 사회혁명이나 변화의 촉매로 간주하는 주장도 있습니다. 2000년대 초반에 선풍적 인기를 끌었던 ‘분노하라(스테판 에셀)’가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이 경우의 분노는 현실에 대한 무관심과 비각을 이루는 언어입니다. ‘무관심/분노’라는 형식입니다. 항상 잘못된 현실에 두 눈 부릅뜨고 비판하면서 적극적으로 참여하라는 격문과 비슷한 내용입니다. 이런 분노는 현실을 변화시키는 자원이 활성화하도록 동원하는 긍정적 생산성이 분명하게 있습니다. 인류사에서 있었던 모든 혁명의 시작점에는, 항상 분노가 혁명을 촉발시키는 최초의 불길이었다는 걸 어떻게 부정할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보면, 분노는 개인으로서는 관계를 엉망으로 만드는 부정적 요소이고, 사회적 수준에서는 혁명을 촉발시키는 긍정적 요소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혁명은, 그 혁명을 가능케 했던 분노로 인한 부정적 후유증을 가지고 있습니다. 프랑스 혁명이 ‘혁명정부 – 왕정복고’를 반복하고, 중국혁명이 문화혁명이라는 홍역을 거친 걸 상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분노로 인한 격한 에너지 고양상태를 지속시키는 건 생명체의 항상성 유지라는 일반적 상식에 견주어 보아도 위험한 건 분명합니다. 이렇게 보면, 세상 모든 일이 그렇지만, 분노는 적절히 통제되지 않는다면 분명히 부정적 요소입니다. 분노의 이런 부정적 측면을 김영민은 창의성과 대비하고, 시간이라는 좌표를 도입하여 설영합니다.
<주4. 창의성과 창조력은 필경 마음의 영(0)도에까지 내려갈 수 있는 존재론적 겸허와 개방성에 터해서 찾아온다. 그러므로 말할 필요조차 없이 창조와 창의에 가장 불리한 여건은 경색된 분한憤恨의 감정이다. 전술한 대로 분한은 마음의 에너지를 과거에 묶어놓기 때문에 창의와 창조에 필요한 미래적 유연성에 치명적이다. 김영민. 같은책. p. 791.
질투나 원망이나 증오로써 이룰 수 있는 일은 적다. 비록 그 영향력이 적지 않다고 해도 대체로 더 나은 삶의 촉매나 토대가 되지 못하며 심지어 파국적이다. 질투나 증오를 동력으로 삼는 제도나 체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그 같은 제도와 체제는 필경 사람을 사람 이하의 것으로 물화시킨다. 이런 체제의 결정판이 곧 지옥이 아니겠는가? 일찍이 니체가 지적한 대로 질투나 원망이나 증오를 온전히 벗어날 수 있는 일은 대단한 공부다. 사람의 의식을 일러, 생물학적 진화의 흐름에 저항할 수도 있을 뿐 아니라 스스로 종말을 선택할 수도 있는 진화사의 꽃이라고도 한다. 나는 그 꽃 중의 꽃을 ‘영혼’이라는 가설적 현상으로 여기지만, 인간의 창의성이란 인간의 의식이 영혼을 생성시키는 초월적 과정에서 생략할 수 없는 고귀한 활동이다. 질투와 분한은 바로 이 고귀한 활동을 고사시키는 어리석고 파괴적인 힘이다. 김영민. 같은책. p. 814-815.>
<위에 인용한 글에서 ‘분한-질투-원망-증오’등을 분노라는 감정으로 대입해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분노의 감정은 과거의 기억에 묶여있어서 미래적인 창의성을 헤치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는 지적입니다. 창의성은 자유라는 넓이와 평정이라는 깊이를 필요로 하는데, 분노는 손상당한 과거의 상처에 집중한다는 지적입니다. 넓이라는 자유의 영역도 아니고, 평정이라는 겸허의 영역도 부재하다는 겁니다. 상처 받은 과거의 한지점에 괴물처럼 집중하니, 자유라는 넓이와 겸허한 평정이라는 깊이를 확보하기 어렵겠지요.
<주5. 이런식의 논리가 자칫하면, 상처 받은 피해자의 분노를, 다시 그 상처 받은 피해자의 정신적 불구를 야기시키는 원인으로 지목하여, 이중으로 피해자에게 가해를 가하는 논리로 작동할 수 있다. 대개의 기득권자의 이중적 가해 논리의 전형이다. 그러나 모든 상처의 분노가, 그 피해자를 분노에 의한 정신적 불구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분노에 대한 적절한 애도와 서사화는 오히려 그 피해자를 더 큰 존재로 만드는 계기이기도 하다. 한세상을 살면서 상처 없이 산다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고, 분노에 직면하는 경험이 없다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오히려 적실한 것은 분노를 공부로 극복하는 일이다.>
김영민의 또 다른 지적은 니체를 인용하면서 분노를 극복하는 길이 ‘공부’라는 겁니다. 그것도 그 공부가 ‘대단하다’는 형용사를 첨부합니다. 이걸 거꾸로 해석하면, ‘공부의 목적은 분노의 극복에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교실이 그리고 학교가 분노로 불타고 있다면, 그건 교육이 무언가 고장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3. 분노라는 현상에 대한 예시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나는 차츰 내 가족과 인척들, 내가 만나 왔던 수많은 이, 내가 만나고 있는 이들, 내 주변에 있는 이들, 신문이나 TV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이들, 그리고 나를 좋아하고 내 글을 인정하는 이들까지 ‘화가 나 있단’는 사실에 어쩔 수 없이 주목하게 되었다. (···) 화가 난 아이들은 선생들을 패기 시작했고, 선생들은 미친 세태를 개탄하면서도 자신들의 화를 풀어낼 도리를 알지 못했다. 김영민, 같은책. P.815-816.
