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에 블로그에 쓴 글을 읽어 보니 너무 비관적이다.
김영민의 삶에 대한 자세가 워낙 진지하고, 심오하다.
그게 내 글에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
김영민은 체계에서 벗어나라고 충동질한다.
그가 제시하는 방법은 공부로 몸을 단련하라는 거다.
단순무식하게 그를 해석하면, 근대성의 체계(자본주의 체계)로 부터 벗어나는 방법이란 근대적 물질의 배치로 부터 미끌어지는 삶-몸을 구성하라는 거다.
그가 슬쩍 내비치는 구체적 방법이란 부재의 삶이다.
그가 없는 것은 아내-주민등록증-핸드폰-자동차다.
이게 나 처럼 범속한 사람이 실천하기는 엄두가 안난다.
작년 겨울방학에 블로그에 글 쓰기를 하면서 체중이 4kg쯤 빠지는 경험을 했었다.
그때 경험으로 글 쓰기가 실제로 신체를 새롭게 재구성한다는 경험을 했다.
내 신체를 강렬하게 구속하고 있던 무기력증 같은 것을 그 때 털어냈다.
아마 글 쓰기가 없었다면 지금과는 판이하게 다른 삶을 살고 있을것 같다.
그런점에서 가장 쉽게 체계의 포섭으로 부터 벗어나는 길은 글 쓰기다.
당연히 글 쓰기를 위해서는 읽기가 동시에 진행되어야 한다.
김영민 같은 대가가 되는 길은 너무 어렵다.
단지 체계의 노예로 전락하지 않을 최소한의 길을 제시하는게 오히려 더 필요하다.
그건 몸을 책읽기와 글쓰기에 배치하라는 거다.
읽기-몸-쓰기, 이런 식의 몸의 배치면 최소한 체계의 노예가 되는 길은 피할 수 있을것 같다.
그런데 몸이란게 일종의 공동체성이 있어야 한다.
타인들과의 관계를 배제한 완전한 독립적 존재란 있을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된다.
몸은 부단히 타인들과 접속해야 한다.
인간은 필연적으로 관계적 존재다.
김영민은 동무를 추천한다.
김영민이 말하는 동무는 同無다.
같은게 없다는 거다.
그가 그 전형성으로 제시하는게 박제가와 이덕무다.
이들은 박지원의 연암구룹에 속하는 17-18세기 조선말기 사상가들이다.
김영민에 따르면 박제가는 황소의 상을 하고 있었다.
이덕무는 조신한 선비 스타일이었다.
같은게 없는 이 둘은 서로에게 늘 서늘한 관계였다.
이덕무는 박제가의 급박한 성정을 항상 걱정스러워 했다.
박제가는 이덕무의 꼬장꼬장함을 싫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박지원 이라는 천년묵은 능구렁이와 함께 권력에서 미끌어져 간다.
그리고 미끌어지면서 조선유학의 답답함을 깨고 북학이라는 새로운 세계를 열었다.
동일성을 추구하는 친구란 어찌보면 유아적 감성이다.
사람이란 서로 다를 수 밖에 없다.
서로의 차이를 서늘하게 보아줄 수 있는 관계 그게 성숙한 관계일 것이다.
나의 동일성으로 상대를 포섭하는건 일종의 폭력이나 다름없다.
조폭영화의 주요한 감수성인 '우리는 식구다. 우리가 남이가!' 같은 정서들은 서로의 차이를 무화시킨다.
이게 프로이드의 엘릭트라 또는 오이디프스 심리와 동형성을 가진다는건 직감으로 알 수 있다.
대부분의 조폭영화가 가족 공동체적 감수성의 변주곡들로 허우적대는 스토리를 가진다.
동일성으로 상대를 묶어야하니 그런 유아적 감수성에 빠질 수 밖에 없다.
이런 관계는 탈출구 없는 자폐적 구조를 낳는다.
서로를 그 구조안에서 소모시켜, 폐기한다.
