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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트릭스 : 기계인간과 기계적 인간
디오니스트
2010. 11. 10. 19:28
1. 기계인간
인간이 얼마쯤은 기계라는게 사실일까?
내가 아는한 인간은 점점 기계가 되어간다.
10여년 전만 해도, 무심한 나도 전화번호 20여개는 머릿속에 있었다.
지금은 하나도 없다.
머릿속에 있던 많은 것들이 이제는 저장기계 속에 들어가 있다.
30여년 전에 처음만난 워드프로세서는 타자기였다.
띠릭띠릭 소리를 내면서 돌아가는 타자기는 그 시절에 가장 갖고 싶었던 매혹적 물건이었다.
설사 당시에 그런 최첨단의 워프를 소유하고 있었다 할지라도, 저장정보들은 모두 종이에 쓰여진 것이었다.
그런 정보들은 상당 부분 순수하게 신체의 한 부분으로 남아있었고, 신체의존적인 정보였다.
지금 내가 사용하는 많은 정보들은 당시와 비교하면 내 신체로부터 훨씬 독립적이다.
누구나, 흔히 사랑이라고 말하는 정서적 친밀감의 교환은 가장 인간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과거에 사람들은 어쨓든 그것을 사람들을 통해서 직접적으로 교환하고 경험하였다.
지금은 그것도 많은 부분 기계가 매개하고, 기계로 또는 기계를 통하여 경험한다.
어쩌면 인간은 더 이상 기계없이는 사랑이라는 것도 할 수 없게 되었는지 모른다.
인간이 얼마간은 기계로 변환되어간다는게 사실이다.
이걸 '기계인간'이라고 해야하나?
2. 기계적 인간
문학이 죽었다,는 풍문이 흉흉하게 돌아 다닌다.
문학이란 기본적으로 독특한 서사다.
당신들이 알지 못했던 이런 삶이 있소! 라는게 문학의 어법이다.
더 이상 문학이 쓰여질 수 없을만큼 세상이 고르게 평평하다.
뉴욕의 패션이 일주일도 안되어 지구촌 구석구석에 퍼져나가는 현실에서 더 이상 독특한 삶은 불가능하다.
맘만 먹으면, 내가 먹고-싸고-자는걸 모든 사람들에게 실시간으로 생중계할 수 있다.
전세계적 매체는 인간들의 모든 욕망을 균질하게 만든다.
매체가 전달하는 이미지에 따라 인간들은 꿈꾸고 사랑하고 잠든다.
그래서 사람들은 점점 닮아간다.
어디서나 똑 같은 단일한 주체는 구조로서 주어져 있다.
사람들이 뻔하게 패턴화된 삶을 살고, 이야기는 거기서 거기다.
패턴화된 기계적 행동양식이 이미 주어져있다.
기계적으로 주어진 궤도에 맞추어 살아가고 있다.
사람들의 이런 상태를 가리켜 '기계적 인간'이라고 명명해야 하나?
3. 사이 존재로서 인간
'기계인간'이 되었든 '기계적 인간'이 되었든 결국은 사람들이 너무 동일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자기 삶의 주인으로서 자기만의 특별한 삶이 희귀하다는 현상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모두 체계의 노예가 되었을까?
메트릭스에서 처럼 체계에 저항하는 것조차 미리 프로그래밍된 것 일까?
모든 종말론이 사기였듯이 이것도 일종의 사기다.
인간들은 그 똑 같은 인간 사이에서 여전히 차이를 만들어 낸다.
그 차이가 프로그래밍된 것일 때 조차도, 사이의 차이는 여전히 남는다.
그래서 '주체는 소멸하고 유일한 것은 구조라는' 선언은 각성하자는 말이다.
구조 또는 체계의 구속력이 얼마나 강고한지 늘 깨단하라는 경고다.
주인으로서 자기 삶에서 우러 나오는 생생한 감수성에 기반한 균형감각을 잃지 말자는 과장이다.
그러니 '문학이 죽었다'는 선언은 '새로운 문학'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더 이상 문학은 없다고 호들갑 떨일이 아니다.
언제나 그렇듯 인간은 기계가 되겠지만, 여전히 기계로 설명할 수 없는 여분은 남을 것이다.
cf) 메트릭스 1편의 서사는 여전히 재미있다.