학교가 교실이 그리고 선생님들이 학생들이 분노로 불타고 있다는 서술은 물론 극단적 과장일 수 있습니다. ‘아이들/선생들’이라는 대립적 문제설정도 물론 지나친 과장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과장에는 현실의 문제를 고발하려는 의지가 겹쳐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과장이라고 문제제기를 무찌르는 건, 아이와 함께 목욕물을 버리는 우매한 짓 입니다. 과장 속에 촉급한 문제제기의 거친 호흡을 읽어야 합니다.
2000년 중반을 기점으로 교실붕괴론이 난무하고, 학교폭력의 문제가 국가적 차원에서 대응해야 하는 의제가 된 현실은 그 구체적인 반증입니다. 학교폭력과 아이들의 분노 관계를 직접적인 인과로 묶지 않는다면 다른 어떤 경로가 있겠습니까? 선생님들이 아이들을 고소하고, 학부형이 선생을 고소하고, 아이들이 선생을 고소하고, ··· 등등의 사건들이 일상이 된 게 현실입니다. 학교폭력 사건이 변호사들의 새로운 일거리로 등장한 것이 이미 변해버린 새로운 현실을 설명하는 적실한 진실입니다.
이런 분노에 시달리는 학교현실을 개선하는 것은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증상을 가진 개인들에 초점을 맞추는 것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때 그때의 촉급한 문제상황에 임시방편으로 미봉하는 법률적 – 심리적 처치로는, 모든 대증적 방법들이 그렇듯이 오히려 문제를 가려서 보다 근본적이고 적절한 사회적 차원의 대처를 놓치는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주6. ‘학교폭력대책’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된 지난 보수정권의 정책들이나 입법들이 임시방편적인 대증요법이라는 사실은 학교현장에 몸을 담고 있는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이런 대증적 접근법이 횡행하는 현실이 사실은, 우리 교육계가 학교폭력에 대한 제어능력이 없음을 투명하게 고백하는 모습이 아니라면, 무엇일까? 지금의 학교폭력대책들은 증상을 가진 당사자 아이들에 대한 근본적인 접근법이 전무한 형편이고, 오히려 증상을 가진 당사자 아이들을 격리하고 낙인찍으면서, 폭력의 개연성을 더욱 증대시키고 있다.>
그래서 여기서는 우선 학교(교육)와 관련된 분노를 크게 두개의 범주로 나누어 ‘10:90의 선별체계’ ‘훈육의 부재’로 살피고, 분노를 줄이는 거시적 대안을 찾아보려 시도하겠습니다.
4. 학교현장이 분노로 불타는 배경에 대한 대략적 원인들
1) 10:90의 선별체계
학교가 입시위주의 교육에 몰두한다는 건 어제 오늘이 이야기도 아니고, 그걸 증명하기 위해서 무슨 정교한 통계적 수치나 심오한 통찰이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내부자들이 이런 현실을 자연상태로 인식하는 것이 오히려 문제입니다. 체계에 맞서기 보다는 주어진 체계에 적응하는 선택을 하는 건, 우선 살고보자는 본능에 비추어 보더라도 자연스럽습니다. 그렇게 적응기제가 작동하고, 그것이 체계를 더욱 강화하는 되먹임이 발생하면, 체계는 더욱 강고하게 작동합니다.
이런 입시위주의 학교현실에서 학교의 주요 수행은 학생들의 선별에 집중합니다. 교육이 아니라 선별이 학생분노의 직접적 근인입니다. 김영민. 같은책. p. 887. (...) 예를 들어 교육제도나 현장의 기법이 사회적 관계망의 피라미드를 등정登頂하는 사뭇 기형적으로 집중되고 있는 여러 현상도 결국 이 분한의 감정과 관련 있는 것 같다. (...) 덤으로 언질하자면 나는 이 분한의 감정이 한국적 근대화 혹은 자본주의화가 여러 곡절과 중층적인 매개를 거치면서 마침내 개인들의 심리에 울혈처럼 남겨놓은 부하負荷라고 판단한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사회가 이런 꼴인 이상 (...) 이 부하를 덜 수 있는 지속적이며 조직적인 제도와 문화가 시급하다.
학생 개개인들의 성장이 아니라, 학생의 사회적 위계에 따른 직업배분에 따른 선별체계로서 학교와 교육에 학생들이 호의적으로 반응하리라고 기대하는 건 어불성설입니다. 실패자로 낙인찍어 선별하는 학교(교육)에 감사한 마음으로 반응할 개인들을 기대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오히려 분한의 마음만을 발달시킬 겁니다.
