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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먹기 또는 놀기

또 - 논다 2(또노라 2)

고창 -- 부안 -- 김제 -- 익산

텐트에 대한 핑계

어제 느즈막에 고창에 도착했다.

너무 늦었다는걸 핑계로 모텔을 잡았다.

원래 출발할 때는 텐트를 치고 숙박할 계획이었다.

그럴 계획으로 20여만원이나 하는 거금을 주고 1인용 텐트를 구입했다.

근데 텐트치고 땀에 절은 몸을 길바닥에 누일 생각을 하니 도저히 엄두가 안났다.

아마 진짜로 그럴 생각이었다면 영광-고창 중간쯤, 어디 한적한 초등학교를 물색해서 운동장 한모퉁이에 텐트를 쳤어야한다.

근데 그게 내게는 너무 엄청난 결단-실천 이어서 그걸 피할려고 깜깜해지도록 그냥 자전거를 타고 내달렸다.

고창에 9시가 넘어 어둑할 무렵  도착하니, 너무 늦었단걸 핑계로 모텔로 기어 들어가기 쉬웠다.

이걸로 아마 이번 여행 내내 텐트에서는 자는 일은 없을 것 같다.

역시나 내 자신을 속이는 일이 제일 어렵다.

텐트는 그냥 장식용으로 자전거 뒷자석에 메달려 있으면서 소심한 나를 이번 여행 내내 비웃고 있을 것이다.

 

 

 부안 줄포를 막 지나면 길가에 있는 영전초등학교.

땀을 식힐려고 잠깐 들어가서 쉬는데 이런데서 텐트치고 야영하면 적당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음.

누가 귀찮게 할것 같지도 않고, 조용하고, 물을 쉽게 조달할 수 있을 것 같고 등등.

 영전 초등학교의 잘 정리된 화단.

중학교나 고등학교 보다 초등학교의 환경이 일반적으로 잘 정돈되어 있음. 왜 그럴까?

 이순신 장군 동상을 보면 요즘에는 쫌 웃긴다는 생각도 들고 안쓰럽다는 생각도 든다.

저 엄숙하고 진지함이 이순신에게 할당된 일종의 역할인데, 한국사회 가부장의 도저한 남성성의 역할인데, 이걸 일방적으로 이순신에게만 요구하는건 너무 가혹하다.

지들은 술먹고 놀면서, 지분거리고 낄낄거리면서 이순신에게만 진지하라는건 너무 부당하다.

이순신에게도 쫌 놀고 웃을 수 있는 여유를 주면 안될까?

실제 이순신은 장가 들고도 내내 백수로 빈둥거리다가 30살 즈음에 겨우 겨우 하급 무관에 합격한다.

그렇게 늦깍이로 관직생활을 하다가 임진왜란이라는 결정적 순간들을 마주하면서 운명처럼 영웅적인 모습으로 변신한다.

누구나 그렇듯이 인간 이순신도 있고 영웅 이순신도 함께 공존한다.

그런 이순신을 탈자연화시켜서 민족수호의 이데올로기로 만드는 과정에서 인간 이순신은 사라졌다.

그건 이순신에게도 부당하고, 그렇게 형성된 이순신을 가부장적 한국사회 남성성의 역할 모델로 따라야 하는 우리도 숨막힌다.

(가부장적 모델로서 이순신을 숭배하는건 박정희식 보수건 NL계열의 진보건 차이점이 없다.)

조선일보 기자가 현장에 가지도 않고 데스크에서 쓴 소설로서 이승복 신화.

그걸 바탕으로 방방곡곡에 세워진 반공이데올로기 신화.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무구한 아이를 체제의 이데올로기로 써먹는 파렴치함(치한)들.

근대민족국가를 언어공동체로 간주한다면 아마도 세종을 한반도 근대민족국가의 기틀을 만든 사람으로 간주해야 할 것이다.

cf) 위의 세개의 동상이 우연히 들른 부안-줄포 영전초등학교 운동장에 나란히 서 있었다.

'가부장적 남성성-반공-언어공동체'라는 한국사회의 비틀린 자화상이 우연이겠지만 참 잘 표현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사회적 무의식이 투영된 결과 겠지.라고 혼자 중얼거렸다

이런데서 바르게 교육받으면 멋진 미래가 아니라 끔찍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

쫌 비뚤어지게 배우고 멋진 미래가 아니라 행복한 미래를 꿈꾸어야 한다.

멋지다는 건 벌써 사회적(자본주의적)으로 표준화된 코드에 맞춘 생활양식이다.

행복이란 말이 비교적 사회적 코드로 부터 중립적인 표현이다.

더 확실하게 말하자면, 자기 방식 대로의 행복.

근데, 아파트라는 촘촘하게 짜인, 타인의 시선에 절대적인 영양을 받을 수 밖에 없는 공간구조에서. 자기 방식 대로의 행복이 허용될까?

이게 리버럴한 자유주의가 처한 한국사회적 딜레마이다.

아파트라는 공간 구조는 한국사회의 체제 감시망, 체제 포섭력의 근간이다.

결론은 한국의 아파트문화는 리버럴 진보주의가 자신의 진보를 팔아먹은 댓가로 얻은, 안전하고 안락한 체제가 선물한 유토피아이면서 동시에 감옥이다.

그렇다면 남는 선택은 모든걸 표준화 동일화 시키는 파시즘과, 그것에 맞서는 또 다른 파시즘적 계급혁명인데, 저울추는 이미 자본주의적 코드로 모든걸 동일화시키는 방향으로 기울었다. 그것에서 벗어나는 양상들은 철저하게 탄압하고, 징벌해서 지운다. 나머지 여분의 공간들 조차 숨쉴틈 없이 삭제당하고 있다.

너무 우울한 묵시록인가?

그렇다면 리버럴 자유주의자의 탈출구는 영영 불가능한 꿈인가? 김현처럼 간경화로 죽을일 밖에 없을까? 술을 핑계로한 자살, 시대와 어울릴 수 없었던 위대한 자유주의자의 죽음, 외부의 다른 길은 없을까?

멸치국수. 3500원. 양많이 주세요 그랬더니 정말로 엄청나게 많이 주더구만. 그래서 내 나름으로 새로운 작명을 했는데 '멸치마니국수'. 이러면 멸치가 많다는 거야 아니면 국수가 많다는 거야!. 그래서 새로운 작명 '마니멸치국수' 또는 '멸치국수마니'. ㅋㅋ 훨났네. 

김제 중앙통 재래시장 뒷골목에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