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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나 제안서

3-9일 세미나자료 세미나제안서1(한글로 말하는 지식인의 탄생).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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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글로 말하는 지식인의 탄생

 

아직 입에 잘 붙지 않는 낯선 개념들 그리고 말할 때 마다 저항의 마찰이 느껴지는 물건너의 지식인들을 나이 육십에도 지껄이는 일이 피곤합니다. 그것들이 그리고 그들이 설익은 밥알처럼 입속에서 굴러다니는 이물감의 불편함을 한국어로 생각하고 말하는 사람들은 모두 어쩌지 못할 겁니다. 학교를 그만두고, 남아도는 시간을 주체하지 못해서, 도서관에 몸을 묻고 비비 꼬면서, 그런 딜레마의 탈출구 비슷한 토종의 한국 지식인들을 발견했습니다.

물론 이런 발견이 개인의 소소한 욕망에 맺힌 허영의 환상일거라는 생각도 합니다. 그럼에도 이렇게 발설하는 것은, 그런 허영이 세상에 새로운 지혜의 묘맥을 퍼트리는 생산적인 결과를 낳는 씨앗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글을 읽고 쓰는 사람이 자신의 허영과 환상을 말끔하게 털어낼 수 있다면, 그건 이미 세속의 범상한 속물이 아니겠지요. 허영과 환상이라는 비용을 감수하는 것이 어리숙한 얼치기 글쟁이의 역할이라고 생각하고, 나름으로 이제야 한국사회가 자기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자기 언어로 말하는 진정한 지식인을 갖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두 사람을 소개하겠습니다.

 

2. 김영민

 

제일 먼저 소개하고 싶은 사람은 김영민입니다. 오래전에 그가 한겨레 신문에 칼럼을 쓸 때 그의 글을 잠깐씩 곁눈질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이게 누구인지 본격적으로 알아보고 싶은 욕망이 생겨서, 그의 책을 한권씩 모았습니다. 처음 느낌은 난해한 불경을 읽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럼에도 그의 언어는 누구도 정색하고 던지지 않았던 충고를 속삭이는 그런 새로움이 있었습니다.

진리는 약속의 충실성이다. 진리는 이드거니 몸을 끌고 가는 데서 생기는 물질적 변화의 효과다와 같은 말들은, 논리적 정합성에 매몰된 지금까지의 생각들을 뒤 흔들었습니다. ‘표층적 진리는 반대 명제가 성립하고, 심층적 진리는 명제와 반대명제 모두가 진리다와 같은 그의 글들이 너무 신선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실생활에 유용했던 건 동무론에 실려 있는 술에 대한 자본주의 체계적 설명이었습니다. 술과 자본주의 체계를 엮어서 설명하는 글은, 내 개인적인 삶속에서 술이 어떻게 나를 자본주의 체계에 묶는지, 맥락을 짚어볼 수 있는 시선을 제공해 주었습니다. 그렇다고 술에서 해방되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단지 체계 속에서 개인의 운신에 대한 작동기제를 하나 발견했다는 고백입니다. 하나의 사실이 또는 진리가 그 사람의 행동변화에 이르는 건 또 다른 지속적 수행성의 결과이므로, 머리로 안다는 것과 행동의 변화가 일어난다는 건 전혀 다른 차원의 일입니다.

전체적으로 김영민은 보수적 스타일이 있습니다. 쭈욱 진보정당의 당원이었으니 정치적으로 보수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자본주의적 체계와의 불화를 삶의 지향으로 삼아서, 결혼도 안하고, 주민등록증도 작위적인 노력으로 거부하고, 교수직도 팽개치고, ‘일일일식을 실천하면서 촌구석에 독거노인의 삶을 선택해서 살아-내고 있으니, 정치적 보수수의자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단지 그가 보수적 스타일을 가졌다는 건, 체계와의 불화를 통해서 생산적 지식인의 삶을 조형해 낼 수 있는 힘은, 단지 소수의 초엘리트만이 넘볼 수 있는 특별함이라는 태도에 기인합니다. 그가 보수적 스타일을 가졌다는 건 글의 난해함의 불평에 대한 반응에서도 엿보입니다. 소화하기 쉬운 달콤한 카스테라 같은 지식 보다는,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듣기 거북한 소화하기 힘든 거친 곡식과도 같은 말들이 필요하다고 오히려 역정을 냅니다. 일종의 근본주의자 같은 급진적인 진보성이 오히려 그를 보수적으로 보이도록 만드는 일면이 있습니다.

어쨌든 김영민은 한국사회가 드디어 갖게 된 진정한 토속의 지식인입니다. 우리말로 사유하고 우리문제에 천착하고 우리역사속의 앎들을 현대적으로 소화해서 말하는 그가 있다는 건 한국지식인 사회가 서양의 지식인들에 의존하지 않고 독립하였다는 징표입니다.