우리사회가 매년 사회에 진출하는 학생들에게 적절하게 배분해 줄 수 있는 안정적인 직업은 대략 30,000개 정도라고 추정합니다. 이런 숫자는 10:90의 선별체제로서 학교의 기능에 대략적으로 일치합니다. 여기서 10%에 해당하는 학생들은 학교의 기능에 순응한다고 추정할 수 있고, 90%의 학생들은 잠재적으로 적대적인 성향을 가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런 식의 물질적 보상기제에 직접적으로 학생들의 분노를 대입하는 것은, 문제의 지나친 일면화나 단순화의 논리일 수 있습니다. 당연히 그런 보상기제가 작동하는 과정에는 수많은 매개들이 들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학생-학생 관계에는 선별에 따른 심리적 전이나 투사 등의 작동들도 개입할 개연성은 불 보듯 뻔한 변수입니다. 실패자로 분류된 학생들이 또 다른 희생자를 만들어 자신을 위안하는 심리적 기제 등은 학교와 관련된 수많은 분노-폭력의 양상의 설명에 적실합니다. 이 모든 변수들 중에서, 이 글은 학교가 개개인 학생들의 성장이 아니라, 직업배분의 사회적 지위 재생산 기능으로 작동할 때 학교(교육)가 분노의 대상으로 지목될 수 있는 가장 결정적 변수라는 가정에 터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가정하는 것은, 학교(교육)의 기능을 학생의 성장이라는 본래의 목적에 맞게 재설정하는 것이, 학교와 관련된 분노 문제를 다루는 근본적인 시각이라는 당위적인 판단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2) 훈육의 부재
학생의 분노 감정을 훈육의 부재로 보는 관점은, 학생의 분노를 개인적인 차원에서 분노조절 장애를 일으킨 사건으로 보는 관점입니다. 사회적 관계 형성에 실패한, 사회적 관계 형성 기술이나 훈련이 부족한 결과로 보는 관점입니다. 이런 관점은 분노의 원인을 그 개인에게 귀속시키기 때문에, 분노를 야기하는 사회적 차원의 시선을 소거시키는 보수적 관점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조절에 실패한 개인이라는 문제를 사회적 차원에서 논의하면, 훈육의 부재를 사회적 차원에서 해석할 수 있는 준거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훈육의 부재를 교육에 대한 사회적 차원의 시선이 변화한 것에서 찾아보는 겁니다. 그런 시선의 변화 중에서 가장 커다란 변화는, 교육이 소비의 대상이 되어있는 현실일 겁니다. 구매자로서 그리고 소비자로서 학생이 위치할 때, 그리고 교사가 서비스 제공자로서 상정될 때, 성장과정에서 익혀야 할 기본적인 훈육이 들어 설 자리는 없습니다. 사회적 관계 형성에 필요한 예절, 학습의 전제 조건으로서 익혀야할 기본적인 지식의 습득 등을 강제할 수 있는 정당성이 약화됩니다.
교육이 이렇게 소비의 대상으로 인식된 배경에는, 지난 20여년의 한국의 교육정책에 지속적이고 지대한 영향을 끼친 ‘5.31 교육 개혁조치’가 있습니다. 이에 대한 평가가 2015년 교육개발원 주최로 ‘5.31 교육개혁 20년, 한국교육의 오늘과 내일’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되었습니다. 그 결과물의 일부를 여기에 발췌하는 것으로 대신합니다.
<주7. 그러나 5.31 교육개혁 이후 20년이 지난 현 시점에서 정부의 역할은 교육영역에서 시장 기제의 활성화라는 초기 역할에서 벗어나 교육영역에서 시장이 가져올 수 있는 부정적 효과를 치유하고 극복하는 역할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 이제 교육에 있어서 시장 기제의 활성화는 추구해야 할 정책목표가 아니라 이미 지배적인 경향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향후 교육정책의 방향은 시장 기제의 활성화라는 트렌드 순응적인 정책이 아니라 교육의 시장화·상업화·개인화가 초래할 수 있는 부정적 측면을 치유하는 방향, 즉 트렌드 역행적인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필요가 있다. >
< http://edzine.kedi.re.kr/2015/spring/article/invitation_01.jsp# >
훈육의 부재를 ‘5.31 교육 개혁조치’의 최종적인 결과로 치부할 수는 없습니다. 입시위주의 교육 현실, 신자유주의적 사고와 관행의 일반화, 핸드폰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매체의 등장 등등으로 겹겹이 원인배경이 지목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 특별히 초-중등 교육은, 한인간이 인생전체를 살아가는 ‘기본적인생활습관 – 기초적학습기능’을 읽히는 ‘훈육기관’이라는 인식을 확고하게 확립하는 것 입니다.
<주8. 초-중등 교육에서 안정적인 훈육과정을 교육의 목표로 상정하려면, 교육과정의 대대적인 축약화가 불가피하다. 현재의 어마어마한 지식 내용을 학생들에게 전달하는 교육과정으로는 산만하고 사교육에 의존하는 그리고 위계적인 서열구조를 가진 학교체계를 개혁하기 어렵다. 사실상 한국의 어마 무시한 지식내용이 담긴 교육과정은, 계급재생산을 정당화시키는 선별기제의 기술적 방법이라고 해석해야 한다. 예를 들어 한국 고등학교의 수학 내용들은 미국 대학수준을 훨씬 상회한다는 불평이나, 수능영어의 지문이 미국 고등학교의 영어 교과서를 능가한다는 불평들이 지시하는 바는 명확하다. 선별의 정당화를 위하여 교육과정이 왜곡되어 있다는 해석 말고, 어떤 말이 가능할까?>
우리 사회가 제국주의와 군사독재라는 과거의 상처 때문에 규율이나 훈육이라는 단어만 나와도 본능적으로 사시의 시선으로 경계하는 것은, 과거의 상처가 남긴 흔적입니다. 이제 그런 상처의 부정적 기능을 비판적으로 성찰할 수 있는 여유를 회복해야 합니다.
다른 측면에서는, 변화된 매체환경이 학생들의 훈육환경을 어떻게 파괴해 왔는지에 대한 논의도 새롭게 시작할 필요도 있습니다. 훈육부재의 문제를 학생들에게 일방적으로 돌리는 짓은, 변화된 매체 환경을 사상시키는 외눈박이 시선일 수 있습니다. 새로운 매체환경이 어떻게 훈육이 부재한 분노하는 학생들을 만들어 내는지에 대한 논의도 필요합니다.