꼭, 처음 보는 영화 같다.
인간이 얼마쯤은 기계라는게 사실일까?
내가 아는한 인간은 점점 기계가 되어간다.
10여년 전만 해도, 무심한 나도 전화번호 20여개는 머릿속에 있었다.
지금은 하나도 없다.
머릿속에 있던 많은 것들이 이제는 저장기계 속에 들어가 있다.
30여년 전에 처음만난 워드프로세서는 타자기였다.
띠릭띠릭 소리를 내면서 돌아가는 타자기는 그 시절에 가장 갖고 싶었던 매혹적 물건이었다.
설사 당시에 그런 최첨단의 워프를 소유하고 있었다 할지라도, 저장정보들은 모두 종이에 쓰여진 것이었다.
그런 정보들은 상당 부분 순수하게 신체의 한 부분으로 남아있었고, 신체의존적인 정보였다.
지금 내가 사용하는 많은 정보들은 당시와 비교하면 내 신체로부터 훨씬 독립적이다.
누구나, 흔히 사랑이라고 말하는 정서적 친밀감의 교환은 가장 인간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과거에 사람들은 어쨓든 그것을 사람들을 통해서 직접적으로 교환하고 경험하였다.
지금은 그것도 많은 부분 기계가 매개하고, 기계로 또는 기계를 통하여 경험한다.
어쩌면 인간은 더 이상 기계없이는 사랑이라는 것도 할 수 없게 되었는지 모른다.
인간이 얼마간은 기계로 변환되어간다는게 사실이다.
이걸 '기계인간'이라고 해야하나?
2. 기계적 인간
문학이 죽었다,는 풍문이 흉흉하게 돌아 다닌다.
문학이란 기본적으로 독특한 서사다.
당신들이 알지 못했던 이런 삶이 있소! 라는게 문학의 어법이다.
더 이상 문학이 쓰여질 수 없을만큼 세상이 고르게 평평하다.
뉴욕의 패션이 일주일도 안되어 지구촌 구석구석에 퍼져나가는 현실에서 더 이상 독특한 삶은 불가능하다.
맘만 먹으면, 내가 먹고-싸고-자는걸 모든 사람들에게 실시간으로 생중계할 수 있다.
전세계적 매체는 인간들의 모든 욕망을 균질하게 만든다.
매체가 전달하는 이미지에 따라 인간들은 꿈꾸고 사랑하고 잠든다.
그래서 사람들은 점점 닮아간다.
어디서나 똑 같은 단일한 주체는 구조로서 주어져 있다.
사람들이 뻔하게 패턴화된 삶을 살고, 이야기는 거기서 거기다.
패턴화된 기계적 행동양식이 이미 주어져있다.
기계적으로 주어진 궤도에 맞추어 살아가고 있다.
사람들의 이런 상태를 가리켜 '기계적 인간'이라고 명명해야 하나?
3. 사이 존재로서 인간
'기계인간'이 되었든 '기계적 인간'이 되었든 결국은 사람들이 너무 동일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자기 삶의 주인으로서 자기만의 특별한 삶이 희귀하다는 현상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모두 체계의 노예가 되었을까?
메트릭스에서 처럼 체계에 저항하는 것조차 미리 프로그래밍된 것 일까?
모든 종말론이 사기였듯이 이것도 일종의 사기다.
인간들은 그 똑 같은 인간 사이에서 여전히 차이를 만들어 낸다.
그 차이가 프로그래밍된 것일 때 조차도, 사이의 차이는 여전히 남는다.
그래서 '주체는 소멸하고 유일한 것은 구조라는' 선언은 각성하자는 말이다.
구조 또는 체계의 구속력이 얼마나 강고한지 늘 깨단하라는 경고다.
주인으로서 자기 삶에서 우러 나오는 생생한 감수성에 기반한 균형감각을 잃지 말자는 과장이다.
그러니 '문학이 죽었다'는 선언은 '새로운 문학'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더 이상 문학은 없다고 호들갑 떨일이 아니다.
언제나 그렇듯 인간은 기계가 되겠지만, 여전히 기계로 설명할 수 없는 여분은 남을 것이다.
cf) 메트릭스 1편의 서사는 여전히 재미있다.
꼭, 처음 보는 영화 같다.