서로의 차이들로 미끄러지고 분열해야 한다.
그게 김영민이 말하는 同無의 관계다.
서늘하게, 서로 바라보면서 和而하는 관계일 것이다.
그렇다면 체계로부터 최소한의 자유를 확보할 수 있는 몸의 배치란 책-동무(몸들의관계)-쓰기 일것이다.
네그리의 말에 따르면 인간의 존재양식이 네트워크로 이동했으니, 책-동무(몸들의관계)-네트워크-쓰기 일것이다.
여기에 유머(니체)를 덧붙이면, 김영민의 진지함을 넘을 것 같다. http://www.sophy.pe.kr/
그럼 이런 몸의 메트릭스가 출현하나!
책-유머-동무(몸들의관계)-네트워크-쓰기.
언젠가는 만들 수 있을거다.
김영민식의 부재를 실천하자니, 엄두가 안난다.
오히려 그런 부재로 나아갈 내공을 쌓을 수 있는 존재의 관계망을 짜는게 실천의 맥락을 제공하는 것 같다.
cf) Once Upon a Time In America
최근에 심심해서 이 영화를 반복해서 보았다.
스토리가 워낙 왔다리 갔다리 한다.
시간도 뒤 섞여 있고, 인물들도 복합적이고 중층적이다.
반복해 보면서 확실한건 조폭영화의 전형성이라는 거다.
로버트 드니로는 섬세하고, 예민하고, 문학적인 여성성을 가지고 있다.
제임스 우즈는 끊임없이 사업을 벌이고 확장하면서 목표달성을 위해서는 피도 눈물도 없는 남성성의 전형이다.
먼저 드니로가 친구들을 배신한다.
드니로의 배신은 더 이상 범죄의 세계에 친구들이 빠져들어가는걸 막겠다는 섬세한 심성이 작동한다.
마지막에는 우즈가 드니로를 배신한다.
그의 배신은 철저하게 자신의 성공을 위한거다.
이런 과정에서 드니로는 우즈의 본성을 파악한다.
그러나 섬세하고 심약한 그는 우즈에게서 벗어나지 못한다.
가난한 어린시절을 같이보낸 친구라는 동일성에 포박되어 있다.
최종적으로 그는 우즈에게 사랑하는 연인까지 빼앗기고, 모든걸 빼앗긴다.
그래도 그는 심리적으로 그에게 남는다.
친구니까!
이태리 조폭영화의 전형인 '대부'시리즈를 변주했다.
친구-식구-가족-형제자매 같은 끈적한 감수성들이 폭력과 뒤범벅이 되어 철철 넘친다.
이준익이 할리우드의 자본으로 할리우드시스템에서 영화를 만든다면 이런 영화를 찍었을 것 같다.
이런 영화에 아카데미상을 주다니, 아카데미의 속물적 대중성이 눈에 선하다.
드니로는 어린시절 엘리제베스 맥거번에 필이 꽂혔다.
맥거번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맥거번은 구질구질한 빈민촌 도시의 뒷골목에서 벗어나는게 꿈이다.
신분상승의 엘리베이터를 타고 뉴욕의 화려한 여신이 되고싶다.
드니로를 좋아했으면서도, 그녀가 드니로를 끝내 용납할 수 없었던 이유다.
그걸 잘 아는 드니로는 맥거번에게 제대로 된 구애를 시도조차 하지 못한다.
그들은 끝내 어긋나고, 결국 맥거번은 사람을 도구적으로 밖에 볼줄 모르는 우즈에게 고정된다.
불행한 결말을 피할 수 없다.
맥거번이 뉴욕이라는 도시공간이 만들어낸 허황한 꿈을 성찰할 줄 알았더라면!
드니로가 우즈와의 끈적한 친구관계를 성찰할 줄 알았더라면!
드니로가 우즈에게서 미끌어져 우즈와 다른 자기 삶을 가꿀줄 알았더라면!