<주9. 김영민은 핸드폰이라는 새로운 소통기구를, 소통을 동일집단의 자기복제로 제한하는 제한기구, 또는 ‘거울’이라는 나르시즘 도구로 파악한다. 이런 식으로 파악하면, 과거의 언어적 환경이 직접적 대면관계에 의존한다면, 새로운 매체환경에서는 일종의 뒷골목에서의 또래집단의 대화형식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대면관계에서 작동하는 상대에 대한 배려가 없는, 동일성이 강한 또래집단의 자기 독백의 형식이니, 다양한 사회적 수준의 통제가 작동하지 않는 대화형식이다. 사회적 수준의 시선이 부재한 환경에서의, 동일한 또래집단의 자기복제적 언어는 폭력성을 증폭시킬 개연성을 높인다. 다시 말해서 핸드폰이란, 언어적 폭력의 증폭기계라고 해석할 수 있다. 여기에 가상세계의 무차별적 폭력게임이나 영상들은 분노와 폭력의 불길에 기름을 붓는 격으로 작동할 것이다. 최근에 빈발하는 ‘묻지마폭력’의 사건들은 분명히 징후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걸 사회적 차원에서 읽어내고 해석하는건 사회를 건강하게 건사는 능력이다.
<참조. 김영민. 동무론. 거울속에는 소리가 없소 : 거울사회와 핸드폰 인간>. 김영민은 위의 책에서 핸드폰이라는 매체에 대한 정치한 사유를 전개하면서, 반복적으로 다른 저작에서도 그런 사유를 심화시키고 있다. 이런 김영민의 사유를 교육학적으로 번역하는 작업도 시급하고 필수적으로 보인다.>
Ⅲ. 배움의 교실
1. 들어가는 말
먼저, 배움의 교실이 어떤 모습인지를 구체적으로 서술할만한 능력이 없다고 말해야할 것 같습니다. 그런 능력이 있었다면, 조기 퇴직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아이들과 행복하게 지지고 볶으면서 현장에 있었겠지요. 아이들의 분노에 지치기도하고, 그걸 교육적 에너지로 바꿀만한 개인적 능력이 부족해서, 과거의 그런 무능력을 어떻게든 설명해 보고, 그걸 어떻게든 서사화하려는 노력이 이 글의 원인입니다. 좀 더 일반적인 삶의 태도라는 시각으로 바꿔 말하자면, 과거는 어떤 상처이고, 개인은 그런 상처를 서사화하여 개인의 주체성(인격성)속으로 통합해야 하는 것이 운명입니다. 상처에 대한 서사화와 그걸 애도하여 그 개인의 삶으로 통합하여야 하는 과제와 싸우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라는 겁니다. 개인사의 상처를 서사화하는 과정에서, 그런 서사화가 사회적 정당성의 기반을 구축할 수 있다면, 행복한 결말이 되겠지요. 그렇지 못하다 할지라도, 개인의 상처를 객관화 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다시 상처로 부터 시작하는 출발점을 확보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차분한 배움이 있는 교실을 구체화하려는 상상은 개인적이지만 절실하고, 그게 사회적 차원에서 정당하다면 금상첨화일 겁니다. 이런 고민의 과정에서 덴마크교육에 대한 오연호(오마이뉴스 대표)의 강연 원고를 만났습니다.
저는 그 원고를 읽으면서 더하고 뺄 것도 없는 배움의 교실이 있는 풍경을 만났습니다. 물론, 저는 개인적으로 한국교육의 모든 문제가 ‘신자유주의적시장화’와 결합된 ‘전제주의적 전통 : 유교적 전통사회-일본제국주의 상처-해방후의 파시즘적 군사문화’로 환원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거시적으로 생각하는게 습관이기도하고, 일상의 세세함을 살피지 않으려는 편리하고 게으른 방편이라고 비판한다면,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런 전제위에서 저는 오연호의 덴마크교육에 대한 묘사가, 완벽한 하나의 대안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신자유주의적 시장화나 파시즘적 전통으로 부터 벗어난 이상적 교육의 모델을 오연호의 강연원고로 대신하고자 합니다. 말이 너무 거창해서, 세세하게 말하자면, 신자유주의적 시장화를 극복한다는 말은 ‘계급재생산기능으로서의 교육-입시에 지배된 교육-서열화된 대학체제의 개편-대학평준화-대학무상화’라는 의미망에 포섭되고, 파시즘적전통의 극복은 ‘중앙집중적 교육관료제-위계적 교육관료제-관료적 통제의 교육개혁-민주적인 학교-민주적인 교실-민주적인 인간의 양성’이라는 의미망에 포섭됩니다. 따라서, 오연호의 원고는 위에서 제시된 신자유주의라는 극단적 경쟁이나, 비민주적인 관료 통제라는 모순을 극복한 모델로 해석했다는 전제에서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덧붙이자면, 저는 오연호의 강연원고를 읽으면서, 덴마크의 교사들의 일상이 ‘중앙집중적 관료통제나 신자유주의적 시장화’로 부터 자유롭게 교사의 전문성을 누리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어디에서도 꽉 짜여진 네이스로 대표되는 관료적인 기술적 통제(직무의 표준화된 구속)나, 입시에 구속된 경쟁의 냄새가 없는 자유로운 전문가적 자율성이 넘쳐나는 상상을 할 수 있었습니다.
2. 오연호의 강연 원고
삶을 위한 수업
-행복한 덴마크 교사들은 어떻게 가르치는가?
