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틈새문화와 교사 그리고 이데올로기의 종말

틈새문화와 교사 그리고 이데올로기의 종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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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틈새문화와 교사(p.17-19)

한국사회에서 교사들이 가지는 사회-경제적 지위는 대체적으로 중상층 이상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특히 지역사회의 경우 SES의 가장 거친 측정(Social Economic Status)값이 최고점인 9점에 해당합니다. 이런 사회경제적 지위는 교사들이 틈새문화로 언제든지 빠져나가는 조건을 갖추고 있음을 말합니다. 어느 직업 분야나 마찬가지지만 교사라는 직업도 체계의 관리와 감시가 지속적으로 빼곡해왔습니다. 천천히 그러나 쉬지 않고 빈틈을 없애면서 직무수행을 감시하고 경쟁을 부추기고 경쟁결과를 빠짐없이 기록하는 방향으로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체계는 그 촉수를 뻗어갑니다.

교사들의 사회경제적 지위와 빼곡해져가는 체계의 마찰이 불러일으키는 피로가 결합하면, 어딘가 그런 체계적 피로를 해소할 쉴 틈, 즉 빈공간이 필요합니다. 그게 틈새문화 공간입니다. 틈새(niche)란 장식을 위한 여유 공간입니다. 본래는 특별한 기능적 역할이 없이 버려져 있는 휑한 벽에 장식을 위해서 작은 공간을 파내고 그 안에 유한(有閑)을 상징하는 도자기나 미술품 같은 값 비싼 상징물을 넣어 두는 사치공간이 니치공간입니다.

교사들에게 니치문화는 체계의 피로를 위로 받고 싶은 그런 사치공간입니다. 그게 공부이건 스포츠이건 예술이건 술이건 가족이건 아니면 사랑이건, 일단은 체계의 피로에 대한 도피처라는 인식이 중요합니다.

김영민의 생각은 기본적으로 니치문화가 체계적 비평을 튕겨내는 체계의 자기변명이란 겁니다. 체계가 준비한 알리바이라는 거지요. 이렇게 보면 체계는 자기완결적인 탈출구가 없는 폐쇄된 공간입니다. 기껏 도망쳐 숨은 곳이 그리고 쉼터라고 생각한 곳이, 체계의 또 다른 내부라는 겁니다.

니치공간 또는 니치문화가 화폐의 교환에 밀접하게 접속되어 있다는 점에서도 니치적 문화나 공간이 체계에 대한 탈주 또는 저항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니치는 단지 나는 너하고는 다르다는 차이에 대한 욕망의 다른 표현에 불과합니다. 그것도 화폐공간 속에서. 니치문화의 이런 속성은 자본주의의 속성에 기인합니다.자본주의를 하나의 행위주체로 간주해서 설명하자면, 자본주의로부터 탈주하는 새로움에 대해서, 자본주의라는 행위자는 다시 포섭하여 체제 내에 기능적으로 분화시킨다는 설명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개인적인 취향의 하나인 자전거 타기를 들어 비유하자면, 20여년 전의 김훈의 자전거타기가 체제로부터 탈주의 형식이었다면, 최근의 자전거타기는 자본주의적 코드로 완벽하게 재포장되어 재탄생한 자전거타기입니다.

현실교육체제에 이런 니치적으로 스타일화한 다시 말해서 사적 유토피아를 추구하는 니치적 사치행위를 대입하면, 시장으로 변한 학교와 소비자로 변신한 학생과 학부모라는 그림이 나옵니다. 죽고 살기로 벌어서 내돈주고 내가 하는 일인데, 스카이캐슬이건 사교육이건 부모찬스건 무슨 상관이냐는 자유주의적 냉소가 성립합니다. 비평이 들어설 여지가 없습니다. 비평의 개입을 개입각도 그대로 튕겨내는 정당성이 성립합니다.

 

결론적으로 다양한 니치공간 속의 개인들은 개인의 취향을 적극적으로 개성화함으로서 공적권력장으로부터 자유로운 듯하지만, 비평의 실천을 통한 생활양식의 근본적 변화가 없는 한 여전한 매체권력과 화폐권력의 하수인으로 머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루소식의 외로운 산책자가 될 수도 없고, ‘소로식으로 국가권력에 장기적으로 대항하는 숲속 천막의 인간이 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최초의 문제설정으로 되돌아오면, 서로 다른 동무들의 연대형식인 동무들의 비평의 숲에 의지할 수 밖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2) 이데올로기의 종말(p.90-96)

 

각종 종말이론들이 트렌드가 되었습니다. 이데올로기의 종말도 그런 트렌드에 얹혀있습니다. 문학의 종말, 역사의 종말, 이데올로기의 종말 등이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작동하는게 현실입니다. 이런 종말이론들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건, 종말이라는 이데올로기가 숨기는 역사적 변화, 다른 말로 인간들의 생활세계의 변화에 대한 논의를 놓치는 효과를 초래합니다. ‘이데올로기가 끝났다는 언어행위의 효과는, 자본주의적 다양성에 대한 일방적 승리를 승인하는 일과 같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런 종말의 언어들에 대해서 대응하는 적절한 방식은, 그 언어가 활용되는 사회적-역사적 맥락을 살피는 외부성에 대한 시각입니다.

