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먹기 또는 놀기

실패의 미학

디오니스트 2008. 1. 5. 21:31


하루종일 빈둥 거리며 책을 읽었다.
창 밖이 어둑해지고 있었다.
촌 구석에 사니 도시의 번잡함이 없어서 좋다고 생각하는 찰나.
닐리리 닐리리 닐리리-------(내 핸드폰 소리).

'야 뭐하냐?
놀고 있다.
술먹으러 와라.
모텔잡아주면 가께.
알았다. 쪼잔하게 잠자리 걱정하냐!
그럼 기다려라. 내가 총알 같이 가께.'

사실 가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공짜술과, 깡통처럼 시크럽고 떠들썩한 술자리의 유혹에 금방 굴복했다. 이놈 진짜 깡통이다. 그래서 자동차 몰고 1시간이나 걸려 달려왔다.

서둘러 전화를 건다.
'고객의 전원이 꺼져 있어 지금은 연결할 수 없습니다. 음성사서함으로 연결하겠습니다'

허걱, 그새 술에 뻗어버린 모양이다.
허탈하다.
황당하다.

이런 좀 구식 유머가 있다.
'트럭뒤에서 오줌 누고있는데 갑자기 트럭이 출발하면 : 황당'
'트럭뒤에서 오줌 누고있는데 갑자기 트럭이 후진하면 : 당황'

황당과 당황의 차이다.
황당은 존재의 근거가 사라져서 허공에 붕 뜬 느낌을 표현하는거 같고,
당황은 존재가 갑자기 위협적인 상황에 처해진 느낌을 표현하는 것 같다.

실제 국어사전에 황당과 당황이 그렇게 정의되어 있는지 어쩐지는 나도 모른다.
단지 이런 황당이나 당황이나 그것에 맞닥뜨려진 존재자에게는 어떤 대처가 필요하다.
존재의 근거가 사라지건, 존재가 위협을 당하건 그것은 예측했던 행위의 실패를 의미한다.
사람은 살면서 실패에 대면하도록 되어있다.
누구도 실패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렇다면 인생을 살면서 중요한 질문은 '실패하냐, 성공하냐'가 아니다.
올바른 질문은 '실패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다.

실패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오늘 읽은 책 한구절이다.

'넘어진 당사자는 절대로 자신이 넘어진 것을 웃는다든지 하지는 않는다. 단지 현명한 사람일 경우, 즉 자기를 조속히 이중화하여 자기자아의 제 현상에서 국외의 방관자로 입회할 힘을 습관에 의해 터득한 인간일 경우 그는 웃을 것이다(보들레르)'

실패를 신속히 타자화하여 담담하게 바라보아야 한다는 거다. 자기의 실패를 웃는다는 것은 그 실패에 매몰되어 허우적 대지 않고, 실패를 객관화하여, 그 실패를 타자로 만드는 거다. 실패와 자신을 분리시키는거다. 자기를 자기라고 인식하고 동시에 자기를 또 다른 타자로 변환시킬 때, 실패를 웃음으로 대면할 수 있다는 거다.

그래서하는 말인데 ,
트럭이 후진하면 일단 재빨리 도망가서, 친구들에게 그런일이 있었다고 말하면서 웃고 놀자.
트럭이 갑자기 출발해서 없어진 경우에도 일단 그 자리를 피하고, 나중에 친구들하고 그런일이 있었다고 말하면서 웃고 놀자.

니체의 짜라투스트라 이야기를 보면, 짜라투스트라가 환하게 웃으면서 비로소 인간을 극복하고 오버맨쉬가 된다는 구절이 있다. 그러면서 '똑 같은 놀이도 매번 다르게하면서 어린아이가 즐겁고 환하게 웃는것'이 오버맨쉬의 모습이란다.

오래전에 본 홍상수 감독의 영화 '해변의 연인' 마지막 장면이 생각난다. 고현정이 김승우에게 채이고, 별 시답지 않은 이유로 김승우를 붙들고 시비를 걸다가, 갑자기 씩 웃는 장면이 나온다. ending 장면인데, 나는 그 장면을 보고 홍상수의 영화적 말하기 기술의 힘을 느꼈다. 달랑 그 장면 하나로 홍상수는 고현정이 더 이상 과거에 묶인 존재가 아니라 새로운 존재가 되었음을 말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도 오늘 황당하기는 하지만, 일단 '별 실없는 놈 다있네'라고 중얼거리고, 씩 웃고, pc방에 와서 이글을 쓴다. 실패를 웃어주자 전혀 엉뚱한 결과가 왔다.

삶이 우연적이라는 것은, 삶이 웃긴다는 거다.

웃길려고하는 내가 웃긴다. ㅎㅎㅎ. (나를 타자화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