오연호와 마르쿠스 베른센 둘이서 펴내다. 오연호는 덴마크 행복교육을 직접 보기 위해 2013년부터 무려 23번이나 코펜하겐을 방문했다.
베른센은 덴마크 저널리스트이며 작가. 주간지 웨켄다비센의 기자이며 2014년부터 3년 동안 한국 특파원으로 활동했고, 주한 덴마크 대사관에서 근무한 아내와 세 자녀를 서울에서 키우면서 덴마크와는 너무나 다른 한국의 교육현실을 체험했다.
오마이북 2020년 5월 20일 초판인쇄.
■ 다시 제대로 시작하기 위하여
<삶을 위한 수업>은 단순히 교사의 수업방법론만을 이야기하는 책이 아니다. 수업에 참여하는 교사와 학생의 자세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답하는 책이다. 왜 배워야 하는가? 왜 학교에 가야 하는가? 교사와 학생의 관계는 어떠해야 하는가?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수업방법론이자 수업철학론이다.
덴마크의 10분의 선생님들은 가르치는 과목도 대상도 다 다른데 기본적인 수업철학이 어쩜 이렇게 닮아 있을까? 덴마크 교사들이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11가지 수업 철학을 소개한다.
1. 학생 이전에 인간이다. 공부 이전에 관계가 중요하다. 교사와 학생 사이에 인간적인 관계 형성이 중요하다. 친밀감과 신뢰감이 있어야 한다.
2. 수업 진도를 나가기 전에 '왜'를 묻는 시간이 충분해야 한다. 왜 우리는 교실에 앉아 있는가? 왜 영어와 수학과 과학을 공부해야 하는가?
3. 학생을 경쟁의 노예로 만들지 않는다. 좋은 경쟁을 유도한다. 나쁜 경쟁이 나만을 위한 것이라면 좋은 경쟁은 나와 우리 모두를 위한 것이다.
4. 상위 10퍼센트에 들지 않아도 괜찮다. 뒤처진 학생들도 끝까지 챙긴다. 학생 모두에게 크고 작은 성취감을 안겨주면서 주눅이 들지 않게 한다. 학생 간의 배려와 협력을 중요하게 여긴다.
5. 배움은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누군가와 협력할 때 더 잘 이뤄진다고 믿는다. '말하기'보다 더 중요한 것은 '듣기'다.
6. 교실에서 교사와 학생이 권력을 분점한다. 교사의 자율권을 중요하게 여기는 만큼 학생의 자율권도 보장한다. 학생을 '젊은 어른'으로 대접한다. 비판 정신을 길러준다.
7. 학생들에게 스스로 선택하는 훈련을 끊임없이 시킨다. 자기 주도적 인생을 살 수 있게 한다. 동시에 결과에 대한 책임을 감당하는 올바른 자세를 가르친다.
8. 시험을 위한 수업이 아니라 '삶을 위한 수업'을 지향한다. 실생활과 연관된 수업을 한다. 호기심이 최고의 교과서다. 교과서를 버리고 학생들의 질문에 더 주목해야 한다.
9. 인생은 통합적이다. 학교 수업도 그래야 한다. 그러려면 교사가 통합적으로 사고해야 한다. 정치와 음악, 영어와 과학을 통합적으로 가르칠 수 있어야 한다.
10. 교실은 입시 전쟁터가 아니라 '웰빙(well-being)'을 체험하는 생활공동체다. 학교와 교실은 집같이 편안해야 하고 왕따와 폭력이 없는 안전한 공간이어야 한다.
11. 학교는 민주주의를 '가르치는 곳‘이 아니다.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삶의 현장이 되어야 한다. 학교 운영에 대한 학생들이 참여가 보장되어야 한다.
11가지의 이 수업 철학은 이미 우리 교육 현장에서도 추구하는 내용들이다. 어느 교실에서는 잘 이뤄지고 있고 어느 교실에서는 더디 이뤄지고 있을 뿐이다. 이미 잘 이뤄지고 있는 교실에서는 “우리가 옳았어. 이게 행복한 교실과 사회를 위한 길이야”라는 확신이 더 커지길... 아직 더디 이뤄지고 있는 교실에서는 수업 방식과 수업철학을 재점검하고 새롭게 출발하는 계기가 되기를...
우리 교육에 여러 가지 한계가 있는 것은 “오늘, 지금, 나부터 꿈틀거리겠다.”면서 묵묵히 실천하고 있는 교사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라고 어찌 지치지 않겠는가? 그들이라고 어찌 외롭지 않겠는가? 이 책은 그들의 손을 조용히 잡아주는 동지가 된다.
“우리는 같은 별을 바라보고 있어요.” -오연호
■ 행복한 교육을 위하여 한국의 독자들에게 – 베른센
덴마크와는 다른 한국의 교육시스템을 보았다. 한국의 유치원은 마치 학교 같았다. 나는 내 아이들이 ‘자기 스스로의’ 속도로 자라기를 바란다. 새로운 것은 좀 더 자란 다음에 배워도 충분하지 않는가?
한국의 교육은 공부 잘하는 학생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공부 잘하는 소수의 학생들만 좋은 교육을 받고 원하는 직장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가지며 나머지 다수는 뒤처진다.
덴마크 교사들은 학생들에게 왜 스스로 배워야 하는지를 알게 하고 창의성, 독립성, 세계시민의 자질을 키우는 데 필요한 특별한 도움을 주고 있었다.
■ 오연호 이사장과 정승관 교장이 손잡고 만든 <꿈틀리인생학교>
- ‘쉬었다 가도 괜찮아. 다른 길로 가도 괜찮아. 잘하지 않아도 괜찮아.’
