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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경치

블로그에 대한 생각


언젠가부터 블로그에 글을 올리는 일이 숙제처럼 느켜졌다.
처음 블로그를 시작할 때는 쏟아 내야할 말들이 가슴속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그냥 가슴에 품고 있으면 무거워서 무너져 내리지 않았나 싶다.
누에가 고치를 만들기 위해서 실을 뽑아내듯 정신없이 글들을 쏟아냈다.

뒤돌아 보니 당시에 쓰고자했던 글들은 철저하게 주관적 글 쓰기였다.
그때까지 3인칭 관찰자적 시점이 내가 세상을 보는 방식이었다.
3인칭 관찰자로서 항상 세상을 객관화시켜 내려다 보았다.
관찰자로서 객관화된 사회적 사실이 항상 주인이었다.

누구나 그런 3인칭으로서 주어지는 굴레를 벗어 던져 버리고 싶은 욕망에 전율한다.
또 모두가 그것에서 미끌어지지 않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사회적 사실위에서 미끌어짐과, 그 위에 필사적으로 매달려 있으려는 모순된 힘들이 삶이라는 생각이 든다.
세속적으로 현명한 인간이란 그 위험스러운 균형을 잘 유지하는 것이다.
설사 그 균형이 무너졌다,해도 그걸 순간의 우연한 사건으로 재빨리 치환한다.
곧바로 그 흐트러지기 쉬운 균형의 줄 위에 다시 올라 선다.
그리고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그게 평균적인 지혜라고 언급되는 그 무언가일 거다.

그런 균형잡힌 줄타기를 포기하고 새로운 글 쓰기를 시도했다.
블로그에 쏟아낸 말들이 누에 고치 같은 집이 되었다.
허름하지만 100여개의 글들이 모여 가상의 공간에 새로운 정체성이 만들어졌다.
말 그대로 그건 현실의 내가 아닌 가상의 오브제였다.
현실속의 내가 가상의 그것과 상호작용하기 시작했다.

철저하게 주관적이고자 했던 주관의 산물인 그것은 객관적 오브제가 되었다.
그런 객관적인 오브제는 거꾸로 나를 객관화시키기 시작했다.
가상의 공간에 있는 그것를 통해서 객관화된 나를 볼 수 있었다.

결국 글 쓰기는 그것이 무엇을 지향하건 자기로 되돌아온다.
어떤 글 쓰기든 그것은 자기 성찰로 되돌아온다.
그걸 효과적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주관적인 글 쓰기가 필요하다.
3인칭 관찰자의 시점을 선택해서 공자왈 맹자왈 했다간 자기가 감추어진다.
현실속의 나를 비추어 볼 주관적인 내가 만들어질 여지가 없다.
주관의 끝까지 밀고 나가야 객관의 세계가 열린다.

블로그는 그런 주관적인 글쓰기에 적당한 매체였다.
익명성을 전제로 자신의 주관성을 마음껏 펼칠 수 있다.
100% 익명성이 확보되지 않는다,할지라도 필요한 경우 익명의 동굴속으로 언제든 숨어들 수 있다.
철저하게 익명성 뒤에 숨지만 익명성의 이름으로 타자들과 손쉽게 소통할 수 있다.
수 많은 익명의 존재들과 자유롭게 소통하는건 그게 철저하게 자기 주관성에 근거한다 할지라도 자신의 객관화에 커다란 도움을 준다.

개인적 취향으로 나는 철저하게 주관적인 글 쓰기를 하는 블로거들을 존중한다.
그들의 글은 거칠고 투박하다.
그렇지만 3인칭 관찰자 시점을 취하는 어떤 유려한 글들 보다 풍부한 영감과 감흥을 품고 있다.
그런 글들에서는 삶의 거친 호흡이 쏟아져 나온다.
날것의 숨김없는 삶의 결들을 따라가면서 나는 숨을 헐떡인다.
그들의 거친 숨결이 내 호흡을 가파르게 한다.
그런 공명의 느낌들이 내 삶을 팔딱 팔딱 살아있게 한다.

저 높은 3인칭 관찰자라는 전지전능한 Bird Eye's Shot 으로는 그런 스펙터클한 장면을 결코 보여줄 수 없다.
총알이 날아 다니고, 폭탄이 터지는 화약 냄새 자욱한 현장이 결코 포착되지 않는다.

'나' 왈이 내가 타자와 소통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이다.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최소한의 조건이다.

그런데 철저하게 주관적이기를 바랐던 이 블로그가 '나'왈을 새롭게 쏟아내는데 일정한 한계에 봉착했다.
글을 써 놓고 보면 계속 같은 말을 반복하는 내 자신을 발견한다.
더이상 새로운 '나' 왈이 아니다.
이미 굳어져서 고정된 나가 왈왈거리며 시끄럽게 소음을 내고 있다.

처음 시작할 때 내가 하고싶은 말만 담아서 100개의 글을 쓰려고 했었다.
실제로 100여개에 가까워지면서 말들이 메말라갔다.
100여개를 넘어서면서 부터는 억지로 말들을 짜내야 했다.

그래서 이제 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