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가 말하는 여성 |
이 글은 고병권의 니체 해설에 기본 아이디어를 두고 있고, 내 개인적으로는 지금까지 공부한 페미니즘을 총정리한 글이다. 오버멘쉬라는 옛날 불로그에 한번 올렸었는데, 이 블로그는 사적 성격이 아주 강한 일기장처럼 운영했었다. 그래서 글을 다듬어서 여기에 다시 올린다. 앞으로 거기에 올렸던 몇개의 글들을 여기로 다시 퍼올 생각이다. 왜냐하면 이 블로그는 내가 세상과 소통하는 유일한 통로이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이 근대적 이성에 의존해서 이론을 구성하는 방식에서 한발 더 나아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몰라서 그렀지 아마 그런 논의가 이미 풍부하게 진행되어 있을거라고 생각한다. 이 글도 개인적인 수준에서 그런 시도중의 하나로 읽히길 바란다.
여자란 무엇인가
김용옥의 여자란 무엇인가를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있다. 다 읽고 나서 무언가 사기당한 느낌도 있었지만, 대체로 여자를 보는 새로운 시각을 얻은 기억이 있다. 그 새로운 시각이란 서구 페미니즘의 설명에 대한 김용옥의 불만에 공감한다는 거다.
김용옥은 서구의 사유체계가 지나치게 일원론적이라는 거다. 마찬가지로 서구에서 생성된 페미니즘 이론도 일원론적인 사유체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지적한다. 그래서 서구 페미니즘이 이론구성을 하면서 남성과 여성을 대립적인 관계로 파악하고, 여성성을 남성성 보다 우월한 어떤 것으로 파악하는 경향을 보인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구성된 페미니즘은 남성을 지우거나 거세시켜야할 어떤 것으로 보는 동일시의 폭력성을 피할 수 없다. 근대의 이성이 합리적 기준을 만들고, 그 기준으로 차이들을 없애면서 동일성의 폭력으로 단단한 내부와 외부를 구성하고, 동일성에 포섭되지 않는 외부는 배제하여 억압하는 근대이성의 폭력성을 서구페미니즘도 똑같이 반복하고 있다는 불만이다.
언젠가 이런 입장을 여자들이 많이 있는 자리에서 피력했더니, 모두가 벌떼처럼 일어나 그럼 조선시대의 애 낳고 키우는 공장으로서 여자의 역할을 지지하냐고 거칠게 항의 받았던 기억이 있다. 그래서 차분하게 이 문제에 대한 내 입장을 좀더 정리해두어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차에 내가 잘 아는 사람과 이 문제로 또 논쟁이 붙었다. 그녀는 서구 페미니즘이 가지는 남성성과 여성성의 구별을 대체할 만한 대안적 시각을 제시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래서 이글이 쓰여지게 되었다.
이런 문제의식은 사회에서 여성이 약자로서 존재하고 있고, 그럼으로 여성운동을 지지하고, 여성의 편에서 사고하고 판단해야 한다는 당위성에 대한 문제제기는 아니다. 단지 페미니즘이 성별로 분리된 어떤 성적 특이성을 전제하고 그 특이성 중에서 여성적 특성이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이론구성 방식을 문제 삼고자 한다.
그래서 결론부터 말하자면 여성은 여성이 아니다는 것이다.
여성이 여성이 아니라면 무엇일 수 있는가 ?
대부분의 여자들이 이런 이미지에 자신을 고정시킨다
어느 나라나 뒤돌아 보다 석상이 된 신화의 이야기가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주로 그 대상들이 여자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과거의 세계가 파괴될 것이므로 절대로 돌아보지 말고 떠나라는 신의 계시로 구성된 신화의 결말은 대부분 뒤 돌아 보다가 석상으로 변해버린 여자로 끝난다. 그리고 과거의 세계를 버리고 떠나야하는 대상은 항상 여자다.
이런 신화를 해석하려면 두 가지 수준의 문제제기를 해야 할 것 같다. 첫째는 돌아본다는 것이고 둘째는 왜 여자인가에 대한 질문이 가능하다.