드니로에게 친구가 아니라 동무라는 개념을 가르쳐 주고 싶었다.
김영민의 삶에 대한 자세가 워낙 진지하고, 심오하다.
그게 내 글에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
김영민은 체계에서 벗어나라고 충동질한다.
그가 제시하는 방법은 공부로 몸을 단련하라는 거다.
단순무식하게 그를 해석하면, 근대성의 체계(자본주의 체계)로 부터 벗어나는 방법이란 근대적 물질의 배치로 부터 미끌어지는 삶-몸을 구성하라는 거다.
그가 슬쩍 내비치는 구체적 방법이란 부재의 삶이다.
그가 없는 것은 아내-주민등록증-핸드폰-자동차다.
이게 나 처럼 범속한 사람이 실천하기는 엄두가 안난다.
작년 겨울방학에 블로그에 글 쓰기를 하면서 체중이 4kg쯤 빠지는 경험을 했었다.
그때 경험으로 글 쓰기가 실제로 신체를 새롭게 재구성한다는 경험을 했다.
내 신체를 강렬하게 구속하고 있던 무기력증 같은 것을 그 때 털어냈다.
아마 글 쓰기가 없었다면 지금과는 판이하게 다른 삶을 살고 있을것 같다.
그런점에서 가장 쉽게 체계의 포섭으로 부터 벗어나는 길은 글 쓰기다.
당연히 글 쓰기를 위해서는 읽기가 동시에 진행되어야 한다.
김영민 같은 대가가 되는 길은 너무 어렵다.
단지 체계의 노예로 전락하지 않을 최소한의 길을 제시하는게 오히려 더 필요하다.
그건 몸을 책읽기와 글쓰기에 배치하라는 거다.
읽기-몸-쓰기, 이런 식의 몸의 배치면 최소한 체계의 노예가 되는 길은 피할 수 있을것 같다.
그런데 몸이란게 일종의 공동체성이 있어야 한다.
타인들과의 관계를 배제한 완전한 독립적 존재란 있을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된다.
몸은 부단히 타인들과 접속해야 한다.
인간은 필연적으로 관계적 존재다.
김영민은 동무를 추천한다.
김영민이 말하는 동무는 同無다.
같은게 없다는 거다.
그가 그 전형성으로 제시하는게 박제가와 이덕무다.
이들은 박지원의 연암구룹에 속하는 17-18세기 조선말기 사상가들이다.
김영민에 따르면 박제가는 황소의 상을 하고 있었다.
이덕무는 조신한 선비 스타일이었다.
같은게 없는 이 둘은 서로에게 늘 서늘한 관계였다.
이덕무는 박제가의 급박한 성정을 항상 걱정스러워 했다.
박제가는 이덕무의 꼬장꼬장함을 싫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박지원 이라는 천년묵은 능구렁이와 함께 권력에서 미끌어져 간다.
그리고 미끌어지면서 조선유학의 답답함을 깨고 북학이라는 새로운 세계를 열었다.
동일성을 추구하는 친구란 어찌보면 유아적 감성이다.
사람이란 서로 다를 수 밖에 없다.
서로의 차이를 서늘하게 보아줄 수 있는 관계 그게 성숙한 관계일 것이다.
나의 동일성으로 상대를 포섭하는건 일종의 폭력이나 다름없다.
조폭영화의 주요한 감수성인 '우리는 식구다. 우리가 남이가!' 같은 정서들은 서로의 차이를 무화시킨다.
이게 프로이드의 엘릭트라 또는 오이디프스 심리와 동형성을 가진다는건 직감으로 알 수 있다.
대부분의 조폭영화가 가족 공동체적 감수성의 변주곡들로 허우적대는 스토리를 가진다.
동일성으로 상대를 묶어야하니 그런 유아적 감수성에 빠질 수 밖에 없다.
이런 관계는 탈출구 없는 자폐적 구조를 낳는다.
서로를 그 구조안에서 소모시켜, 폐기한다.
서로의 차이들로 미끄러지고 분열해야 한다.