자본주의적 체계와 불화하는 글(사유)을 쓰고, (대면관계)을 꾸리고, 생활양식(몸의 버릇)을 이드거니 실천하고, --생활양식이 일치하는 삶을 희망이라는 폿대로 삼는, 그의 모습은 어쩌면 지고한 고승이거나 선사 같은 냄새가 풍깁니다. 자본주의적 체계와 불화하는 삶을 기필코 만들어 내겠다는 그의 결기는 사실 흉내라는 제스처 조차도 겁나는 대목입니다. 자본주의적 체계에 세포 하나까지도 속박되어, 그 바깥에 대해서 상상하는 모든 힘들을 박탈당한 삶이 범속한 우리의 숙명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아마도 김영민은 시대를 200년 앞서서 살았다던 니체 같은 아우라를 가지고 있습니다.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시대와 정면으로 맞서는 길을 미리 알아채 버린, 여기 이미 도래한 미래 같은 존재입니다.

 

3. 강신주

김영민이 약속은 지키라고 있는 것이다고 말한다면, 강신주는 약속은 깨라고 있는 것이다고 말하는 스타일을 가졌습니다. 전혀 상반되는 스타일은 문체에서도 뚜렸합니다. 김영민이 빈틈 하나 허용하지 않는 단단한 무사처럼 언어를 부린다면, 강신주는 막노동판의 일꾼처럼 상황에 임시변통한 잡다한 세속의 언어들을 주절주절 거느립니다. 김영민의 공부 모임이 전문적인 학인들로 이루어져 있다면, 강신주의 공부는 시장판의 대중들 속에서 펼쳐집니다.

이소룡이 몸을 갈고 닦아서 예리한 칼처럼 사용하다면, 김영민은 단어와 문장을 갈고 닦아서 그렇게 사용합니다. 그에 비해서 강신주는 성룡이나 주성치를 닮았습니다. 세속의 온갖 해괴한 그리고 상투적인 행위들을 무술로 끌어다 쓰는 그들처럼, 강신주도 시정의 분진과 같은 단어와 문장들을 끌어안고 글을 부립니다.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김영민과 강신주의 이미지들을 한번만이라도 일별해 보더라도, 김영민이 군살 하나 없는 매끈한 근육만의 몸을 가진데 비해서, 강신주는 막노동판의 잡부 같은 후줄근한 몸으로 김영민과 선명하게 대비 됩니다. 김영민과 강신주 둘 다 대학이라는 아카데미아 체제의 학자들을 철저하게 불신하는 건 맞지만, 김영민은 선승의 행위로서, 강신주는 시장판의 상인으로서 그들에게 맞섭니다.

강신주가 대중적인 지식인이라는 건 그가 쓴 책들에서도 선명합니다. 대중적인 상담 프로그램의 결과를 묶은 다상담1-2-3’시리즈도 그렇고,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괴로움시리즈도 시정에서 이루어진 강연의 결과물입니다. 대중적으로 시장판에서 일반인들과 치열하게 부대끼는 삶을 배경으로 하는 강신주의 수많은 저작들 중에서 별난 건 동양-서양을 모두 포괄하는 철학사를 썼다는 겁니다.

철학 vs 철학이라는 방대한 작품입니다. 우선 1500 쪽에 가까운 두툼한 부피가 압도적입니다. 책이 아니라 목침으로 쓰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물질감이 이 책의 첫 번째 느낌입니다. 우리말 한글로 우리의 문제의식이라는 필터로 걸러서 동양과 서양의 철학자를 모두 나름으로 고유하게 정리하였습니다. 이제야 우리가 남의 언어가 아닌 우리의 언어로 세계를 해석하는 인식체계를 얻었다고 보아야 할 정도로 대단한 업적입니다.

강신주 이전의 한국 철학사는 서양의 철학을 다급하게 번역해서 끌어다 쓰는, 그것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해서, 전혀 맥락과 어긋나게 편의적으로 사용하는 얼치기 수준이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강신주의 철학 vs 철학은 한국 지식의 역사를 그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야할 역사적 분기점이 되는 그런 성과에 해당합니다.

이 책의 내용이 동양과 서양의 철학사 전체를 아우르니, 간단명료하게 정리할 재주를 부릴 수 없습니다. 개인적인 수준에서 어떤 한 부분이 유익했다고 진술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간단한 소견을 말하자면, 강신주가 노자/장자를 서로 다르게 해석하는 부분입니다. 노자의 저술은 지배자의 권력 운영에 관한 텍스트이고, 장자의 작품들은 타자와의 소통 방법에 관한 텍스트라는 주장입니다. ‘노자/장자의 시선이 계급적으로 판이하게 다른 지배계급/피지배계급에 주어져 있다고 말합니다. 개인적으로 한자에 대하여 문맹인 수준이지만, 그의 글을 읽으면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정치하게 논증하고 있습니다. 강신주가 한글로 말하는, 중국이나 서양의 세계로부터 독립한 새로운 지식의 세계를 구축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다른 하나는 하이데거의 보수성에 대한 비판입니다. 하이데거의 글들은 해설이 충실하게 붙은 것들조차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경우가 태반입니다. 한페이지도 넘기기 전에 책을 집어던지게 만드는 신기한 제주를 가진 사람이 하이데거입니다. 그런 난해한 하이데거를 강신주는 자신만의 고유한 문제의식으로 멱을 따는 재주를 보여줍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삭제된 하이데거만의 고유한 문제의식이 있을 겁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그게 누가 되었든, 아무리 지고한 존재일지라도 삶을 영위하는 현재세계를 해석하고 변화시키는 안내서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지식은 아무런 쓸데없는 쓰레기와 다름이 없습니다. 하이데거의 사유체계가 왜 나치즘과 친화성을 가지는지에 대한 강신주의 설명은 하이데거를 쓰레기로 처리하게 해줄 확실한 안내서입니다.