뒤 돌아 본다는 상징적 행위는 주로 지금까지 살아왔던 자기세계를 잊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기존 삶의 양식을 고수하거나, 그것에 고착된 행위를 지칭한다고 해석해야 한다. 자기를 낳고 길러준 과거세계를 깨끗하게 떠나야 새로운 존재의 출현이 가능하다. 과거에 집착하면 새로운 출현은 지체되고, 돌아갈 과거는 파괴되어 있다. 새로운 미래를 낳지 못하고, 과거로의 귀환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 존재는 이쪽과 저쪽의 중간 어딘가에 고정되어 머물 수밖에 없다. 그것이 돌로 굳어버린 석상이 아닐까? 고정되어 머물러 있다는 말은 생성-변화하지 않는다는 말이고, 죽어있다는 의미다.
두 번째 수준은 왜 여자가 뒤돌아보는 존재인가이다. 남성중심사회에서 여성은 남성들에 의해서 그 위치가 서술되고 정해진다. 여성은 남성에 의해서 서술된 역할을 수행한다. 대본을 쓸 수 있는 능력 자체가 남자에게만 부여 되어 있다. 전통 서구 페미니즘이 이것에 주목하여 언어자체가 남성에 의하여 구성되어 있으니, 남성적 언어 사용 자체를 깨지 않는 한 여자들이 주체적인 자기구성 능력을 회복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 것은 올바른 지적이다. 그래서 남성에 의해서 지정된 자리를 떠나야하는 대상은 여자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에 여성이 여성이라고 의식하고 그에 따라 충실하게 사는 것이 남자들에 의하여 주어진 역할극이라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문제는 그게 연극이라는 사실을 알고 수행하는가, 아니면 그걸 여성의 본질적 삶이라고 내면화하여 수행하고 사는가의 차이이다.
그게 연극이라는 사실을 간파하고 있는 영리한 여자들은, 남자들이 쓴 대본을 충실히 수행하면서 그 속에서 자기 삶을 나름으로 만들어 낼 전략을 수행한다. 이런 구도에서 대본을 쓴 사람은 남자이고 그 대본에 따라 충실하게 연기하는 건 여자이지만, 여자는 그 연기를 통해서 남자를 조종하고 지휘하는 것으로 묘사할 수 있다. 여자가 기만을 깨달음으로서 남자를 기만할 수 있다고 말해야 할까? 아니면 여자의 그런 기만적인 연기를 대본을 쓴 남자도 이미 알고서 서로 일정한 틀 안에서 상호기만을 허용하는 삶을 산다고 해야 할까?
가족의 의미를 상실한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누더기가 되어버린 가족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를 나는 상호기만에서 본다. 사회적으로 주어진 가족제도 바깥을 상상하는 용기도 낼 수 없고, 표준화된 사회제도 바깥으로 나갈 경우에 부딪히게 될 두려움이 다 헤어진 천막을 버리지 못하는 기만적인 현실을 연출하는 힘이다. 그러므로 이런 힘은 현실의 삶을 지속적으로 소모시키는 부정적인 힘이어서 내부 구성원들을 지속적으로 억압하거나 기만하여 소모시키는 부정적인 결과를 낳는다.
남자와 여자가 서로 독립적인 인격체로서 관계를 맺지 못하고, 여자의 역할을 남자나 아이를 위한 하위존재로 규정할 때, 여자는 그 관계를 부정함으로서 자기존재를 새롭게 세울 수 있다. 여자가 지금까지 살아왔던 세계를 떠난다는 것은 과거를 뒤 돌아 보지 않고 고개를 넘어가야 가능하다. 고개 넘어 새로운 세상을 긍정해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여자들은 고갯마루에서 고개를 돌려 너무도 익숙하고 친숙한 지금까지 살아왔던 세상을 뒤 돌아 본다. 뒤 돌아 본다는 것은 고개 넘어 세상에 대한 긍정이 없다는 반증이다. 니체식의 표현에 따르면 긍정을 통해서만, 웃음을 통해서만 인간은 인간을 극복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나는 남자가 쓴 여자의 성역할에 충실한 여자를 미래를 산출하지 못하고, 현실에 포박당하여 딱딱하게 돌로 굳어버린 여자라고 말하고 싶다. 남자에 의해서 가장 철저하게 파괴된 여자의 전형이라고 말하고 싶다.
