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나리오만 좋다면 어떤 것도 영화화할 수 있다.
좋은 시나리오만 가져와라.
돈은 얼마든지 있다'
할리우드 영화제작자들의 말이란다.
전우치를 보고나서 이게 사실이라는 실감을 했다.
할리우드 영화가 그럴때는 그냥 할리우드니까?라고 무심코 넘겼는데,
전우치를 보고 나서는 이게 그냥 우리 현실이 되었나!라고 생각했다.
현실이 구체적 실재가 아니라, 가상의 시뮬라르크로 존재할 때.
어떤 서사라도 영화로 만들 수 있다는건,
어떤 상상이라도 구체적 현실로 만들 수 있다는 말이다.
포스트모던은 구체적 실재가 사라지고 그 자리를 수 많은 가짜 복제물이 채우는 시대다.
복제가 임계를 넘으면, 절대적 권위를 자랑하던 실재가 오히려 복제물에 의해서 왜곡되는 시대다.
복제-시뮬라르크가 거꾸로 실재를 구성한다.
시뮬라르크가 구체적 현실을 구성한다.
전우치는 그걸 증명하고 싶어하는 것처럼 보인다.
근대의 역사적 서사란 과거로부터 시계열을 따라 앞으로만 진행한다.
역사의 종말이란 근대의 이런 시간 흐름이 붕괴되었다는 말이다.
포스트모던은 시간의 흐름이 무너지고, 대신에 과거와 미래가 서로 혼입한다.
전우치에서 시간은 과거와 현재가 서로 겹쳐있다.
시간은 과거에서 현재로도 진행하고, 거꾸로 현재에서 과거로도 진행한다.
영화의 서사가 산만한건 그런점에서 불가피하다
벤야민식으로 말해서 우리는 세상을 견고한 정물로서 볼 수 없는 시대에 산다고 해야한다.
산만함은 일종의 시대적 징후이고, 우리가 바라보는 세상은 산만하게 흩어진 모습이다.
근대는 실재-원본의 절대적 권위에 따른 서열체계를 가지고 있다.
원본에 가까울수록 더 많은 권위-지위를 가진다.
하나님과 가장 가까운 원본을 가진 도사-신선-사제-스님 같은 종교인들은 당연히 가장 높은 권위를 가진다.
전우치에서는 그걸 전복한다.
영화에서 주인공 전우치 도사는 인기에 연연하는 가벼운 세속적 인물이다.
그는 세속의 누구 보다도 대중의 인기에 연연한다.
도술로 사람들의 환심을 사고 싶어 안달이고, 편의적으로 남의 물건을 훔친다.
진지하기 보다는 가볍고, 정확하기 보다는 실수투성이다.
사건은 필연적 인과관계가 아니라 실수 때문에 발생하고, 그걸 봉합하기 위해서 서사가 굴러간다.
현실을 가지고 놀고 싶어하는 감독의 의도가 드러나는 대목은 영화에 대한 희화화다.
영화는 전체적으로 논리적 인과관계에 아예 관심이 없어 보인다.
제일 맥락없는 부분은 영화에 대한 희화적 에피소드다.
억지로 끼워 넣은게 분명한 영화속에서의 영화에 대한 장난이다.
도도한 영화배우 염정아를 까발겨서 유머를 만들고, 신비한 임수정을 푼수 캐릭터와 섞어 놓는다.
영화에서 제일 큰 비중이 있을 것 처럼 말하다가, 갑자기 임수정을 사소한 실수의 캐릭터로 전락시킨다.
임수정 캐릭터는 영화를 가장 황당하게 느키게 만드는 부분이다.
이렇게 논리적 서사를 포기하면 남는 것은 황당한 산만함이다.
감독은 그게 정직한 현실이다.라고 말하고 싶었는가 보다.
연극이 실재의 원본인 배우의 아우라에 기댄다면, 영화란 수 많은 복제물이 원본을 거꾸로 구성한다.
전우치에서는 그걸 가감없이 노출 시킨다.
연극이 공연현장의 진실한 일회적 실재를 노출시킨다면, 영화는 실재의 복제들 놀이다.
복제들이 시도 때도 없이 여기저기 출현한다.
그런 가상들의 번창은 어느덧 실재를 구성하는 현실이 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란 이런 시뮬라르크로 존재하고, 우리의 인식은 그렇게 조직되어 있다.
연극이 근대적 존재양식을 반영한다면, 영화는 포스트근대의 세계에 대한 반영이다.
그래서 영화로 영화를 이야기한다는건 우리의 삶의 양식을 폭로하는 효과가 있다.
에피소드처럼 끼어든 영화속의 영화에 대한 이야기는 그런효과를 노린다.
염정아의 추래함과 임수정의 사소함은 그런 자기 고발이자, 영화의 자학이다.
감독은 결국 히어로를 소극화하고, 그걸 더 밀고가 영화 자체를 조롱거리로 만든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한갖 허접한 가상의 꿈이다.
이걸로 강팍햔 현실을 호도하고 싶은지, 아니면 그 강팍한 현실을 사는 관객을 위로하고 싶은건지?
결과로 영화는 산만한 B급 영화가 되었다.
웃고 즐기다 보면 훌쩍 허당하게 엔딩씬이 오른다.
무겁고 진지한 감동 같은건 애당초 의도에 없던거다.
시간 됐으니 이제 집에 가면 되잖아?라고 말한다.
할리리우드 히어로 영화가 절대악에 맞서는 절대선을 그린다면,
전우치는 그런게 어디있어!라고 비웃는것 처럼 보인다.
그런점에서 네티즌들이 말하듯이 이 영화는 한국적 히어로영화다.
할리우드와는 전혀 다른길을 가는, 할리우드적 기준으로는 허접한 히어로다.
하지만 이 허접한 히어로는 그 어떤 영화 보다도 시대적 징후가 풍성하게 읽히게 만든다.
그건 현실이 무너졌다는 현실이다.
근대적 현실이 붕괴된 자리에서 복제와 모방의 시뮬라르크들이 번창한다.
이렇게 해석하면 전우치는 시니컬한 정치성을 표방하는 가장 포스트모던적 영화가 된다.
허접한 B급 영화가 갑자기 고급스럽고 예술적인 시대적 징후가 읽히는 영화로 둔갑한다.
전우치가 껄렁한 건달에서 좀 성숙한 도사로 변신하는 결말처럼!
그렇게 좀 억지스럽고 황당한 웃음을 따라가면, 관객들은 그냥 2시간 짜리 즐거운 볼거리에 만족할 수 있다.
관객들은 우습고, 그 뒤에 감독의 시니컬한 웃음이 있고, 강동원의 웃음은 그걸 닮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