<수학도 즐거울 수 있다> - 헤닝 아프셀리우스(고등학교 뇌레 김나시움에서 수학, 물리학, 천문학을 가르침, 45세, 15년차)
“어떻게 하면 아이들의 실생활과 관련지어 수업을 하고 실감 나게 가르칠 수 있을 것인지 늘 생각해요. 나는 수학 물리 천문학을 무척 좋아하지만, 많은 학생들은 이 과목들과 친숙해지는 것 자체를 힘들어 할 수 있죠. 그래서 교사인 내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이 과목들이 우리 학생들의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각인시켜주는 겁니다.
우리는 지금 왜 여기에 앉아 있을까? 아프셀리우스는 학기 초에 진도를 나가지 않는다. 어떤 숙제도 내지 않는다. 왜 수학을 배워야 하는지에 대해서 교실의 모든 학생들이 저마다 충분한 이유를 갖지 전까지 수학을 가르치지 않는다. 아프셀리우스는 무엇보다 학생들의 흥미 유발에 힘을 쏟는다.
아프셀리우스는 분명한 목표가 있다. 수학을 이미 잘하는 학생 뿐 아니라 힘들어하느 ㄴ학생들도 학기말 시험에 모두 통과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아프셀리우스는 교실에서 교사의 권력이 일방으로 흐르는 것을 경계한다. 학생들과 권력을 나눔으로써 보다 평등한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고 본다. 나는 우리 학생들이 발표를 할 때마다 칭찬하고 축하해줘요. 자신감이 부족한 학생들에게 한 걸음이라도 앞으로 나아가는 경험을 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시험과 점수가 중요할까?? 헬레 호우키에르(54세. 32년차, 초중등학교에서 수학과 과학 가르침)
덴마크 학생들은 8학년이 될 때까지 시험 점수를 개별적으로 받지 않는다. 교사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학생들이 제대로 배우고 있는지를 확인하지만 이를 점수화하거나 등급을 매기지 않는다. 주로 대화를 통해 피드백을 준다. 어떤 일이든 어떤 시험이든 교실 밖의 누군가에 의해 결정되면 안된다.
우리나라의 경우 학생들은 오직 시험을 준비할 목적으로 공부해야 한다. 교사도 학생도 아닌 다른 사람이 우리가 무엇을 위해 어떻게 시간을 써야 하는지 결정하는 셈이다. 그러니 동기와 의지가 사라지게 된다. 결과적으로 배우는 것도 별로 없게 된다. 시험을 위해 얻은 지식은 시험이 끝나면 금방 잊어버리게 된다.
배움은 누군과와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 속에서 일어납니다. 내가 배운 것을 다른사람에게 말하고 토론할 때 제대로 이해했는지 확인할 수 있다. 수학도 과학도 언어도 마찬가지이다.
시험은 적을수록 좋고 시험에 대한 분석은 많을수록 좋다. 결과와 점수보다는 피드백과 토론을 중요학 여긴다. 시험에서 만점을 받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 있는 일에 긍정적인 기여를 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아이들이 성장하면 담임교사인 나도 함께 성장해요.”
<영어 잘하고 싶니?> 안데르스 울랄(52세, 15년차, 초둥등학교 영어와 과학을 가르침)
영어에서 가장 어려운 점은 잘하든 못하든 그냥 영어로 말해보는 것 자체를 아이들은 힘들어한다. 사실 유창하게 영어를 말하게 하려면 정말 용기가 필요하다. 학생들이 영어의 바다에 푹 빠지게 하는 것! 영어를 사용하고 영어와 놀기. 영어와 친숙해지는 것이 영어를 정확히 쓰는 것 보다 중요. 한 학생이 수업 시간에 의견을 말하면 다른 친구들은 모두 존중하는 마음으로 조용하게 경청하는 것
영어 교사로서 울랄이 중요하게 여기는 기본 목표는 교실을 ‘안전한 공간’으로 만드는 것이다. 교사의 역할은 학생들이 영어로 좀 더 많은 대화를 안전하게 많이 하도록 유도하는 데 있다. 틀려도 주눅 들지 않도록 하고 격려하는 것, 교사가 학생들에게 무엇인가를 채워주려고 하다 보면 심문하듯 질문하게 되고, 교사가 원하는 답을 못하는 학생들은 자신감을 상실할 수도 있다. 역할놀이나 경험을 통한 학습 강조.
덴마크에서는 한 선생님이 두서너 과목을 가르친다. 4년제 교사대학을 졸업하고 교사가 되려면 임용 후 학교에서 가르칠 과목을 최소 두 개 이상 의무적으로 전공해야 한다. 모든 학생들이 ‘성취의 경험’을 가지도록 하는 것이 필요.
언어는 실용적이어야 한다. 언어는 근육과 같다. 근육을 강화하려면 실제로 사용해야 한다. 그래서 교사의 역할은 아이들이 어떻게든 영어를 실제로 사용하도록 격려하는 일이다.
<민주주의 게임> 킴 륀베크(49세, 19년차, 초중등학교 사회교사)
학생을 교실의 주인공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들이 같은 공동체의 구성원이라는 것을 느끼고, 교실에서 평등하기를 바란다. 교사의 말을 일방적으로 듣고 있어야 하는 힉셍이 아니라 참여하는 학생이 되도록 하는 것!