조선을 뒤 흔든 여러 사건 중에서 사방지 이야기는 어느 역모사건에 못지않게 흥미롭다. 예쁜 여자이면서 남성의 성기를 가진 여자는 그 존재 자체로 조선이라는 사회의 유교적 규범을 총체적으로 파탄 낼 개연성을 생득적으로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유교적 규범에 따른 남성과 여성으로 명징하게 경계선이 그어진 조선사회에서 사방지는 그 자체로 조선사회 유교적 규범의 허위와 위선을 드러내어 폭로할만한 혁명적 파괴의 성격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사방지라는 존재의 행위를 통하여 드러나고 폭로되는 것은 조선사회의 유교윤리에 기초한 성규범의 허위성이다. 엄격한 남/녀 분리에 기초한 조선사회의 유교 윤리적 성규범은 사방지라는 존재에 의해서 맥없이 무너질 수 있다. 이렇게 무너진 윤리규범을 다시 정초할 수 있는 것은 물리적 폭력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사방지는 조선사회로부터 물리적 폭력에 의해서 제거되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다면 조선사회는 더 이상 지탱하지 못할 것이다.
엄격한 남녀분리 체제의 성윤리에 기초한 사회체제에서 남녀의 성을 공유한 존재인 사방지 같은 존재는 혁명적이다. 그래서 사방지는 조선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 제거되어야 하는 대상이 된다. 조선사회가 도저히 품을 수 없는 존재로서 사방지는 조선사회의 억압성을 드러내는 지표이자 다른 한편으로 이미 여기 존재하나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 인간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남성이나 여성이 양성적인 존재라는 것은 이미 생물학적으로 수도 없이 많은 연구들에서 밝혀진 사실이다. 그래서 남성이나 여성이 아니라 n개의 성이 존재한다고 말해야 한다. 예를 들어 나는 ‘x/n’ 남성이다 또는 나는 ‘x/n'여성이다라는 말이 성적 정체성에 대한 정확한 진실이다. 여성성 남성성으로 정확하게 가름되는 성적 정체성이란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서구 전통페미니즘은 남성성과 여성성을 가르는 서술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여성성이 남성성에 비해서 우월한 성향이라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친밀한 관계지향성 또는 섬세한 감수성 등이 여성적 특성이라고 말하면서 미래사회에서는 그런 여성적 특성이 요구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런 여성적 특성이 권력지향성이나 지배관계를 관철시키는 강력한 리더십 성향과 같은 남성적 특성들에 비하여 바람직하고 우월한 여성적 특성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미래사회는 이런 우월한 여성적 특성을 천부적으로 가지고 태어난 여성중심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여성주의적 시각은 남성중심사회에서 성립된 남성성에 대립하는 모습으로 여성성을 서술한다. 여성성을 서술하는 근거로서 사회속에서 이미 일상적인 지배의 모습으로 존재하는 남성성을 부정하는 대립항을 여성성의 고유한 것으로 서술하면서 여성성의 보편적 사회화를 주장한다.
이런 주장은 남성성이 가지는 독단적, 강압적 성격을 여성성의 우월성을 주장하면서 되풀이 하는 모습을 띠게 된다. 남성과 여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던 사방지가 여성만을 가지고 그게 자신의 진정한 정체성이고, 그게 자신의 우월성이라고 주장하면서, 진정한 여성이 되고자 했으나, 오히려 그게 남성이 되어버린 꼴이다. 여성성이 남성성에 기대어 반정립 형태로 구성되는 한 이런 오류를 피해갈 통로는 없다.
인류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문자의 사용이 확립된 모든 문화권은 거의 예외 없이 남성중심적인 가부장적 사회라고 말한다. 이걸 페미니즘에서는 모든 역사는 남성의 역사라고 말한다. 역사서술의 주체가 남성이니 당연히 여자를 배제하게 된다는 거다. 그래서 서구 페미니즘에서는 남성의 언어를 여성의 언어로 대체하고자 했다.