강신주의 하이데거 비판은 하이데거의 사유체계가 가진 위상학적이고 수직적인 논리구조에 집중합니다. 단순하게 말해서 존재가 존재자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라는, 위계서열이 분명한 논리를 지적하면서, 이런 논리구조가 나치즘에 대한 친화성을 필연적으로 배태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하이데거의 위계적 논리 구조에 따르면, 게르만 민족은 타민족에 비해서 절대적으로 우수하고, 그러므로 유태인이나 집시 등과 같은 타자들을 지배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논리로 용이하게 전용됩니다. 게르만 민족이 존재라면, 타민족인 유대인이나 집시들은 존재의 빛에 의해서만 드러나는 존재자들입니다. 이런 논리는 게르만민족의 우수성이라는 이데올로기를 타자지배와 탄압의 정당화의 논리로 자연화시킵니다.

강신주의 이런 지적은 하이데거를 비판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분명한 준거를 우리의 지식계에 제공해 줍니다. 하이데거의 아우라에 압도되어 공자님 모시듯 하던 한국지식계의 과거를 확실히 극복한 모습입니다. 제자이면서 연인이었던 그러면서도 하이데거와 정반대로 나치즘을 비판하는데 평생을 바쳤던 아렌트가 하이데거를 영리한 여우라고 지적했던 이유를 강신주에게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렌트가 하이데거를 끌어 안고 내파한다면, 강신주는 아렌트의 그런 내파 행위를 충실하게 기술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강신주의 철학 vs 철학은 확실하게 한국의 지식계가 자립의 기반을 확보하였다는 선언문에 해당합니다. 우리의 철학사가 세계의 철학사라는 독인인들의 자긍심, 우리의 문제는 우리의 이론으로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는 프랑스인들의 자신감을, 이제 더 이상 부러워해야할 이유가 사라졌습니다.

물론 이런 해석이 또 다른 조급한 환상이고 허영임을 잘 압니다. 그렇지만 환상과 조급함이 없는 그리고 자아의식의 이기심에 오염되지 않은 새로운 창조가 어디 있겠습니까. 사람이하는 일인데! 오역 또는 오해가 다른 창조의 씨앗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물론 오역과 오해에 악마적 충실성이라는 현실을 뚫어내는 일관된 실천이 따라 붙어야 한다는 조건이 있겠지만!

지금은 어쨌든 우리의 문제를 우리말로 해석하고 풀어내는 작업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더 이상 한국사회의 문제들을 우리 외부의 사유들로 재단하고 해결 방법을 모색하는, 따라잡기의 사유가 불가능한 변곡점에 도달했다는 것이, 거칠지만 직관적인 판단입니다.

 

4. 제안

 

그래서 제안합니다. 우선 김영민과 강신주의 책으로 연구소의 세미나를 시작해봅시다. 전남교육연구소가 전남도교육청이나 전교조전남지부와 다른 수평적 배치의 위치를 갖는다면, 이런 식의 메타적 이론들을 만들어 내는데 있을 겁니다. 현실적으로 관료적 행정지원체계나 전문적이고 기능적인 학술적 자료 가공 인력이 없는 상태의 불가피한 선택이기도 하고, 전교조 창립이래로 전교조가 맡아왔던 외부성의 시각에 대한 자원이 고갈된 현실을 반영하는 능동적 선택의 새로운 시도이기도 합니다.

이런 제안이 성공의 가능성은 희미하고, 실패의 전망은 훤하다는 것이 솔직한 고백일겁니다. 수십년을 땀 흘려 어렵게 흭득한 권력도 제대로 간수하기 힘겹다는 불평도 자자하고, 논의가 현실적 지평과 너무 거리가 있는 메타적 수준이라는 문제점도 지적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을 만지작거리는 사람도 필요하고, 한 발짝 떨어진 거리를 확보하고 생산적 비평을 주무르는 사람도 필요합니다. 아마도 전남교육연구소의 역할이 있다면, 우선은 후자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김영민을 흉내 내서 말한다면, 생각으로는 생각 밖으로 빠져나올 수 없으니, 실패하든 주저앉든 이제 세미나 모임을 구체적으로 꾸리고 시작하겠습니다. 거기에 힘이 닿는 데로 참여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최소한 두명만 모이면 포기하지 않고 한발씩 나아가겠습니다. 개인적인 수준에서 말하자면, 작심삼초가 제가 일하는 방식이고 패턴입니다. 이번일은 작심삼초가 안되었으면 좋겠습니다.

 

 

2020. 03. 09

 

전 남 교 육 연 구 소 (책임작성자 :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