칠판 앞에서 교사가 주도하는 수업을 거의 하지 않는다. 대신 교실 자체를 민주주의 공동체로 만든다. 교실은 단순히 민주주의를 가르치는 곳이 아니다. 학생들과 함께 민주주의를 체험하고 구현하는 곳이다. 당당하게 말하기와 조용히 들어주기
학생들 스스로 선택을 해나갈수록 더 독립적이고 책임감 있는 학생이 된다. 이것이 진정한 역량강화이다. 한 사회에서 건강한 시민이 될 준비를 하는 것이다. 덴마크 학교가 잘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서로 협력을 잘하는 사람들을 양성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우리가 배운 지식은 잊어버리기 쉽지만 우리가 배운 기량은 영원히 남는 것이죠.” 다른 사람과 어떻게 어울리고 행동할 것인가? 이에 대한 경험과 기량은 우리 안에 고스란히 남게 된다.
<세계 시민으로 산다는 것> 안데르스 슐츠(42세, 12년차 정치 역사교사, 세계시민의식 프로그램 책임자)
덴마크 아이들은 영어를 잘한다. 덴마크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영어로 된 만화와 책을 많이 읽는다. 아이들이 스스로 세계시민이라는 사실을 자각할 수 있도록 다양한 교육을 한다.
시민의식을 기르는 것, 즉 학생들이 사회로 나가 책임 있는 시민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것이 덴마크 교육의 핵심이다.
“덴마크에서도 교사가 학생들을 젊은 어른으로 대접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습니다. 왜냐면 학생들을 존중하교 대우하면서도 여전히 교사로서의 일정한 권위도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죠. 언제나 이 둘 사이의 절묘한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죠”
덴마크 세계시민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파트너 나라를 정하고 그 나라에 대한 역사 정치 문화 등을 학습한 후 2주간 직접 방문하고 돌아오면 다 같이 경험을 공유하는 시간을 갖는다. 이 때 파트너 나라에 관심 있는 외부인도 초대하여 각자 4분 동안 발표를 한다.
<선생님, 엄마, 친구> 메테 페테르센( 47세, 20년차, 초중등학교 7.8.9학년 지도)
“잘 지내니?”
“혹시 무슨 문제 있어?”
“어떻게 하면 좀 더 기분이 나아지겠니?”
10대들과 함께 지내다 보니 상담가 역할을 겸하기도 한다. 메테 페테르센이 교사에게 전하는 조언 세 가지를 소개한다.
1, 일주일에 한 번씩 학급회의를 열고 어떻게 하면 좀 더 행복한 교실을 만들 수 있는지 토론하자.
2. 학생들이 서로를 인정하게 하자. 모든 학생이 공동체의 소중한 구성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하자. 한 가지 좋은 방법은 매일 아침 서로에게 반갑게 인사하는 것이다.
3. 학생들이 재능을 살려주자. 교실에세 각자의 재능을 최대한 발휘하게 하자. 학습 능력만 너무 강조하면 교실은 우등생과 열등생 두 그룹으로 쪼개질 것이다.
<학교 그만 다닐까?> 페테르 크로그(41세, 11년차, 초둥등학교에서 수학, 독일어, 사회, 체육을 가르침)
덴마크 학생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1~2년 정도 쉬는 경우가 많다. ‘안식년’, ‘노는 해’, ‘노닥거리는 해’ 등으로 부른다. 페테르 크로그는 고등학교 졸업한 뒤 교사가 되겠다는 목표를 정하기까지 6년 간 노닥거렸다. 이런 방황의 시간을 겪은 그의 이야기에 아이들은 집중했고 비슷한 감정을 나누었다. 학생들 중 상당수는 무엇을 공부해야 할지, 어떤 직업을 목표로 삼아야 할지 고민이 많았다. 동병상련, 공감대가 형성되는 과정이었다.
교사는 어떨 때 학생을 더 이끌어낼지, 어떨 때 잠시 놓아줄지를 알아야 한다. 학교에 도무지 적응을 못하는 학생을 위한 일주일에 하루나 이틀은 학교가 아닌 다른 곳에 보내는 프로그램을 작동한다. 지역사회의 회사, 자영업자, 단체와 제휴해서 학교생활에 지친 학생들이 현장 체험을 시키는 것인데 덴마크의 많은 학교들이 이 방법을 활용하낟. 몇 주간 ‘삶의 현장’을 직접 체험하면서 자신의 학교생활을 되돌아볼 수도 있고, 교실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생길 수도 있다.
<그냥 춤춰라> 마리아네 스코루프(47세, 호프트루프 에프터스콜레는 춤, 음악, 공연을 특화해 중3 졸업생들의 인생 설계를 도와주는 1년짜리 기숙학교. 25년째 댄스 교사로 일함)
“아이들은 스스로 어떻게 즐길 것인가를 배워야 합니다. 나는 우리 학생들이 내 지시만 따르는 것을 원하지 않아요. 열려 있는 세계로 학생들을 안내하고 싶어요.”
매일 첫 수업을 체육으로 시작하는데 오전 8시 30분부터 30분간 다양한 몸놀이를 한다. 학생들은 핸드볼, 마라톤, 역도, 요가, 숲길 걷기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비록 30분이지만 이 시간 동안 학생들은 마음과 몸을 깨우고 활동을 시작해요. 숲 길을 걷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죠, 이 과정은 이날의 하루 수업에 엄청난 영향을 줍니다. 아침 운동으로 하루를 시작하면 그날의 수업에 집중할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인생에서 어떤 벽을 만날 때마다 나는 춤을 통해 극복했어요. 학생들은 처음에는 이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요, 그러나 1년을 함께 보내면서 서서히 그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춤을 통해 나의 감정을 마주하고 울분을 발산하고 기쁨을 표현하면서 아이들은 비로소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우리 선생님이 맞았어, 춤이 나의 치료제였어!’라 말해요.”
