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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경치

꽃 놀이

 

 

 

 

 

지난 봄에 꽃 사진을 많이 찍었다.

그 중 이 둘은 계속 머리속에 남아있다.

이렇게 예쁜 노란색과 보라색이 있었다니!

밑에 있는 보라색 엉겅퀴 꽃은 땀이 베어있다.

자전거를 타고 흭 지나쳤는데, 계속, 다시 돌아와서 날 보라고 유혹했다.

그 유혹을 못 이기고 발길을 돌려 다시 찾아갔다.

십여리를 되돌아 갔다.

지난 봄을 이런 꽃 사진을 찍으면서 보냈다.

그러면서 문득 생각하는건, 내 속의 어딘가에 있는 한량 기질의 귀환이다.

천하에 나 같이 태평하고 무사하고 안일한 사람이 있을까?

물론 그런 무사태평한 성격이 체계의 코드를 빗겨, 세상의 이면을 보게하는 힘이라는 것도 잘 안다.

원인과 결과를 뒤집었다.

거꾸로 보자면, 세상의 이면을 보는 힘이 무사태평한 성격을 만들었을 것이다.

너무 나르시스틱 한 해석인가?

뭐가 원인이고 결과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원인과 결과가 뒤 섞이고, 그걸 알 수 없는게 세속의 본질이다.

알고 싶은건, 체계라는 초자아 코드와, 그 밖을 왔다리 갔다리 하는 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언제 까지 일까?

질문을 밀쳐두고 다시 한량론으로 말을 있자면, 한량의 정면은 비생산성이라는 도덕적 타락이고, 이면은 다른 생산성이라는 윤리적 구원이다.

김영민 빠에 충실하게 결론을 내리자면, 체계의 코드를 빗겨  이드거니 살아내는 다른 생산성으로서 충실한 생활양식이 어느 시대나 필요한 삶의 대안이다.

도덕이 체계의 뻔뻔한 지배 이데올로기라는 폭로는 더 이상의 비밀도 아니고, 윤리가 충만한 생활습관으로서 굳어진 다른 생활양식과 생산성의 돋을 새김이라는 것도  명료하다.

자본의 전일적 지배로 모두가 하나가 되어 버린 이 황폐한 시대에.

내가 찍은 꽃들이 그렇게 말한다.

너무 명징한가? 그리고 아직도 낙관의 바다에서 허우적 대고 있는가?

cf) 꽃의 말 : 봄날은 갔고, 기하학의 정신이 인문의 뇌수를 소각해도(이상), 또 봄날은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