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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덜대기

도망 - 김현에게로

자신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잘 알지 못하는 글들이 있다.
그런 글들은 분열적 증상이다.
시간의 흐름과 함께 나중에 그런 글들은 어떤 증상을 앓고 있었는지 적시해준다.

사회전체 단위에서도 그런 해석이 가능하다.
당대의 글들은 당대의 사회적 증상이다.
내 경험으로, 세기말 마지막 20년은 분열증의 시대였다.
거의 읽을 수 없는 지경의 글들이 난무하던 시절이다.

그런 시절 유난히 미려한 문장을 구사하는 사람이 있었다.
독해하기 쉽다는게 아니라, 모던한 스타일을 제대로 구사할 줄 알았다고 해야 할까?

내게 그런 사람은 김현이었다.
무슨 말인지도 모를 글들을 억지로 읽어내야하는 상황에서 김현의 글들은 너무도 쉽게 나를 낚아챘다.
독해가 불가능한건 마찬가지지만, 김현의 스타일은 너무 멋졌다.

'---에 다름 아니다'라는 식의 불어식 표현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 생각들을 마구 쏟아낸것도 아마 사실일 것이다.
그렇지만, 당시에 그런 한계로 부터 자유롭지 못한 사람이 그뿐일까?

그럼에도 그의 글들이 모던의 첨단처럼 읽혔던 이유는 따로 있다.
다르게, 그는 자신의 입장과 한계를 분명하게 자각하고 있었다.

'나는 단지 부루주아적 지식인이다'.
'창작을 넘볼 능력이 없으니, 비평에서라도 아름다운 글을 쓰고 싶다'
'작가의 머릿속을 들여다 보고 싶었다'는 것과 같은 고백이다.
대부분의 지식인들이 사회적 계몽가로 자신을 자리매김하기 급급할 때, 그런 태도와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
모든 계몽적 지식인들의 권력욕망을 그는 제대로 꿰뚫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보다 솔직하게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그 작은것에 충실하려고 애썼다.

그런 사소함에 대한 충실이 그의 문체에 자유로운 개인과 같은 모던한 이미지를 창출헀다.

대신에 그는 자신이 사소해지는걸 피할 수 없었다.
나이 50을 채우지도 못하고, 그게 술로 세월을 버텨야만 했던 이유다.

권력에 미쳐버린 열정의 시대에, 그의 문제의식은 초라해 보였다.
아무도 모르는 권력에 미친 말들만 무성한 시대에, 그의 중뿔난 자의식은 너무 선명했다. 

그래서 당시에 김현을 읽는다는건, 금지를 위반하는 통쾌함을 주었다.
알지도 못하는 말들을 지껄여야 하는, 헛소리라는 시대적 증상을 앓아야만 했던 사람들에게 위안의 성찬이 되었다.

사람들은 그가 말이 통하는 제자들에 둘러 쌓여 행복한 삶을 살았다고 말한다.
하지만, 헛소리가 난무하는 세상에 그는 진저리가 났을거다.
글이란게 고작 권력을 향한 번역이 전부였던 시대에,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는 말을 쫒는게 쉬운 일일까?

뜬금없는 고백인데, 다시 그런 헛소리의 시절이 되돌아 왔다.
칼을 뽑자마자 벌벌 기어 다니는 현실을 보니 그냥 힘이 빠진다.
다시 칼을 넣고, 할일 없이 칼집만 만지작 거린다.
이러다가 아마도 평생 칼을 휘두루지 못할 것이다.

가진게 너무 많다.
산더미처럼 쌓인 만사를 제껴 놓고, 김현에게 도망가던 날이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