그게 김영민이 말하는 同無의 관계다.
서늘하게, 서로 바라보면서 和而하는 관계일 것이다.
그렇다면 체계로부터 최소한의 자유를 확보할 수 있는 몸의 배치란 책-동무(몸들의관계)-쓰기 일것이다.
네그리의 말에 따르면 인간의 존재양식이 네트워크로 이동했으니, 책-동무(몸들의관계)-네트워크-쓰기 일것이다.
여기에 유머(니체)를 덧붙이면, 김영민의 진지함을 넘을 것 같다. http://www.sophy.pe.kr/
그럼 이런 몸의 메트릭스가 출현하나!
책-유머-동무(몸들의관계)-네트워크-쓰기.
언젠가는 만들 수 있을거다.
김영민식의 부재를 실천하자니, 엄두가 안난다.
오히려 그런 부재로 나아갈 내공을 쌓을 수 있는 존재의 관계망을 짜는게 실천의 맥락을 제공하는 것 같다.
cf) Once Upon a Time In America
최근에 심심해서 이 영화를 반복해서 보았다.
스토리가 워낙 왔다리 갔다리 한다.
시간도 뒤 섞여 있고, 인물들도 복합적이고 중층적이다.
반복해 보면서 확실한건 조폭영화의 전형성이라는 거다.
로버트 드니로는 섬세하고, 예민하고, 문학적인 여성성을 가지고 있다.
제임스 우즈는 끊임없이 사업을 벌이고 확장하면서 목표달성을 위해서는 피도 눈물도 없는 남성성의 전형이다.
먼저 드니로가 친구들을 배신한다.
드니로의 배신은 더 이상 범죄의 세계에 친구들이 빠져들어가는걸 막겠다는 섬세한 심성이 작동한다.
마지막에는 우즈가 드니로를 배신한다.
그의 배신은 철저하게 자신의 성공을 위한거다.
이런 과정에서 드니로는 우즈의 본성을 파악한다.
그러나 섬세하고 심약한 그는 우즈에게서 벗어나지 못한다.
가난한 어린시절을 같이보낸 친구라는 동일성에 포박되어 있다.
최종적으로 그는 우즈에게 사랑하는 연인까지 빼앗기고, 모든걸 빼앗긴다.
그래도 그는 심리적으로 그에게 남는다.
친구니까!
이태리 조폭영화의 전형인 '대부'시리즈를 변주했다.
친구-식구-가족-형제자매 같은 끈적한 감수성들이 폭력과 뒤범벅이 되어 철철 넘친다.
이준익이 할리우드의 자본으로 할리우드시스템에서 영화를 만든다면 이런 영화를 찍었을 것 같다.
이런 영화에 아카데미상을 주다니, 아카데미의 속물적 대중성이 눈에 선하다.
드니로는 어린시절 엘리제베스 맥거번에 필이 꽂혔다.
맥거번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맥거번은 구질구질한 빈민촌 도시의 뒷골목에서 벗어나는게 꿈이다.
신분상승의 엘리베이터를 타고 뉴욕의 화려한 여신이 되고싶다.
드니로를 좋아했으면서도, 그녀가 드니로를 끝내 용납할 수 없었던 이유다.
그걸 잘 아는 드니로는 맥거번에게 제대로 된 구애를 시도조차 하지 못한다.
그들은 끝내 어긋나고, 결국 맥거번은 사람을 도구적으로 밖에 볼줄 모르는 우즈에게 고정된다.
불행한 결말을 피할 수 없다.
맥거번이 뉴욕이라는 도시공간이 만들어낸 허황한 꿈을 성찰할 줄 알았더라면!
드니로가 우즈와의 끈적한 친구관계를 성찰할 줄 알았더라면!
드니로가 우즈에게서 미끌어져 우즈와 다른 자기 삶을 가꿀줄 알았더라면!
드니로에게 친구가 아니라 동무라는 개념을 가르쳐 주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