<노는 것이 공부다> 스트리드 엥엘룬(63세, 24년차, 파이의 섬에 있는 초중등학교에서 근무)
덴마크는 1000개 이상의 섬으로 이루어진 ‘섬의 나라’다. 작은 섬에 있는 학교에서 근무하는 교사들은 상대적으로 더 많은 자유를 누린다.
덴마크 학교법에 따르면 교사는 자신의 교실에서 어떤 방법으로 수업을 할지 스스로 선택할 권리가 있다. 물론 국가 교육과정에 따라 포괄적인 목표는 정해져 있다. 중학교 과정을 마치는 9학년 말에는 전국적으로 같은 시험을 봐야 하낟. 그러나 그 과목을 어떻게 어디서 누구와 공부할지 등을 결정하는 것은 완전히 교사의 자율적 권한이다.
“작은 섬에서는 사는 방식이 조금 다릅니다. 유연해야 하고 서로 도와야 해요. 여기에서 나는 그저 한 명의 교사가 아닙니다. 이웃이고 친구입니다. 나는 선생님인 동시에 섬마을 주민입니다.”
한 아이를 키우기 위해 온 마을이 필요하다. 파이외 스콜레와 파이외 마을의 구분은 무의미하다. 이 작은 섬에서는 학교가 사회이고 사회가 학교다. 덴마크 다른 지역의 학교와 지역공동체 또한 이런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개인은 외롭지 않고, 학교에서도 사회에서도 모두가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아마도 이 점이 덴마크를 행복지수 1위의 나라로 만드는 중요한 요인일 것이다.
<삶을 위한 학교> 토마스 라스무센(46세, 비영리단체인 ‘현실 속의 학교’에서 일함. ‘학교 밖’ 교육을 돕는 곳
학교에서의 일상은 대체로 따분하다. 아마도 전 세계 모든 아이들이 그렇게 느낄 것이다. 하루하루는 반복되고 같은 교실에서 같은 선생님과 별 다를 게 없는 시간을 보낸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교과서와 숙제가 어려워지고 각종 테스트와 시험도 마찬가지다.
아이들은 학교 밖에서 시간을 보낼 때 새롭고 재미있는 일을 많이 경험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체험학습을 위해서 교사는 별도의 시간을 투자해서 사전 작업을 잘 해야 한다. 일부 선생님들은 준비에 드는 수고만큼 과연 효과가 있는가 하는 의문을 품기도 하고, 얼마간 진행하다가 중단하기도 한다.
이런 점에서 비영리단체인 ‘현실 속 학교’를 만들었고 2,000여명의 현장 전문가를 확보해 학교와 연결해주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학생들이 세상에 대해 새로운 관점을 가질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덴마크의 부모들은 자식의 연봉이나 직장의 안정성을 걱정하지 않습니다. 대신 이걸 걱정합니다. 내 아이가 열정을 가지고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일을 과연 스스로 찾을 수 있을까? 그래서 학생들이 사회에서 의미 있는 역할을 할 수 있는 직업이 매우 다양하다는 것을, 행복을 찾는 방법도 매우 다양하다는 것을 꼭 보여주고 싶습니다.”
<이상의 원고는 청람중학교 염손기호 선생님으로 부터 전달받았습니다. 오마이뉴스 오연호 대표가 청람중학교에 강연차 방문한 것으로 전해 들었습니다>
<후기> 글을 쓰면서 ‘작위적인 노력보다도 인구학적 변화가 더 빠르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미국 대선의 결과를 보면서, 미국의 주류들인 백인이 전체인구의 50% 이하로 떨어지는, 그래서 새로운 미국의 탄생이라는 인구학적 변화가 트럼프를 끌어내렸다는 평가를 접하면서 든 생각입니다. 처음 교직에 몸을 담았던 1987년 교실 한칸은 50명이 넘는 학생들로 넘쳐났습니다. 당시의 가장 큰 소원은 학생 개개인들과 인간적 소통이 가능한 최대한인 30여명이었습니다. 당시에는 불가능한 꿈같은 상상이었습니다. 그게 어느덧 현실이 되었습니다. 물론, 이런 정도도 사실은 교사 개인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섭니다. 그럼에도 세상의 물리적 변화가 30여명의 교실 한칸을 현실로 만들었습니다.
분노로 불타는 교실이라는 의제도, 지금과 같이 학령 인구가 가파르게 감수하면, 소멸될 여지가 있습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세상이 저절로 문제를 해결해 줄거라고 방치하는 건 당사자로서 올바른 태도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인구학적 변화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현실의 올바른 변화로 연결시키기 위해서는 선행적인 노력들이 필요합니다. 자연이 자연으로 성립하는 데는, 부자연스런 작위적 노력이 전제됩니다.
덧붙여,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저의 글들은 현직에서의 무능에 대한, 특별히 입시위주의 교육현실에 무능했던 과거에 대한 변명입니다. 과거를 어떻게든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 봉합하려는 시도입니다. 그런 한계를 가지고 읽어 주신다면, 제 글들의 한계를 읽어 내면서, 새로운 생산적 논의의 지평을 여는 계기로서 작동할 수도 있으리라고 기대합니다. 그렇게까지 기능하지 않는다하더라도, 개인적인 수준에서 이런 시도는 변명으로서 증상을 치유하는(개인사를 서사화함으로서) 개인적인 의미를 완성합니다.
2020. 11. 10
전 남 교 육 연 구 소 (책임작성자 :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