이런 대체욕구는 대립권력을 욕망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새로운 대립권력 욕망이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은 여성성으로 남성이 된 여자라는 모순이 발생한다. 이런 모순을 피해가기 위해서는 남성성에 대립하는 모습으로 여성성을 서술하는 방식을 극복해야한다.
예를 들어 여자들의 수동성, 유연성, 예민성, 온순성, 관계지향성 등과 같은 온갖 여성성은 남성성이라고 지칭하는 능동성, 보수성, 강직성, 권력지향성, 투쟁성 등과 같은 것들의 대립 짝이다. 그런데 남성중심사회에서 남성성은 남성들에 의해서 여성성에 선행하여 규정되고, 여성성은 선행하여 구성된 남성성에 의존하여 여성성을 규정한다. 따라서 여성성에 충실하게 산다는 것은 남성들이 지정한 장소를 여자들이 가서 서 있다는 말이다. 남성이 지정해준 자리에 여자가 존재한다는 말은 그래서 어떤 경우에도 여성들의 자립적 존재를 보장해 주지 못 한다. 여성적 특성이 아무리 남성적 특성 보다 우월한 성적 특성이라고 말해 봐야, 그것은 자기기만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남성성/여성성이라고 이항 대립적인 성별 특성을 주장하는 한 페미니즘은 여성성으로 남성이 되고자 하는 욕망을 표현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이 세상에는 수 없이 많은 성이 존재한다고 가정해야 한다. 이분법적으로 남성성과 여성성을 규정하는 것은 김용욱이 지적한 바와 같이 서구의 일원론적인 사고방식에 근거한 패권주의적 권력지향성을 피할 수 없다.
사방지와 같이 남성도 아니고 여성도 아닌 무수한 성적으로 특이한 존재들이 현실적으로 존재하고, 그리고 그런 성적 다양성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인간이라는 존재의 본성에 적합할 뿐 아니라, 인간이라는 존재의 자유를 확장하는데 바람직하다. 그래서 여성, 2/3여성, 1/10000여성, 게이, 레즈비언 등이 자기의 언어로 자신의 서사를 만들어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은, 남성에 포박당한 현실을 벗어나서 자신을 주체적으로 구성하는 시작이다. 수많은 성적 존재가 남성성이 주류화 된 사회속에서 자기 완결적 언어를 가지는 것이 억압적인 남성성의 사회기제를 해체하는 길이다.
cf) 처음 이글을 구상하면서 니체의 여성에 대한 시각에 영감을 받았다. 그러나 니체가 말하는 ‘여성이 여성을 말하면 말할수록 여성이 고립 될 거다’와 같은 언설들에 막혀 내 관점을 만들어 내기 힘들었다. 페미니즘을 비판하는 그의 안목을 따르자니 페미니즘의 존재 정당성을 부정하는 모습으로 논리가 전개되었다. 내 자신이 이분법적 사고에 길들여진 결과였다. 그러다가 사방지라는 존재를 떠올리게 되었고, 이 세상에 n개의 성이 존재한다는 개념을 접하고 비로소 니체의 수용과 페미니즘을 조화 시킬 수 있는 길을 찾았다.
여성과 남성이 아니라 이 세상에 n개의 무수한 성이 존재한다는 것은 두가지 차원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하나는 개별적인 존재들 사이의 성차가 무수하게 존재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개별적 존재들 자체의 내부에 무수히 다른 성차가 있다는 것이다. 이런 다양한 성차들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개인들이 보이는 분열적인 모습도 편안하게 수용할 수 있고, 나와 다른 성적 존재들도 편안하게 수용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측면에서 나는 내 내부에 가지고 있는 남성성과 여성성을 모두 다 긍정한다. 나의 남성성은 권력지향성의 측면이 강하고, 나의 여성성은 약자에 대한 연민과 타자에 대한 섬세한 감수성이다. 이런 두 측면이 지금까지의 나를 만들어 온 주요한 힘이라고 나는 인식하고 있다. 내가 모르는 내안의 또 다른 남성성이나 여성성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므로 내가 아는 한 나는 얼마간 남성이고, 얼마간 여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