이데올로기에 대한 상식적 이해는 그게 과학적 인식을 가로막는 허위의식이라는 겁니다. 계몽주의 시대에, 과학이 세계 인식의 총아로 떠오른 시대에 그러므로 이데올로기는 물리쳐야할 무지몽매함의 원인으로 치부되었습니다. 맑스로부터 알튀세르에 이르기 까지 모두가 자기 이론의 정당성을 과학적이라는 말로 정립하는 건 그래서 불가피한 선택이었습니다. ‘과학 / 이데올로기라는 비각이 성립하는 시대가 계몽의 시대입니다.

과학적 탐구를 진행하면 할수록 이데올로기가 그냥 무지몽매함이 아니고 세계속에 던져진 인간들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일상의 받침대라는 것이 명확해졌습니다. 물질이라는 하부(경제)가 상부를 구성하는게 아니고 거꾸로 상부인 이데올로기가 물질세계를 구성한다는, 거꾸로 세움의 논리가 가능한 지경입니다. 그래서 이데올로기가 심리학에서는 무의식으로, 언어학에서는 주어진 일상적인 언어를 뒷받침하는 언어구조로(특별히 후기 비트겐슈탄인의 언어게임 이론), 사회학에서는 의사소통의 매체로, 종교학에서는 세계를 창조한 신으로, 그래서 최종적으로는 세계를 구성하는 물질인 기계로 인식되었습니다. 기계가 생각하고, 기계가 쓰고, 기계가 말하고, 기계가 지배하므로, 최종적으로는 기계가 이데올로기이고 신이라는 겁니다

 

이런 이데올로기의 변천사를 훑으면서, 주목해야할 점은,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 식의, 진실 논쟁이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은 물질(기계)과 이념이 서로 착종적으로 경합하는 복잡계라는 인식입니다. 이데올로기로 부터 한발을 빼서 전체국면을 유기적으로 보는 자세가 비평의 자세라는 겁니다.

 

예를 들어, 최근 한국사회의 지배적 이데올로기로 자리 잡은 공정성에 대한 개념을 들여다보면, 공정성에서 사회-역사적 시각을 삭제할 때, 논리적 정합성만으로 옭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이 성립합니다. 그러나 여기에 사회-역사적 변화라는 물질적 환경 변화를 대입하면, 공정성이라는 이데올로기의 보수성이 드러납니다. 주어진 제도와 경쟁의 조건을 문제 삼지 않고, 주어진 제도라는 필터링 과정에서 드러난 결과에 따라, 다른 보상을 주는 것이 공정하다는 논리는 또 다른 보수적 이데올로기에 해당합니다. 최근의 공정성 이데올로기가 자유경쟁이라는 언어와 밀접하게 사용되는 언어실천 맥락을 살펴 보는 것만으로도, 공정성 이데올로기의 보수성을 쉽게 간취할 수 있습니다.

 

이데올로기의 시대는 종말을 맞이하였고, 과학적 이성에 근거한 다양한 자유경쟁(다양성과 관용)의 시대라는 주장은, 자본주의 체계에 기반한 자유주의적 개인주의를 정당화시켜주는 또 다른 이데올로기입니다. 개인주의 또는 자유주의라는 것을, 역사적 맥락에서 살펴보면 근대의 산물입니다. ‘주체는 사회적으로 호명된다’ ‘주체는 집단의 언어게임의 효과라는 말들은 개인이라는 주체가 결코 고립된 하나하나의 개별자가 아니라 역사-사회적 집단의 효과 또는 산물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너무 뻔한 말이긴 하지만, 인간이란 존재는 한번도 개별적 단독자로서 고고하게 독립하여 오뚝 있었던 적이 없는 존재입니다. 오직 타자성에 의존해서만 구성되는 존재입니다. 나라고 하는 존재가 타자성에 구성적으로 연루되어 있다는 전제를 이데올로기에 관련된 논의에서 누락시키는 것은, 자유주의 이론들을 불구로 만듭니다. 결론은 이데올로기의 사회-역사적 지평에 민감해야 한다는 겁니다. 이런 결론을 밀고 나가면, 사회-역사 속의 인간이라는 기준에 도달합니다. 인간을 사회-역사속의 장소로 인식할 때, 이데올로기 논의는 새로운 생산적 활력을 얻게 될 것 같습니다.

 

 

2020. 03. 23

 

전 남 교 육 연 구 소 (책임작성자 :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